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8] 일본인의 속마음 p441

[ 1. 1963년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시이나 발언 ]
숙부인 고토 신페이(대만 경영 초기 총독부의 민정장관으로 발전전략을 수립한 경제 이론가)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 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동화와 정치", 동양정치경제연구소, 1963, 58~59쪽)

그로부터 2년 뒤에 일본국 외무장관이 된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도착성명에서 "양국간의 오랜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음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깊이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반성'이란 표현이 있는데, 일본어의 뉘앙스에서 보면 반성은 한국어의 그것과는 달리 일종의 '다시 깊이 생각해 본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후회한다는 뉘앙스도 약간 섞여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사죄한다거나 일본이 잘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외무장관으로서 역사적인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연일 반대 시위와 폭동으로 들끓고 있는 한국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시이나가 말한 것처럼, 19세기말 서구 제국주의가 서로 경쟁하듯 세계 각지를 침략해 주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해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일본만이 신속하게 산업혁명을 일으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한 유일한 나라였다. 따라서 일본의 전쟁은 크게 보아 일종의 정당방위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청일전쟁을 통해 노쇠한 청나라를 제압하여 조선과 대만을 독립시키고 러일전쟁을 통하여 또다시 조선과 만주를 독립시킨 것은 충분히 자랑할 만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일본인들도 그 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당시 일본이 어느 정도 서구에 대항하여 아시아민중을 해방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 2. 1965년 다카쓰기 발언]
일본의 조선통치 36년 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 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에 속한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 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아카하타, 1965년 1월 21일자)

이 발언 역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있던 민감한 시점에 터져 나와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본을 원수로 여기면서 절대로 다시 국교를 맺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여론을 이끌고 있었으며,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일본에게 엄청난 식민통치 배상금을 요구하는 무리한 숫자가 튀어나오고 있던 시기였다. 사실, 일본이 무리한 전쟁으로 미국에 점령당하는 사태가 없었다면 한반도와 대만은 아직도 일본과 같은 국가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면 일본, 한국, 대만 모두를 위해서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폭격으로 일본 열도가 잿더미로 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구 2억의 일본제국은 날로 부강해져 미국에 맞먹는 국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만주국까지 합친다면 인구 3억에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말 그대로 대동아연방체로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 3. 1986년 일본국 문부상 후지오 마사유키 발언]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 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이라는 것은 웬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 뿌리를 자르려고 했기에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 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 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방언대신 크게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

1986년 9월 6일자 일본의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4일 후 발매가 시작되는 <문예춘추> 10월호의 기사를 인용해 그의 발언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 발언에 대해서는 일본의 각 신문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많이 실려 토론에 올려졌다. 같은 날인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 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사퇴를 거부하다가 8일 나카소네 수상에 의해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3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가와마다 의원은 "조약법에 관한 빈 조약에는 협박이나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합조약은 본래부터 무효였던 것이 아닌가. 수상은 그 점을 인식해서 후지오씨를 파면했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나카소네 수상은 "국교회복 당시, 한국과 일본이 협의하여 병합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사실이 양쪽이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상당히 위압적인 배경을 가지고 체결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후지오 발언은 온당함을 상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라고 답변하였다 .(아사히신문 10월 4일자)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별달리 문제시될 것도 없는 상식선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현직각료를, 그것도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 즉각 파면 조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조치에 대해서는 당시 자민당의 소장그룹인 국가기본문제동지회 (좌장 가메이 의원)가 한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면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등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다시 철회되지 않았다. 후지오 발언 가운데 합병에 한국 측의 책임이 있다는 부분은 옳은 지적이며, 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합병은 일진회 등 한국측 혁명세력에 의해 스스로 강력히 추진되었지만 일본측에서는 거부하던 중, 조선인 테러리스트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후지오는 나카소네에 의해 파면당한 직후에도 거듭 같은 내용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문예춘추 다음 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 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1월호)

10월호에 실린 글로 인해 다음날 바로 문부장관 직에서 파면 당한 후지오 마사유키는 물러서지 않고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다시 <문예춘추>를 통해 계속 털어놓았다. 또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한일합병에는 한국 측에도 책임이 있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일본은 한국에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런데, 후지오의 발언 가운데 일제가 한국을 선의로 통치했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되는 내용이었지만, 왜 그가 한일합병이 ‘나쁜 일’ 이었다는 전제로 양비론을 전개했는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 대부분에게 합병과 총독부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며 대체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록 간헐적으로 국내에서 저항운동이 발생하기도 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이들이 조선 사회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대체로 당시 조선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규정하고 만족스런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합병이 일본의 입장에서 그리 큰 손해를 입는 일이 아니었다면, 한일합병은 양국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요즘 표현을 빌자면 윈윈 합병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주장이 일본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공격일변도였기 때문에 일본측에서 다소 과감하게 발언하는 인사들조차 차마 입에 담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4. 1995년 일본국 전 외무장관 와타나베 발언 ]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략)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마이니치신문 1995년 6월 4일자)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부흥을 위해 협력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합방은 국제적으로도 합법적이라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식민지배'라고 하지만, 법률적으로 일본 국회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95년 6월6일자)

이것은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이 6월 3일에 열린 자민당 토치기현 연합회의 대회인사와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다. 이후 언제나처럼 한국 측에서는 항의를 했고 와타나베는 일부 표현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5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시오카 의원은 총리에게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조약 문제를 다룬 국회이래, 조선병합조약을 한일이 자유의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입장과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습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민당 정부 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어 온 이 입장과 인식을 단호히 전환해, 조선병합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 지배 하에 둔 것을 인정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으며 이에 대해 무라야마 수상은 "한국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고 답변함으로써 와타나베의 발언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 5. 1995년 일본국 총무청장관 에토 다카미 발언 ]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대한제국의 수상 이완용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입니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한 것은 나빴습니다. 또한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한 뒤 1주일 후에 조약의 비준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통치하면서 일본은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먼저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을 정비했고, 산에 나무도 심었습니다. 하지만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이며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입니다.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이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인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조선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의식은 결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을 내지(일본)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이씨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곳곳에서 날치기한 보물들로 채워져 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장훈이라는 유명한 야구선수도 있고 롯데그룹의 사장도 조선인입니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면 모두 한국사람들 뿐입니다. 또한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 경영하고 있는데, 일본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이처럼 일본의 모든 계층에서 조선인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한일병합이 강제적이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틀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간 문춘 1995년 11월 23일호)

이것은 10월 11일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원래 오프 더 레코드로 발언한 것인데, 잡지 <선택>과 한국의 <동아일보> 에 보도되어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에토 장관은 한국으로부터 사임요구를 받았지만, 무라야마 수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후 야당으로부터 사임결의안이 제출되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 영수의 권고로 에토는 10월 13일에 사임했다. 이후 에토는 1996년 1월 4일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앞서의 발언에 대해 "왜 반성해야만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는 아니다." 라는 등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사실 에토 발언에서 언급된 일본의 조선통치의 성과들은 그 성격과 본질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당시 조선은 일반적인 식민지라고 할 수는 없었으며, 만약 그런 것이 식민통치라면 전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은 앞을 다투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겠다고 나설 것이다. 1980년대 이래 동아시아의 대만과 한국 등이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이들 지역에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밝히는 저작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당시 일진회를 비롯한 조선의 혁명세력들에게 강력한 합병의 요구를 받았지만, 이토 통감은 줄기차게 이를 거절해왔는데 1909년 이토가 암살됨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한국 병합론이 우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합 이후에도 일본은 대체로 뒤떨어진 조선반도를 내지인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그 결과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도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유례없는 '식민통치'를 극찬하는 저작들이 서양의 학자들에 의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볼 때 에토 발언 등으로 상징되는 일본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입장은 한국정부의 입장보다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 6. 1995년 오자와 발언]
비슷한 시기인 1995년 12월에 오자와 신진당 간사장은 "나는 한국에 대해 '철저한 반일교육을 시켜놓고 무슨 장래 우호냐. 끝까지 증오를 잊지 못하게 하면,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라고 항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서로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아사히신문 12월 9일자)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외무부는 "한국 교육이 정치적 의도에 따른 반일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

이 문제는 역사상 최초로 일본측에서 한일관계의 본질을 지적한 것으로서 일본 정부가 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는지 매우 의문이 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반일 교육은 과거 반공교육에 버금갈 정도로 철저히 이루어져 한국의 학교 현장이나 또한 일반 사회에서도 한일합병의 정당성이나 일본통치의 성과들을 언급하는 일은 거의 금기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는 설령 한국 정부의 반일 교육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인데, 대부분 허무맹랑하고 왜곡된 자료와 사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한국정부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이라면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보다 훨씬 더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자기중심적이고 솔직한 스타일이지만 일본인은 대체로 남의 기분을 먼저 배려하며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것 같으면 자기 입장이 옳다 하더라도 접어두고 사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스타일이 양국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일관계의 모습이다. 그 결과 훨씬 더 잘못한 쪽에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는 이상한 한일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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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