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8]-5 식민지 지배라는 수준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5 식민지 지배라는 수준
둘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또는 차별이라는 시각입니다. 주로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런 시각에서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 왔습니다.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의 거의 대부분이, 예컨대 8~9할이 조선여자였다는 겁니다. 또는 총독부가 행정계통을 이용하여 마을 단위로 여자들을 할당하여 징발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국의 연구자들은 일제가 일본여자들은 놔두고 주로 조선여자를 강제로 끌고 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까지 가세하여 어느덧 일제가 반도의 순결한 처녀의 성을 거칠게 유린했다는 식의 이해가 대중화되고 말았습니다.

위안부의 총수가 얼마인지는 2만에서 20만까지 연구자마다 설이 구구합니다. 그 가운데 조선여자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도 구구한 설이 있습니다. 저는 조선여자로서 위안부의 수가 얼마였는지는 갖가지 증언이나 자료를 총괄하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다음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위안부는 1,400명 정도였습니다. 화중(華中) 지역이 대개 그 정도였으므로 그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의 수를 알면 전 중국에 분포한 조선 위안부의 수는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방식으로 동남아나 남태평양에 분포한 위안부의 수도 추정이 가능하겠습니다. 어쨌든 일본군 위안부의 8~9할이 조선여자였다는 주장에는 찬성하기 힘들군요. 처음부터 무슨 근거가 제시된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태연하게 이야기되었던 것인데요, 어느덧 통설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조선여자만 색시장사에 걸려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색시장사로 끌려간 일본여자에 관한 증언도 많이 있습니다. 실은 그녀들부터 먼저 끌려갔던 것이죠. 일본에서는 그에 따라 사회적 물의가 일었습니다. 그러자 기왕에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자로서 본인의 동의가 명확한 경우 이외에는 경찰이 강하게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속아서 끌려가는 여자들이 있었지요. 그에 비하자면 조선 총독부의 색시장사 단속에는 훨씬 성의가 부족하였습니다. 아주 심하게 150여 명의 여자를 팔아넘긴 악독 사범이 체포된 기록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에 비해 단속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며, 아예 없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식민지 지배의 차별성을 지적하는 것은 옳습니다만, 그렇다고 일본여자는 놔두고 조선여자만 끌고 갔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많은 예가 있습니다만, 저 멀리 동남아와 남태평양으로 간 일본여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장의 범위가 가장 넓었던 중국에서는 중국여자의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중국의 연구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요, 여러 가지 이유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다수의 조선인 병사들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데요, 자세한 소개는 뒷날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총독부가 행정력을 이용하여 마을 단위로 여자들을 할당하고 징발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끼 교수도 “말단에서 관헌의 직접적인 관여를 나타내는 자료는 현재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앞으로 언젠가 그런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별 근거도 없이 관헌들이 여자들을 징발하거나 납치했다는 식으로 무성하게 이야기되어 온 것에 대한 비판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83년에 낸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에서 1943년 5월 부하 9명과 함께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출발하여 제주도로 건너와 성산포와 법환리 등에서 200여 명의 여자를 위안부로 납치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책은 1989년 국내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전쟁범죄 고백은 일제가 관헌을 동원하여 여자들을 징발하였다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가 세밀히 조사한 결과 요시다의 고백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1989년 8월 14일 제주신문은 성산포 등 여인들이 끌려갔다고 하는 마을을 취재한 결과 그러한 일은 없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성산포 주민으로서 당시 85세의 정옥단은 “그런 일은 없다. 250여 가호밖에 안 된 마을에서 15명이나 징용해 갔다면 얼마나 큰 사건인데… 당시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제주도 향토사가인 김봉옥 씨는 “요시다의1983년 일본어판이 나오고 나서 몇 년간이나 추적 조사한 결과, 사실이 아님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일본인의 악덕풍을 나타내는 경박한 상혼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책을 써서 이름을 내고 돈을 벌고 싶은 악덕 상혼의 소치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요시다라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세밀히 분석하면 식민지의 여인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해 마음껏 유린하고 싶었던 제국주의자들의 고약한 리비도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당시 총독부의 전시통제정책의 실상을 소상하게 증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요. 1939년부터 충남 논산군에서 공직생활을 출발한 어느 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1941년부터 노무자의 모집, 징병제의 실행, 각종 물자의 징발과 배급에 깊이 관여한 당시의 살아 있는 증인이지요. 그분께 몇 차례 물었습니다만, 자기가 종사한 일반 행정계통을 통해 여자들이 모집되거나 동원되는 일을 없었다고 하는군요. 다만 교육계통을 통해 정신대를 모집하는 일은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여자들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에 동원한 별도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론 농촌의 가난이 너무 심하여 여자들을 밀어내는 힘도 강력했고, 밖에서 모집책의 끌어당기는 힘도 강력하여 관에서는 굳이 강제력을 발동하지 않아도 좋을 상황이었습니다. 방관만 해도 저절로 돌아갈 정도로 활발히 작동하는 인신매매시장이 성립해 있었던 것이죠. 그 점에서 1944년 8월 일본으로 남성 노동력을 송출하기 위해 발동된 국민징용령의 경우와는 사정이 판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는 국제적 노동이동과 관련하여 인력을 수집하고 송출하고 분배하는 민간 시장기구가 성립해 있습니다만, 당시의 노동시장 여건은 그런 수준이 못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관을 대신할 대리인이 없었던 것이죠. 그럴 경우에 관의 행정력이 직접 발동되는 법이지요. 그 점은 경제학의 상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점은 총독부의 관헌이 직접 더러운 손을 대지 않았다 해서 일본군이나 총독부가 저지른 전쟁범죄가 면책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로로 끌려왔던 간에 여인들을 군 시설의 일부인 위안소에 수용하여 성적 위안을 강요한 것 자체가 정장에서 기술한 대로 매춘업을 위한 여인의 국제 매매와 미성년의 매춘과 노예제를 금지한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로서 반인륜 전쟁범죄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어떻게 끌려왔는가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혹 그 점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싶어 이상과 같은 저의 진의를 좀 더 명확히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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