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6] 하와이와 푸에르토리코의 경우 p101

하와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건너온 민족이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은 열대 태평양 지역을 크게 3개의 지역으로 구분해 적도 북쪽은 마이크로네시아 (작은 섬들), 적도 서남쪽은 멜라네시아 (검은 사람들이 있는 섬들), 그리고 동쪽을 폴리네시아 (많은 섬들)로 불렀다. 이후 하와이 군도에서는 오랫동안 부족간의 전쟁이 계속되어 평화로운 시절이 드물었으나,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가 사상 처음으로 하와이를 통일하고 통일왕국을 이루게 된다.

서구 세계에 하와이가 알려진 것은 1778년 제임스쿡 선장이 이곳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하와이는 미국과 극동을 잇는 태평양의 교통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고래를 사냥하기 위해 출항한 여러 나라의 포경선들이 정박하는 항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 후 하와이에는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의 발길이 잦아지다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서구문물과 사상이 흘러들어 오면서 1840년 최초의 헌법이 만들어져 하와이는 근대적인 입헌군주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영국, 프랑스 및 미국인들이 하와이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독립이 유지되었으며, 1887년에는 미국과 상호 통상조약을 체결, 미국에 진주만의 해군기지 사용권을 허락하였다. 독립국가라고는 하나 하와이는 사실상 이때부터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등 열대작물의 재배에 성공하여 설탕산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노동력이 부족했던 하와이는 이때부터 아시아인을 포함한 대규모의 외국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점차 하와이는 순조로운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외국 자본과 인력의 진출도 점차 활발해져갔다.

그러나 하와이는 1890년에 들어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보호주의가 확산되던 시대였다. 자본주의 열강들은 경쟁력이 부족한 산업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해 자국 시장을 닫아걸고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국 정부는 1890년 아무런 예고 없이 관세법을 개정, 설탕 등 수입 농산물에 대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미국에 대한 수출에만 의존하고 있던 하와이의 설탕 산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고 경제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자연히 하와이에 이해관계를 가진 외국인과 자본가들은 정부에 미국과의 합병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상태에서 1891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하와이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여왕은 시대의 흐름을 무시한 채 권력에 집착하였다. 여왕은 친위 쿠데타를 감행, 이전보다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내용으로 헌법을 수정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1893년에 혁명이 일어나 여왕은 축출되고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그 결과 1894년 하와이는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미국인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합병운동이 힘을 얻어갔지만, 미국은 하와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긴 탄원과 합병운동이 계속되어 1897년 하와이와 미국연방은 합병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하와이는 1898년부터 미국의 영토가 되었고 1900년에는 준주(準州, semi-state, 주에 버금가는 지역)로 승격되었다. 미국령이 된 뒤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의 재배가 한층 촉진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진주만 해군기지의 규모도 한층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주 승격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의회에 끊임없이 탄원한 결과, 1959년 하와이는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이 같은 하와이의 근대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외부 세계와 고립되어 있다가 개항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을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개방과 개혁을 거부한 왕족을 축출하고 이웃한 유력한 블록에 합병되어 자본주의 발전에 성공했다는 점 등에서 당시 하와이와 조선은 공통점이 많은 국가였다. 단지 조선은 하와이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큰 국가였고 주변에 청, 일본, 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에 둘러싸여 하와이에 비해 근대화 과정이 더 치열하고 복잡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 차이로 인해 오늘날 하와이는 미국연방의 50번째 국가라는 지위를 획득해 풍요를 누리고 있는 반면,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려져 분단 상태에서 힘겹게 운명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한 세기 이전 하와이와 조선에 살고 있던 주민의 생활수준은 그리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없으나 오늘에 와서 비교해 보면 남한은 하와이에 비해 약 30년, 북한은 60년 이상의 격차를 보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오늘날 하와이에서는 미국에서 분리하자는 독립운동도 없고, 과거 미국과의 합병을 거부했던 릴리 여왕을 추모하는 사람들도 없다. 그 까닭은 오늘날 하와이의 시민들이 수구파들의 음모를 저지하고 혁명을 통해 미국과 합병을 추진했던 세력의 노선이 옳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혁명과 합병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에 오늘날 부유하고 번창하는 하와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과거 일본과의 합병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고 민족의 살길을 개척하려 했던 선각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면서, 오히려 민비나 고종을 비롯한 반동 수구파들을 애국자로 추모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제대로 된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역사를 냉정한 눈으로 반성할 수 있을 때에만 역사는 교훈을 주고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줄 것이다. 이번엔 하와이와 비슷하지만 아직까지 반미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경우를 살펴보자.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비교적 큰 섬으로서, 면적은 남한의 약 10분의 1 정도이고 400만의 주민이 살고 있는 미국의 자치령이다. 다른 중남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고 종교는 가톨릭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다. 이곳의 주민의 80% 가량은 스페인계 백인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려온 흑인과 인디언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푸에르토리코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9세기 경 원주민인 아라와크 인디언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이주해오면서부터이다. 그 뒤 평화롭던 이 섬에 1493년 11월 콜럼버스가 상륙하여 이곳을 스페인 국왕의 영토라고 선언하고 섬의 이름을 '산 후안'으로 명명하였다. 1508년부터 푸에르토리코 항이 개발되어 이 섬의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섬의 이름은 푸에르토리코, 항구의 이름은 산 후안으로 바뀌어버렸다고 한다. 1511년에는 아라와크 인디언들은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이 섬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스페인 사람들은 금광을 개발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광은 오래지 않아 바닥나버렸다. 이후 스페인 지배자들은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이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가 되자 중남미 지역에는 독립의 열풍이 불어 스페인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남미 대륙을 떠나 푸에르토리코로 도망쳐 왔고, 푸에르토리코는 오랜 동안 중남미 대륙에서 유일한 스페인의 군사 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자 푸에르토리코에서도 독립운동이 거세어져 마침내 1897년 스페인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무렵,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 등 식민지의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함으로써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은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1898년 8월 섬을 점령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후 미국은 총독을 파견하여 푸에르토리코를 통치하였으나 1952년부터는 국방, 외교, 통화 정책을 제외한 모든 통치권을 섬 주민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 이 섬은 괌, 사이판 등과 비슷한 미국 연방의 자치령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67년이 되자 미국 연방 의회에서는 주민들이 원할 경우 푸에르토리코를 국가(state)로 승격하여 연방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이에 따라 1967년 7월 실시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연방 편입은 부결되고 푸에르토리코는 계속 미국의 자치령으로 남게 되었다. 의회는 양원제이고, 4년마다 실시되는 직접선거로 구성된다. 주민들은 미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본토로 이주하지 않으면 대통령 선거권이 없다. 푸에르토리코와 괌, 사이판 등 미국의 자치령에서는 연방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지만 이들은 표결권이 없는 옵저버의 지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현재에는 집권당을 중심으로 하여 푸에르토리코를 미국 연방에 편입해야 한다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견은 정확히 반반으로 갈라져 있다. 또한 이 기회에 아예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민족해방군 조직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지고 반미 투쟁을 벌이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의 산업은 전통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농업뿐이었으나 1950년대에 들어 화학공업, 식료품 및 가구 제조업 등을 발전시켜 공업국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였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과 비슷한 1만 달러 수준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나 미국 본토의 3만 달러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

푸에르토리코는 100년 전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이는 오랜 세월 청나라의 속국이다가 청일전쟁으로 인해 자주 독립국이 되었고 이후 근대화를 위해 일본과 합병한 우리나라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역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에서 푸에르토리코는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한국과 비슷하다. 그러나 스페인 통치의 전통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탓에 미국연방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있고 그것이 오늘날 하와이에 비해 생활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동아시아에서 과거 일본의 일부였던 대만과 한국만이 유일하게 선진 공업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의 통치가 없었다면 한국과 대만은 다른 동아시아 지역처럼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와 하와이의 차이를 볼 때, 만약 종전 후 한반도가 일본과 분리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삶은 훨씬 더 윤택했을 것이라는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구호로서는 아무래도 ‘독립’이라는 것이 호소력을 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독립이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 푸에르토리코에서 독립을 추진하는 민족해방군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약소국가에게 독립이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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