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3 신분제의 해체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3 신분제의 해체
이후 조선에서는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문명이 접합하여 서로 다른 유전자를 섞으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이하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신분제의 해체입니다. 이른바 사민(四民)평등의 시대가 찾아 왔습니다. 1909년 경상도 예천군의 맛질이란 양반 마을에서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 온 박씨 양반가는 어느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저 을사(乙巳) 이후에 양반과 이속(吏屬)들이 겁탕당하고 궁민과 평민이 때를 만났는지라. 동리의 상한(常漢)들이 양반을 칭하고 옛날 호칭은 간데없고 다툴 때는 호이호군(呼爾呼君)하니(하략)”(《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93쪽).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 마을의 상놈[常漢]들이 양반을 업신여기고[겁탈하고] 서로 다툴 때는 막말을 하는[呼爾呼君] 사태가 생겼다는 겁니다. 양반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변화가 왜 생겼습니까. 일제라는 새로운 지배자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일제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과 무관한 중립 권력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신분으로 차별하는 일은 일제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동화정책에 어근나기 때문입니다. 1908년 같은 마을에서의 일입니다. 동네 앞을 지나는 도로를 닦는데 노동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양반가의 자제들은 그러한 부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들은 그런 일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양반가의 자제들도 삽을 들고 도로에 나가 흙을 파고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히 양반과 상놈이 말을 트는 평등의 시대가 찾아 온 것이지요.

1920년대가 되면 형평사(衡平社)라는 백정(白丁)의 단체가 백정의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을 벌입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 백정은 소나 돼지를 도살해 주고 그 가죽으로 신발 등을 만드는 직업인이었습니다만, 보통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아니기에 성도 없었고 호적에도 등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1909년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에게도 등록을 강제했습니다. 그 통에 백정들은 성도 갖고 본관도 갖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백정의 자녀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형평사 운동 당시의 일이지요. 그러자 양반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어찌 내 자식을 백정의 자식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게 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특히 경상도 예천 지방에서 양반의 데모가 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국가의 간성(干城)이라 하여 양반들이 데모를 하면 국왕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통과 무관한 외래 권력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양반의 데모대는 총독부의 경찰에 의해 간단히 진압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백정 신분은 죄다 사라지고 보통사람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백정과 비슷한 존재가 일본에는 아직도 있습니다. 부락민(部落民)이라고 하지요. 자기 나라의 전통과 관습이니까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에 비하면 조선에 온 제국주의 권력은 차별의 해고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셈입니다. 현지의 전통과 관습과 무관한 외래 권력이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식민지기의 신분제 해체는 어디까지나 공적 영역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관습과 의식의 영역에서 신분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신분은 인간관계의 사회적 결을 가르는 차별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크게 보아 1950년대까지의 농촌사회가 그러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16장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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