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4 조약 개정을 위한 고투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4 조약 개정을 위한 고투
[ 불평등 조약의 문제점 ]
막부 말에 일본이 구미 각국과 맺은 조약은 상대국에게만 치외법권을 인정하거나 일본에게 관세자주권이 주어지지 않는 등, 몇 가지 점에 있어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이는 일본인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구미 각국과의 법적인 차별을 해소하는 조약개정은 메이지시대 일본인의 비원(悲願)이자 일본외교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이미 1871(메이지 4)년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은 미국과 조약개정을 위한 예비교섭을 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형법 등의 일본 법률이 정비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치외법권의 철폐를 뒤로 미루고 영국과의 사이에 관세자주권의 회복을 시도하 였다.(*1) 그러나 아편 밀수사건이 발생하고, 치외법권을 행사해서 재판에 임했던 영국영사는 아편은 약용(藥用)이라고 하여 범인인 영국상인을 무죄로 하였다.(*2) 국민은 이에 분노하였고 정부는 치외법권에 손을 대지 않는 조약개정교섭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1878년)

(*1) 외국의 상품에 대한 일본의 관세는 일률적으로 5%로 하기로 약속하게 하면서, 일본 상품에 대해 영국은 평균 10% 이상의 관세를 매겼다.
(*2) 치외법권 중 외국인이 범죄를 일으켰을 경우, 그 나라의 영사가 범죄자를 재판할 수 있는 권리를 영사재판권이라 한다.

[ 로쿠메이칸(鹿鳴館)과 노르만톤호 사건 ]
1883(메이지 16)년, 정부는 도쿄의 히비야에 로쿠메이칸(鹿鳴館)이라는 서양풍의 건물을 짓고 외국인을 초대하여 빈번하게 무도회를 열었다. 이것은 일본도 구미와 대등한 문화를 가진 나라임을 세계에 과시하여 조약개정을 유리하게 추진하려는 시도였다.

1886(메이지 19)년, 노르만톤호사건(*3)이 일어났다. 심사를 한 영국영사재판소는 선장에게 금고 3개월이라는 가벼운 벌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 사건을 경계로 치외법권을 철폐하기 위한 조약개정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한층 강해졌다.

정부는 외인재판(外人裁判, 역주: 외국인에 대한 재판)에 있어서 재판관의 과반수를 외국인으로 하는 대신에 치외법권의 철폐를 외국에게 인정하게 하는 타협안을 만들었지만, 국민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1887년)

(*3) 영국 기선(汽船) 노르만톤호가 와카야마현의 기이반도(紀伊半島) 앞바다에서 폭풍우로 인해 침몰하였다. 이 때 선장 이하 26 명의 영국인 선원은 구출되었지만, 일본인 승객 25 명은 전원이 죽도록 방치되어 익사하였다.

[ 치외법권의 철폐 ]
1889(메이지 22)년, 일본이 자신들의 헌법을 제정한 동기의 하나는 조약개정이었다. 이윽고 최대의 강국인 영국은 이러한 일본의 근대화 노력을 인정하고, 또한 극동으로 진출해 온 러시아에 대항하려는 목적도 있어서 일본과의 조약개정 교섭에 응하였다. 교섭의 책임자였던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무대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4(메이지 27)년 일청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영통상항해조약(日英通商航海條約)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의 내지를 개방하는 대신에 치외법권이 철폐되었다. 그후 일청전쟁에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을 비롯한 각국도 치외법권의 철폐에 응하였다.

일노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인 1911(메이지 44)년, 일본은 미국과의 관세자주권회복을 위한 교섭에 성공하여 조약개정의 비원(悲願)이 달성되었다. 이와쿠라사절단의 교섭으로부터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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