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3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문명 개화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3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문명 개화
[ 식산흥업(殖産興業) ]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구미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지화는 진행되었다. 정부는 일본을 구미 나라들에게 지배 받지 않는 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제창하며 국가 건설에 힘썼다.

1868(메이지 1)년 정부는 막부가 경영하고 있던 광산과 조선소를 관영(官營)으로 하였다. 교통과 통신의 분야에서는 1869(메이지 2)년에 전신제도, 1871년에 우편제도가 시행되고, 나아가 다음해인 1872년에는 신바시(新橋)-요코하마(橫濱) 간에 철도가 개통되었다.

사이고(西鄕) 등이 정부를 떠난 후, 그 중심이 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정부의 강력한 지도와 정부자금의 투입에 의해 근대산업을 육성하는 식산흥업 정책에 착수하였다. 외국의 기계를 구입하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제사, 방적 등의 관영공장(官營工場)을 만들고, 이후 민간에게 불하하여 경공업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보여지는 기술의 성숙을 토대로 서양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정부는 1869년에 에조치(蝦夷地)를 홋카이도(北海道)로 개칭하고 사족이나 둔전병(屯 田兵)을 입식(入植)시켜 왔는데, 식산흥업이 정책으로 도입되자 그 일환으로서 홋카이도 개 척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식산흥업에 관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건백서(建白書)>(1874년)
무릇 나라의 강함과 약함은 인민의 빈부에 의한 것이고, 인민의 빈부는 물산(物産)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물산의 많고 적음은 인민이 공업에 힘쓰는가 아닌가에 기인하자만, 그 근본은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정부의 지도 장려에 의하게 된다. (『오쿠보 도시미치 문서』에서 일부 요약)

[ 문명 개화 ]
메이지유신 직후에는 왕정복고가 선언되기도 한 점도 있어서 국학(國學)이나 신도(神道)의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일부에서 대단히 과격해지고, 각지에서 불교를 공격하여 사원이나 불상을 파괴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폐불훼석[廢佛毁釋])

그러나 서양문명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점차적으로 이해하게 되어, 문명개화 의 중요성이 제창되게 되었다. 1873년에는 태양력이 채용되어 1일이 24시간, 1주간이 7일간, 일요일은 휴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인정받게 되었다.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전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장』 등의 계몽서 가 출판되어, 신분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 속에서 독립자존 정신의 중요성이 해설 되어 널리 읽혀졌다. 신문이나 잡지도 많이 발간되어 구미 각국의 생활과 풍속, 사상 등을 소개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도쿄 등의 도시에서는 모자와 양복의 착용, 소고기의 식용, 램프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벽돌로 만든 서양풍 건축의 거리에 는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인력거와 마차가 달리는 문명개화의 광경이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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