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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해방전후사의 인식》 비판

[1] 빗나간 역사의식  [1]-3 《해방전후사의 인식》비판
이 책은 그러한 탈민족과 문명사의 관점에서 지난 20세기의 한국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것입니다. 무모하다고나 할까요,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서술의 대상은 20세기 전체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패망 이후 식민지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성립한 초창기인 1950년대까지입니다. 흔히들 그 시대를 해방전후사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그 해방전후사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지배 학설이었던 민족주의 역사학을 논리적으로 또 실증적으로 치열하게 비판하면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비판의 표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1989, 이하 《인식》으로 약칭)이란 여섯 권의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인식》은 해방전후사를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정판입니다. 이 책은 1980~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읽지 않은 대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여서 여섯 권 합하여 100만 권 가까이나 팔려 나갔다고 하는군요. 재야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도 이 책을 탐독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현 집권세력의 요처에 포진한 이른바 386세대라는 젊은 정치가들의 현대사 인식은 이 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현 정부가 20세기 한국사 전체를 대상으로, 심지어는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까지를 대상으로 해서, 무려 16개에 달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른바 ‘과거사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각 권에는 총론이 있습니다. 총론은 책의 성격과 내용을 대변합니다. 그 총론을 중심으로 《인식》 각 권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제1권의 총론은 언론인 출신의 송건호 씨가 썼는데, 주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이 거칠고 감정적인 데가 많지요.

예컨대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 후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은 신생정부임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참신한 기풍을 볼 수 없어 마치 노쇠국과 같았다” 등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비판을 넘어 《인식》이 나름의 논리체계를 세우기 시작하는 것은 제2권부터입니다. 제2권의 총론은 강만길 교수가 썼는데, 그의 유명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거기서 펼쳐집니다. 요컨대 식민지기에는 민족해방이 지상과제였듯이 해방 후의 분단시대에는 민족통일이 지상과제라는 겁니다. 민족통일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완전한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성립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에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남한과 북한의 정치는 민족정치이어야 하고, 경제도 민족경제이어야 하고, 문화도 민족문화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모든 것을 민족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 바로 60년 전 김구 선생이 38선에 섰던 것처럼 우리도 휴전선에 선 중간자의 입장이 되어 남과 북이 갈라지고 전쟁을 치르고 분단을 고착시켜 간 역사적 과정을 비판적으로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강 교수가 이야기하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입니다.

이렇게 제2권의 총론이 역사인식이라면 제3권의 총론에서는 사회경제의 분석과 그에 기초한 혁명이론이 제시됩니다. 제3권의 총론자는 박현채 선생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습니다만, 박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백아산에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박 선생에 의하면 식민지기와 미군정기는 식민지반봉건사회(植民地半封建社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크게 보면 자본주의사회이지만, 아직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봉건적 부문이 강하게 남아 있어 사회경제적 변혁이 반(反)제국주의와 반(反)봉건적 토지개혁을 주요 과제로 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좀 더 풀이하면 아직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미약하여 공산당이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객관적 여건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민주주의적인 토지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농민의 지지를 확보하여 정권을 확실히 장악한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가자는 주장이지요.

아시아의 정치사에서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을 개발하고 실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이지요. 그는 위와 같은 2단계 혁명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 불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마오의 이 같은 혁명이론을 수용하고 실천했습니다. 박현채 선생도 그러한 사상을 계승 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위와 같은 혁명이론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그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중진 단계로 발전한 1980년대 중반부터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다시 마오의 혁명이론으로 해방전후사를 재해석하고자 했던 것이 제3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제4권의 총론은 최장집과 정해구 두 교수가 함께 쓴 것인데 《인식》 여섯 권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논문입니다. 두 교수는 앞의 세 권까지의 도덕심판과 역사인식과 혁명이론을 전제한 위에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해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해방, 분단, 건국, 전쟁에 이르는 전 역사 과정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야말로 스케일이 큰 논문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북한 정권의 성격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은 혁명적인 소련국의 지원하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자와 혁명적인 민중이 연합한 정권으로서 미제와 반민족·반혁명 세력의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킬 ‘민주기지’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그러한 성격 차이 때문에 거의 불가피했던 내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남한의 해방과 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대한민국 내부에서, 그것도 제도권에 속한 대학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된 아슬아슬한 대목이 바로 제4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제5권의 총론은 김남식 씨가 썼습니다. 이 분의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어쨌든 여기서는 일층 대담무쌍하게 북한의 역사적 정통성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북한을 두고 김남식은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혁명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북한의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김남식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6권의 총론은 박명림 교수가 썼는데, 제4권의 총론과 대동소이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인식》은 마오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비판한 다음, 북한의 주체사상에 기대어 민족통일을 전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가. 과연 그렇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국제체제가 해체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중국도 사실상 자본주의체제로 바뀐 가운데 고도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세계사의 현실이 엄연히 그러할진대 지금도 신민주주의혁명론이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추종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새삼스레 《인식》을 비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요. 비판보다는 오히려 《인식》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좀 더 우호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인식》을 비판할 때마다 그런 반비평이나 불평을 자주 듣습니다. 예컨대 《인식》의 제1권이 출간된 1979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서슬도 시퍼렇게 사람들의 정치적 권리를 억압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 시절에 나온 《인식》은 갖은 정치적 박해를 무릅쓰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겁니다. 사실 그 점을 평가함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충 얼버무릴 일은 아니지요. 제가 《인식》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제시된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비판과 그 바탕을 이루는 민족주의 역사의식만큼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힘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술체계로까지 공식화하여 다음 세대의 역사의식까지 지배하는 권위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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