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7]-2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2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정신대의 실체가 원래 이와 같았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예컨대 1946년에 나온 이태준의 소설《해방전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은 메칠 안 남았다고 하지만 특공댄(特攻隊)지 정신댄(挺身隊)지 고 악지 센 것들이 끝까지 일인일함(一人一艦)으로 뻐틴다면 아모리 물자 많은 미국이라도 일본 병정 수효만치야 군함을 만들 수 없을 거요. 일본이 망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같은 걸 기다리나 보오!

일제가 곧 망할 것이라는 주인공 현의 말을 반박하는 아내의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대는 특공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 정신대라는 말을 일본어사전에서 찾으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각오로 조직된 부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大辭林》). 그래서 원래 정신대라 하면 ‘여자정신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명칭과 목적의 정신대가 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다양한 목적의 특공대가 있었지요. 그러했기 때문에 이태준도 그의 소설에서 “특공댄지 정신댄지”라 하면서 이 둘을 동어반복의 형태로 나열했던 겁니다.

뒤이어 1952년이 되면 신석호 선생이 지은《우리나라의 생활(국사 부분)》이라는 교과서에서 정신대란 말이 다음과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하략)

여기서 정신대는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하나로 열거되어 있는데요, 앞서 설명한 군수공장으로 투입된 여인들의 근로조직을 가리키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의 접대 행위를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인의 일반적 언어 감각에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석호 선생의 역사 교과서는 1962년까지 발행되었습니다. 역사교과서의 기술이 지니는 의의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국민의 집단기억을 공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역사교과서에서 정신대는 1960년대 초까지 위안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과 같은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일반적으로 성립해 있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양자를 혼동하는 개인의 개별적인 기억은 정신대가 모집되었던 1944년 당시부터 있었다고 보입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집단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1962년 신석호의 역사교과서가 중단된 다음 1979년까지 역사교과서는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간에 알게 모르게 국민의 집단기억에 있어서 정신대의 실체가 위안부로 슬슬 바뀌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소설에서 그 좋은 증거를 찾을 수 있지요. 제가 읽어 본 제한된 범위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정신대를 위안부로 묘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소설 사례로서 1969년에 나온 김정한의《수라도》(修羅道)를 들 수 있습니다. 소설의 무대는 일정 말기 낙동강 하구의 어느 마을입니다. 이와모도[岩本]로 창씨한 마을의 구장이 처녀들을 정신대로 징발하려 합니다. 김정한은 정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저희들 말로는 전력 증강을 위한 ‘여자정신대원’이란 것인데, 일본 ‘시즈오카’라든가 어딘가에 있는 비행기 낙하산 만드는 공장과 또 무슨 군수 공장에 취직 시킨다고 했지만, 막상 간 사람들로부터 새어 나온 소식에 의하면 모조리 일본 병정들의 위안부로 중국 남쪽지방으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김정한은 1908년생으로서 식민지기를 몸소 겪은 분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정신대의 원래 뜻을 정확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간 여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막상 정신대로 간 사람들로부터의 ‘소식’에 의하면 중국 남방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소식은 과연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요. 소설을 좀 더 따라 읽으면 드디어 마을의 여인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결국 옥이에게 붉은 닦지가 나오고야 말았다. 역시 그놈이었다. 여자정신대원! 일본 병정의 위안부!

소설의 주인공 가야부인의 몸종인 옥이 처녀에게 드디어 ‘붉은 딱지’, 곧 정신대 영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붉은 딱지’[赤紙]는 군인으로 징병될 청년들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흰 딱지’[白紙]도 있었는데요, 징용 대상자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여자정신대에 대해서는 붉은색이든 흰색이든 영장이 발부된 적이 없습니다. 전술한 대로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장을 발부하기 위해 국가는 치밀하게 준비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의 직업능력을 등록시킨 필요가 있습니다. 호적지를 떠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늘날의 주민등록부와 같은 것이 정비될 필요도 있습니다. 동원의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예비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실제 총독부는 1938년 발포된 ‘국민총동원법’에 근거하여 이러한 준비과정에 착수합니다.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국민등록제를 실시하였으며, 기류령(寄留令)을 공표하여 호적지를 떠나 사는 사람들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농촌청년을 대상으로 일본말을 가르치고 제식훈련을 시키는 등, 이른바 연성(鍊成)과정을 운영했습니다. 총독부가 1944년 징병제와 국민징용령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이 같은 준비작업이 치밀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그러한 준비작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동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실행하려야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여건이었지요.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여자들이 학교나 직장 단위로 정신대로 간 것은 사실상 강제였습니다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지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딱지 같은 것이 발부된 적은 없었던 것이죠.

김정한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역사가처럼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시 붉은 딱지가 조선인을 상대로 발부되었다는 사실, 여인들이 정신대로 나갔다는 사실, 그리고 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는 장소와 시간을 달리 하는 이 세 가지 사건을 그 스스로도 당시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인 1969년에 이르러 어렵지 않게 하나로 통합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붉은 딱지’가 발부된 “여자정신대! 일본병정의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설처럼 쓰인 소설이었지요. 그렇지만 소설의 힘은 위대합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분노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소설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신대를 위안부로 아는 국민의 집단기억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제가 읽었던 좁은 범위의 근거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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