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읽기 칼럼] 메이지유신이란 무엇인가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읽기 칼럼] 메이지유신이란 무엇인가
[ 구미 열강의 식민지화를 피하다 ]
1800년에 지구의 육지 약 35%를 지배하고 있던 구미 열강은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 지배권(支配圈)이 약84%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일 메이지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구미 열강의 지배하에 편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미 열강에 의한 영토확대정책은 제국주의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일본이 독립을 유지해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설 때까지의 역사는, 이러한 제국주의의 시대에 일어난 것이었다.

[ 중국·조선과 일본의 갈림길 ]
이와 같은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청조)은 구미 열강의 무력에 의한 위협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었다. 중국에 조공하고 있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아편전쟁에 충격을 받은 것은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이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자국의 문명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중화사상이 있어, 영국 등은 세계의 끝에 있는 야만스런 민족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도 있어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움직임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결과 청조는 차츰 열강에게 침식당해 영토 보존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에도 시대에 걸쳐 무가(武家) 사회라는 면이 있어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특히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라는 두 유력한 번(藩)이 막부 말에 서구 나라들과 전쟁을 한 결과, 구미와 일본의 힘의 차이를 통절히 인식하고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 무사의 희생에 의한 개혁 ]
메이지유신에 의해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사민평등의 사회가 실현되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사의 특권은 폐지되고 무사 신분 그 자체가 소멸하였다.

메이지유신은 유럽의 혁명, 특히 프랑스혁명처럼 시민이 폭력으로 귀족의 권력을 타도한 혁명이 아니었다. 무사신분을 폐지한 것은 다름아닌 무사신분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었던 메이지신정부(明治新政府)였다.

이것에 관해 어느 프랑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본의 특권 계급이었던 무사는 다른 계급에 의해 타파된 것이 아닙니다. 외국의 압력 앞에서 스스로 혁명을 추진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희생을 치룬 것입니다. 혁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어느 계급이 다른 계급을 쓰러뜨린다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이 아닙니다. 무사들이 바란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힘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모리스 뱅거[Maurice Bange]『스스로를 죽인 일본사』에서 일부 요약)

메이지유신은 오야케(公)을 위해 일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던 무사들에 의해 실현된 개혁이었다.

[ 메이지유신과 교육입국(敎育立國) ]
메이지유신의 개혁에 있어서 새로운 나라만들기의 근본으로 여져진 것은 교육이었다. 교육을 중시하는 사상은 에도시대로부터 계승된 것이었다. 그것은 막부 편에 섰던 번(藩)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막부 편에 붙어 보신전쟁에서 패한 나가오카번(니가타현)에서는 전란과 홍수의 피해가 겹쳐 심각한 식료부족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괴로움을 차마 못본 친척 관계에 있는 번으로부터 「미백표(米百俵), 역주: 쌀 100석」가 위문품으로 보내어져 왔다. 그러나 번정(藩政)의 책임자였던 고바야시 도라사부로(小林虎三郞)는 한 톨의 쌀도 번사에게 배분하지 않고, 장래의 인재 육성을 위해 번의 학교를 개교하는 자금으로 돌려 버렸다. 장래에 대비해서 자원(資源)을 인재 만들기에 중점적으로 배분하는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근원이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무사의 자제를 위한 번교(藩校)와 일반 서민을 위한 데라코야(寺子屋)의 두 교육 기관이 있었다. 메이지정부에서는 일찍부터 평등하고 공평한 교육 기회를 국민에게 보장하는 학교제도를 만들었다. 학제발포(學制發布)에 의해 정부는 2만 6천 교의 소학교 설치를 목표로 하였다. 그 대부분은 데라코야나 번교를 전용한 것이었다. 학교는 국민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무사의 아이들도 정인(町人)∙농민의 아이들과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여 경쟁하게 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평등하게 미래가 약속되는 이러한 구조는 그때까지의 신분의식을 파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명치유신의 교육입국 방침은 일본 근대화의 토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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