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8]-3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2)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3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2)


중국 한커우의 위안소 앞에 줄을 서있는 일본군 병사들

중국 한커우의 위안소 앞에 줄을 서있는 일본군 병사들.

다음, 군의 관리매춘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독일군도 일부 점령지에서 위안소를 조직했습니다만, 일본군만큼 전면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설명한 대로 일본 고유의 공창제의 역사를 전제로 한 위에, 병사들의 성을 집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와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가 상호 작용하여 위안소라는 관리매춘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사람들에겐 그런대로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컨대 1942년 싱가포르가 함락될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본군이 싱가포르의 여인들을 겁탈할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중에 싱가포르 수상이 된 10대 후반의 리콴유는 일본군이 세운 위안소 앞에 병사들이 200명이나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일본 나름의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속에는 일본여자와 조선여자가 있었답니다(《리콴유 자서전》, 문학사상사, 71~72쪽). 그녀들 덕분으로 싱가포르 여자들이 몸을 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역시 가부장 문화에 익숙한 중국계다운 생각입니다.

조금 놀라시겠지만, 군에 의한 관리매춘은 우리의 한국전쟁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서울, 춘천, 원주, 강릉, 속초 등지에 위안부대가 설치되었습니다. 서울의 위안소는 현재 중구의 백병원에서 쌍용빌딩으로 가는 그 고갯길에 있었습니다. 공식 보고에 의하면 1952년 서울 세 곳과 강릉 한 곳에 수용된 위안부는 모두 89명이었으며, 그해에 위안소를 방문한 병사는 총 20만 4,000여 명으로서 위안부당 하루 평균 6명의 꼴이었습니다.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어느 참전 용사의 회고에 따르면 춘천 소양강변에서는 여러 채의 천막이 세워지고 병사들이 죽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서 있는 광경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외에 각 부대는 부대장의 재량으로 주변의 사창가로부터 여인들을 조달하여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는데, 부대에 따라서는 위안부를 ‘제5종 보급품’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보급품을 트럭에 싣고 전선을 이동한 특무상사 출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위안부를 전선으로까지 데려가는 것은 허락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드럼통에다 여인을 한 명씩 담아 트럭에 싣고 최전선으로까지 갔답니다. 밤이 되면 전(廛)이 펼쳐졌는데요, 미군들도 많이 이용하였답니다.
1956년 육군본부는 한국전쟁의 전사를 편찬하면서 위안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설치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위안소 제도를 도입한 일본군의 생각도 대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 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육군본부 군사감실,《후방전사(인사편)》, 1956,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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