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4 친일 내셔널리스트

[6] 협력자들  [6]-4 친일 내셔널리스트
다시《재인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조관자 교수의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는 친일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이광수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것입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이광수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당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협력자로 돌아선 것은 적어도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친일파라 하면 그렇게 알고 있지만, 조관자의 논문은 그러한 통설적 이해를 정중히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광수는 진지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일본을 조선이 본받아야 할 선진 문명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의 불결, 무질서, 비겁, 무기력 등에 절망합니다. 그러한 야만의 조선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일본인처럼 깨끗하고 질서 있고 용감하며 협동하는 문명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야말로 조선 민족이 재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정직하였습니다. 조관자 교수는 그러한 정신세계의 이광수를 ‘친일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친일을 하는 민족주의자! 이 얼마나 모순된 표현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러한 모순된 표현에서 이광수만이 아니라 식민지기를 살았던 대다수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서 협력과 저항은 신구 두 문명이 격렬히 충돌하는 고통이었으며, 그 속에서 문명인으로 소생하기 위한 실존적 선택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식민지기의 그러한 정신세계는 최경희 교수의 논문 <친일문학의 또 다른 층위ㅡ젠더와《야국초》>에서 더없이 섬뜩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사 전공자로서 문학사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이 논문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최정희라는 여류 작가의 《야국초》라는 소설은 1942년 어느 조선인 어머니가 열 살 날 아들을 데리고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하여 아들에게 훈련소를 견학시키면서 아들이 나이가 차면 일본군으로 보낼 것을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할 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러한 시국에서 최정희의 《야국초》는 두말할 필요 없이 선전의 목적으로 쓰인 친일문학이지요. 그렇지만, 최경희 교수는 정치적 입장이 그렇다고 하여 소설의 저변에 깔린 문화적 요소의 의미마저 모조리 무시해서는 곤란하다고 하면서 종전까지 소홀하였던 여성의 시각에서 소설을 다시 읽자고 제안합니다. 그 어머니는 간호부라는 직업을 가진 신여성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어느 조선인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만, 아기를 임신하자 남자는 배신하고 맙니다. 어머니는 낙태의 유혹을 이기고 아들을 사생아로 낳지요. 어머니가 그 아들을 일본군에 보내려고 하는 것은 그 아들을 비열하고 무책임한 조선의 사생아가 아니라 정직하고 책임 있는 제국의 아들로 바치고자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배신한 조선의 남자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바쳐진 아들은 결국 전쟁에 나가 죽게 되겠지요.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결국, 이 소설은 단순한 친일 선전문학이 아니라 남성과 제국의 횡포에 속절없이 순응하며 희생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여성의 절망과 죽음을, 나아가 작가 최정희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그린 것입니다. 제가 전율을 느낀 것은 최경희 교수의 섬세한 분석이 이 대목에 미칠 때였습니다. 다시 말해 협력은 절망이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저항이 아닙니까. 협력과 저항의 경계는 그렇게 다시 한번 애매해졌습니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