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3]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대한청구권과 대일청구권) p400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한 1945년 8월 15일 당시 조선에는 6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에는 약 100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이후 한반도의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점령지역으로서 군사통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1945년 12월 6일의 미군정법령 제33호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 남한 내 모든 일본의 재산을 미군정청 소유로 귀속시켰으며, 일본인에 대해서는 재산을 몰수한 다음 모두 일본으로 추방하였다. 북한에서도 같은 조치가 시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나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30년이 넘게 힘들여 정착한 한반도에서 단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알거지가 되어 쫓겨났다.

일본은 패전국의 입장에서 이 같은 조치에 항의할 입장이 아니었으며, 1951년 일본의 독립을 결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미군정청과 소련 점령군에 의해 압수된 일본인의 재산은 이후 정부 수립과 함께 각각 남북한 정부에 이양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이 재산에 적산(적의 재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권력자들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적산불하)

패전 후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힘들여 축적한 재산을 강탈당하고 일본으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살해와 강도 행위에 대해 당시 일본은 국가 자체를 상실하고 미군의 통치를 받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고, 이후 1952년 다시 일본의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야 하나둘씩 자료를 수집해 실태파악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쉽게 말해 35년 간 결혼해 재산구분 없이 살던 부부가 헤어지게 된 상황과 비슷한 것으로서, 서로 주고받을 것을 공정하게 합의하고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아쉽게도 일본은 발언권을 봉쇄당한 처지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일본 측에 불리한 결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국교수립을 위한 한일회담이 열렸을 때 한국 측에서는 이 같은 일본의 입장을 배려하고 일본인 학살과 재산 강탈 등에 대해서는 사죄나 최소한 유감표명이라도 해야 했으며, 우리를 조선왕조의 학정에서 해방시키고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입해 문명 개화시켜 준 데 대해서 공식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해야만 했다.

그런 연후에 일본인들도 인정할 수 있는 잘못을 지적하고 또한 한국인들의 잘못도 인정하여 서로 신뢰와 공감에 도달할 수 있어야만 정상적인 협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과 성과를 무시한 채 오히려 조선이 피해자라고 일방적인 주장만 늘어놓고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는 한일관계가 부드럽게 풀려 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1949년 조선, 대만, 사할린 등 빼앗긴 영토의 재정처리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인 스즈키 동경대학 교수를 불러 진술을 들었는데, 스즈키 교수의 시각은 당시 일본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변할 만한 것으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공감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일본의 조선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노예적으로 착취하고 그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서는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뜻대로 안된 많은 실패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이상으로서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 초두의 세계정세 및 세계사조와 그 때까지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 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재정 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 보면 플러스이다. (*즉 조선에 투입한 돈이 조선으로부터 유출된 돈보다 많다는 의미)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시정(施政)은 결코 이른바 식민지에 대한 착취정치라고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근대화는 오로지 일본 측의 공헌에 의한다. 일본의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는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반출 상황, 즉 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들 지역에서 긴 세월에 걸쳐 평화적인 생업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국민은 전부 추방당했고, 일본 자산은 공유재산 뿐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평화적으로 축적된 사유재산까지 이미 사실상 박탈당했으며, 이 같은 가혹한 조치는 정말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이들 지역(조선, 대만, 사할린)은 모두 당시로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상 보통이라고 인정받고 있던 방식으로 취득되고, 세계 각국도 오랫동안 일본의 영토로 승인하고 있던 것으로, 일본으로서는 이들 지역을 포기하는 데 이의는 없지만, 과거 이들 지역의 취득 및 보유를 국제적 범죄로 보고, 징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들 지역의 분리와 관련된 제반 문제 해결의 지도원칙으로 삼으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일이다. (1949년 일본 외무성 '할양지에 관한 경제적, 재정적 사항의 처리에 관한 진술' 스즈키 동경대학 교수)

스즈키 교수의 발언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으며 패전국인 일본의 억울한 입장을 조목조목 잘 지적하고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미개한 지역을 넘겨받아 오랜 세월동안 공을 들여 교육하고 사회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돈을 투자해 사회간접자본을 구축해 두었는데, 이에 대해 감사의 인사는 못 받을망정 오히려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즈키의 발언은 사실상 패전 이후 최초로 일본 정부의 입장이 대내외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이를 스즈키 망언이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이후 일본이 독립하고 한국전쟁이 끝나자 한국과 일본은 본격적으로 정부간의 국교수립 협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일청구권과 대한청구권에 대해 토의를 하던 중 일본측 대표의 발언을 문제 삼아 한국 대표단이 회의장에서 퇴장하고 이후 이를 망언으로 규정, 공식적으로 취소를 요구하는 등 트집을 잡아 이후 한일회담은 4년9개월 동안의 단절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음은 최초의 한일회담이 결렬된 회의의 발언들을 기록한 것이다.

1953년 10월 15일 일본외무성 회의실.
<제2회 재산 및 청구권 분과위원회>

구보다 간이치로 일본측 대표: 일본측으로서는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보하여 접근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갖고 있다. 당신들에게는 청구권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은 곤란하다.
홍진기 한국측 대표: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일본이 말하고 있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법률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한국이 말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따르는 청산문제이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른 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측이 그러한 말을 한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구보타: 일본측의 청구권도 법률문제이다.

홍진기: 한국의 국회에서는 수원의 학살사건, 한일합병조약 직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동안 치안유지법으로 투옥, 사망한 점 등에 대한 청구권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 쌀을 세계시장보다 부당하게 싼값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가격의 반환을 요구하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이 이런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순 법률적인 청구권만을 내고, 정치적 색채가 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한국 측으로서도 36년간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구보타: 한국 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청구권을 낸다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이 당시 많은 해는 2천만 엔도 내놓았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한국 측의 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후 한국 측 위원들 흥분해 각자 발언함)

홍진기: 당신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인가. 일본인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보타: 좋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견으로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장경근: 천만 엔이나 2천만 엔의 보조는 한국인을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돈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만들지 않았는가.

유태하: 구보다씨, 그런 말을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옛날 일은 흘려보내고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말을 한다면 다르지만.
구보타: 서로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 문제로 말을 진행하고 싶다.

홍진기: 법률적이라고 해도,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 한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타: 자세한 것을 말하려면 한이 없다. 다만 36년간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기구 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생각하기 바란다.

홍진기: 무엇 때문에 카이로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구보타: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 중의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장경근 : 일본이 재산을 불린 것은 투자나 운영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인이 토지를 산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총독부의 정책으로 산 것이지 기회균등은 아니었다.

구보타: 일본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선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홍진기 : 구보타씨는 서로 도와주는 정신이라든가 양보하여 접근하려고 한다지만, 우리는 양보할 여지가 없다.
('외무성의 회의의사록에 남겨진 구보타와 한국측 대표간의 응수', 아사히신문 1953년 10월 22일자)

그 외에도 구보타 대표는 1945년 미군이 재한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60만 재한 일본인을 일본으로 내쫓은 것과 한국을 일본과 아무런 상의 없이 대일강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전에 독립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일본의 조선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결과를 가져왔다는 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는 전반적으로 1949년 스즈키 교수의 연구와 진술에 바탕을 둔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보타 발언에 대해 일본국 오카자키 외무장관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말했을 뿐이다."라고 옹호했다. 한국의 변영태 외무장관은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그들 일본인이 한국에 대한 침략근성을 아직까지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함으로써 제3차 한일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제4차 한일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1957년 일본측은 구보타 발언을 '철회'했지만, '잘못'이라고는 인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구보타의 발언은 일본인 주류의 시각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 대부분이 이 같은 스즈키와 구보타의 발언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한, 한일관계는 계속해서 꼬여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본 측의 시각이 보다 공정하고 논리적인 것이며, 이에 반대하는 한국 측 주류의 시각은 일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이라는 것은 한쪽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중간에서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쪽이 올바른 쪽으로 입장을 수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쪽이 90% 정도 일본 측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는 한 한일 공생관계는 그야말로 연목구어에 불과한 꿈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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