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2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었나?

[2] 민족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자  [2]-2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었나?
그 점을 명확히 하려고 저는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백두산을 예로 들었습니다.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입니다.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가 생각납니다만, 교과서의 맨 뒷장을 보면 ‘우리의 맹세’가 있는데, 그 가운데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곧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이지요. 어쨌든 어린 저에게 백두산은 처음부터 영산이자 영봉이었습니다. 제가 백두산에 오른 것은 나이 39인 199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백두산 정상의 천지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같이 간 동료 교수 가운데는 그 진한 감동을 한시로 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곳에 강림하셨으니 여기서 우리 민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 기상을 이어받아 만주 고토를 수복하자.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뒤지면 전혀 딴판입니다. 1778년, 조선왕조 정조 연간에 서명응이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고급관료가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그는 이곳은 중국 땅도 아니고 조선 땅도 아닌 아득한 변방으로서 천 년에 한두 사람이 올까 말까 한 곳인데, 마침 내가 올라와 보니 이 큰 연못의 이름이 없구나, 하늘이 내게 이름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일이란 삼라만상이 태극에서 발원하였으니 삼라만상은 원래 태극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명응은 백두산 꼭대기의 뻥 뚫린 화산구와 그에 담긴 큰 연못을 보고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연상하여 그런 뜻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과연 당대의 성리학자다운 발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오늘날 백두산 천지에 올라 여기가 단군 할아버지가 강림 한 곳이라고 흥분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서명응 이외에 18~19세기에 걸쳐 서너 사람이 백두산에 올라 글을 남겼는데, 자세한 것은 제 논문을 직접 참조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백두산을 천하 으뜸인 중국 곤륜산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백두산 위에서 조선 땅을 내려다보며 ‘기자(箕子)의 나라’가 조그마하게 펼쳐 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백두산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역사관을 대변하는 산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문명이 중국 고대의 성인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 남으로 내려와 마한으로 흡수되었고 그 마한이 신라로 흡수되었으니 조선 역사의 정통이 기자조선에서 마한으로, 신라로, 고려로, 그리고 조선왕조로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조선왕조의 역사학은 이러한 기자정통설을 신봉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단군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홀히 여겨 뒤편으로 제쳐 놓았지요. 18세기가 되면 단군의 고조선이 조선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만, 그래도 문명의 정통은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는 기존의 역사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앞서 본 대로 백두산을 두고 곤륜산의 적장자라 하거나 조선왕조를 ‘기자의 나라’라고 했던 것도 다 그러한 역사관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시대의 역사관이 중국 중심이었다면,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관련하여서 한 가지 예를 더 들지요. 15세기 초 세종 연간의 일이었습니다. 기자정통설이 막 성립하던 시기였지요. 당시의 양반 학자들이 왜 기자정통설을 도입했던가, 그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는 인구의 3~4할이 노비라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양반들은 그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지배해도 좋을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그러자 기자 성인이 캄캄한 야만의 동쪽으로 오셔서 8조금법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 도둑질한 사람을 노비로 삼는 법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노비란 원래 성인의 가르침을 어긴 야만인이고 우리 양반은 성인의 가르침을 깨우친 문명인이다, 그래서 양반이 노비를 지배하는 것은 세상의 풍속을 바로 잡도록 한 성인의 뜻이었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개발된 것이지요. 기자정통설이 출현한 현실적 이유는 이와 같습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신분의 인간들이 우리의 하나의 혈연으로서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나누어 가졌을까요. 저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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