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전장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소설《농군》의 작가 이태준은 만주를 여행합니다. 펑티엔[奉天]역 이등대합실에서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자를 만납니다. 한 여자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30이 훨씬 넘어 보이고, 다른 한 여자는 솜털이 까시시한 16살의 소녀이고, 다른 셋은 22~23세로서 핏기는 없으나 유들유들하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입니다. 다들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랑수염의 노신사가 서 있습니다. 이태준이 여자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노신사가 다가와 시비조로 무엇 때문에 묻느냐고 하면서 베이징[北京] 근방으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인들은 노신사를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태준은 그 노신사를 베이징이나 티앤진[天津]의 여관이나 요릿집의 주인쯤으로 짐작하고 “험한 타국에 끌려가는 젊은 계집들”에 새삼스레 ‘골육감’을 느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었습니다(《무서록》, 서음출판사). ‘골육감’이란 말이 조금 낯섭니다만, 동포로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다음에는 1941년에 나온 최명익의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소설입니다. 어느 열차의 혼잡한 3등 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한 신사가 젊은 여인을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은 신사와 여인의 관계를 궁금해 합니다. 신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어느 사람이 “만주나 북지로 다녀 보면 돈벌이는 색시장사가 제일인가 봐”라고 하여 여자가 끌려가는 색시임을 맞춥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신사는 일선으로 다니면서 색사장사한 자기의 경력을 털어 놓습니다. 역시 돈벌이는 그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여인을 이삼십 명씩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도 합니다. 데리고 가는 색시는 도망쳤다가 잡혀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역에 도착하자 신사는 내리고 그 아들이 탑니다. 아들은 다짜고짜 여인의 뺨을 후려칩니다. 도망에 대한 화풀이지요.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화장실로 갑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설 속의 나는 그 여인이 자살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여인이 화장실에 간 것은 화장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여인은 아들에게 함께 도망친 다른 여인의 소식을 묻습니다.

이렇게 그 시대는 도처에서 여인을 끌고 가는 색시장사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여인의 뺨을 쳤지요. 그래도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앞서 저는 조선의 여인들이 어떻게 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보내졌는가를 물었습니다만, 저의 한 가지 대답은 색시장사입니다. 색시장사가 그녀들을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점은 그 시대의 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생존 위안부 175명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증언하였지요. 그에 따르면 175명 가운데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정진성,《일본군 성노예제》, 66쪽). ‘협박 및 폭력’과 ‘취업사기’가 어떻게 다른지 관련 책을 유심히 보아도 자세한 설명이 없군요. 제가 보기에 이 둘은 구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업사기가 들통이 난 그 순간부터 색시장수는 폭력배로 돌변하지요. 그들은 딸을 가진 가난한 집에 접근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딸을 데리고 갑니다. 경우에 따라선 거액의 선대금을 지불하지요. 그런 경우엔 사실상 딸을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삼이사》에 의하면 1941년 색시들의 몸값은 1천 원의 거액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은 다양합니다. 상하이 위안소에 갔다가 어느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몸을 건진 김씨 할머니는 1937년 17살 때 돈벌 수 있다는 모집인의 말에 속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를 위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위안부가 되는 줄 알고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색시장수들은 군위문단을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7월 함경도 청진의 어느 소녀가 위안소로 끌려간 것은 관동군 위문단의 모집에 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도 유력한 경로의 하나였습니다. 군에서 간호부로 일한다거나 밥 짓고 빨래하는 여자를 구한다고 해놓고선 위안부로 끌고 간 경우가 되겠습니다. 1940년 일본군이 남중국 난닝[南寧]이란 곳을 점령한 다음 위안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곳으로 황씨 성을 가진 조선 남자가 수십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황씨는 지주의 아들이고 데리고 간 여자들은 모두 소작농의 딸이었지요. 황씨는 당초 육군 직할의 다방과 식당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위안소를 경영하면서 그 남자는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1944년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안씨 성의 조선 남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친구가 하던 것을 인수했다고 합니다. 위안소 경영의 가장 큰 애로는 계약기간이 끝나 돌아간 여자의 뒤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고향에 돌아간 친구가 여자들을 계속 대주어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업자들은 1년에 한두 번씩 직접 고향에 가서 여자들을 구해 오는 것이 여간 큰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군령(軍令)을 사칭하는 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이라고 속인다는 뜻이겠지요. 떳떳하게 신문광고를 내는 모집책도 있었습니다. 현재 알려진 신문광고로는 경성일보에 2건과 매일신보에 2건이 있습니다.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 광고를 보면 “위안부 지급 대모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연령은 17~23세, 근무지는 후방 ○○대 위안부, 월수는 300원 이상, 전차금 3000원 가능”이라 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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