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2 중인 출신의 협력자들

[6] 협력자들  [6]-2 중인 출신의 협력자들
협력자들은 주로 전통 조선시대에 신분이 억눌린 계층에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전장에서는 경상도 예천의 어느 마을에서 을사조약 이후 상민들의 신분이 해방되어간 예를 들었습니다만, 비슷한 이야기는《재인식》2권의 말미에 실린 편집자들의 대담 가운데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망하자 양반 마을에서는 환성이 울려 퍼졌지만 상민 마을에서는 조용했다는 겁니다. 서북인들, 곧 평안도 출신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망하자 평안도 사람들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는 평안도 사람들을 차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시험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차별받은 주민이라면 왕조의 멸망을 기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협력자를 대표한 세력은 주로 아전(衙前)이라는 구래의 중인 신분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군현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계층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전문적인 지식인이었지만 그들의 사회적 진출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반관료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자 그들은 다른 어느 계층보다 재빨리 그에 적응합니다. 원래 실무와 정보에 밝았던 그들이었지요. 그들은 상인으로 또 지주로 변신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는 이들 중인출신의 신흥지주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반면에 구래의 양반신분으로서 시대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민족이 지배하는 식민지기는 하늘의 도가 무너진 난세와 같았습니다. 이에 정통 양반신분의 사람들은 대개 은둔의 생활 자세를 보이거나 소극적으로 시세에 적응할 뿐이었습니다.

신흥지주들은 대체로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 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총독부의 관료로 진출하거나 각급 협의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예컨대 1925년 전국에 군수를 지낸 250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중인 출신이었습니다. 신흥지주들은 대체로 그들의 자식을 일본으로 유학시켰습니다. 일본으로 간 그들의 자식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인 일본의 신문명에 압도되면서 일제의 협력자로 키워집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지요. 유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새로운 문명의 기초 가치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이지요. 그것은 곧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지요. 유학생들은 그렇게 민족의식을 자각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민족적인 지식인으로 바뀝니다.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협력과 저항의 경계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한국의 근대 문화와 학문은 대부분 이 같은 정신세계의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역사학의 최남선, 문학의 이광수, 한글학의 최현배, 경제학의 백남운 등, 예를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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