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10] 조선의 흡수합병 p377

>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지 못한 것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테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이 전권위원은 회동 협의한 뒤 아래와 같은 내용의 조약에 협정하였다.

1.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2.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함을 승인한다.

3.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태황제폐하(고종), 황태자폐하와 그 후비 및 후처(부인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그리고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그 부인들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을 행함이 적정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작(귀족의 지위)을 수여하고 또 은금(하사금)을 준다.

6. 일본국 정부는 위와 같은 병합의 결과로서 모든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일본국에 여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기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와 충실로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관리로 등용한다.

8.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그 증거로 두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하는 것이다.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테라우치 마사타케

1905년의 보호조약으로 성립한 통감정치 이후 대한제국은 실질적인 통치권을 모두 일본에 빼앗겨 사실상 국가로서의 존재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합병에 관한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신속히 합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본 정부안에서 일어났으나 이토는 합병에 반대하면서 보호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토는 한일합병으로 야기될 수 있는 국제여론의 비난과 그에 따른 일본의 고립을 우려하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는 한일합병을 최소한 수십년 정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온 듯하다.

합병 방침이 결정되자 일본은 그 정비작업으로 1910년 6월 30일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인수한 뒤, 7월 12일에는 '병합 후의 한국 통치방침'을 마련해 이토의 뒤를 이어 새로 조선통감이 된 테라우치가 이를 갖고 부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일병합 공작을 전개하였다. 8월 16일 테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대신 조중응을 통감관저에서 만나 병합조약의 구체안을 논의하고, 8월 18일 대한제국의 내각회의는 이 안건을 승인하였다. 8월 22일 순종 황제가 참석한 어전회의는 최종적으로 한일합병안을 승인, 이완용과 테라우치가 도장을 찍어 조인하였다. 이로써 역사적인 한일합병이 성립되었다.

합병조약의 조인 사실은 1주일 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국내외에 공포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조선은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조약의 내용을 보면 주로 왕족과 그 처첩들을 합병 이후에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제한적이나마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일본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약 100만 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이주,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한일 합병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며 조선왕조는 사실상 1905년에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조선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조선은 주로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에 대항할만한 국력을 갖추지 못한 일본은 만주와 조선반도의 이권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여러 차례 정치적인 협상을 벌여 비군사적인 분야에서 실질적인 이해증진을 도모하였는데, 그에 따라 이 시기 일제는 한국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받은 전쟁 배상금을 활용하여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광산 삼림 어업 시장개설 온천 등 갖가지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의 금 수출을 비롯해 주요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에 대해 영국과 일본은 영일 동맹을 체결,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이 같은 긴장 속에서 1903년 4월 러시아군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 국경을 넘어서 용암포를 강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이 때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선을 굳이 나눠 가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러시아의 분할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는데, 이는 불과 7년 전 일본이 먼저 제의한 분할을 러시아가 차갑게 거절했던 것과 비교할 때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1896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일본 전권대사로 참석한 야마가타는 러시아 측에 조선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완공을 앞두고 있던 러시아는 장차 조선을 통째로 점령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분할제의를 거절했다. 불과 7년 만에 러시아 측에서 수모를 감수하면서 38도선으로부터 한발 물러선 39도선을 먼저 제의한 것을 보면, 당시 일본제국의 국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커졌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분할 협상이 무위로 돌아가자 일본과 러시아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한 정세가 조성되었다. 1904년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결국 국교를 단절하였고 이틀 뒤 요동반도의 군사요충지인 여순에서 첫 번째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다음날 새벽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 서울로 입성하였고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한반도에 군대를 들여놓은 일본은 한국의 협력을 강요하였고 이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는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명의로 6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2.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한다.
3.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한다.
4.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며, 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
5.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군사보호국이 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의 이 의정서가 체결되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여기에 서명한 이지용과 참서관 구완희의 집이 폭탄세례를 받는 등 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후 러일전쟁이 점차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왕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왕실이 오랫동안 숙달되어 있던 '이긴 편이 우리 편'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러시아가 전쟁에 이겼을 경우에는 이들이 어떤 자세로 나왔을 것인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엄정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서명한 것이므로 한일의정서는 무효다'라고 선언한 뒤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모든 이권을 취소하고 일본과 조선 사이에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했을 것이다. 국가의 명운은 안중에도 없었던 조선 왕실은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곡예를 수십 년 동안 계속해왔던 것이니 이미 통치세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1905년 9월 5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부칙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포츠머스 회담).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이 조약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점령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 이외에는 일본에게 아무런 전승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조선반도에서 보상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대두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했던 한일의정서를 폐기하고 실질적인 지배권을 획득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905년 11월 9일 최대한 모양 좋게 조선반도를 접수하라는 사명을 띠고 파견된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하야시 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앞세우고 보호조약 체결에 착수하였다. 먼저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외교권 박탈 등 을사보호조약의 내용이 담긴 신협약안을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전달하였다. 그 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여 설득한 결과 고종의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어 11월 16일에는 정동의 손탁 호텔에서 8명의 대신을 모아놓고 협약안의 가결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인 11월 17일 고종과 8명의 대신이 참석해 5시간 동안 계속된 어전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을 데리고 회의장에 들어가 무력시위를 펼치며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대신 가운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후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 뿐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렇게 어전회의에서 5대 3으로 가결된 신협약안은 고종의 결재를 거쳐 다음날인 11월 18일 대내외에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접수한다는 것과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치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1904년의 한일의정서와 1905년의 신협약에 따라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사외교권을 비롯한 모든 통치권을 접수함으로써 조선은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은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반일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 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주영공사 이한응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정치적인 이유로 자결한 것인지 다른 이유로 사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을사5적이라고 불리게 된 5대신에게는 개별적으로 암살시도가 자행되기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고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해산에 따른 내전이 있었다. 1909년 이등박문이 안중근에게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일진회에서는 한일합방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고 일본 내의 여론도 합병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당시 일진회가 합방성명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죽어 시체만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으며 계속해서 일본의 보호국으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합병을 통해 일본의 일부로 통합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의한 대한제국의 흡수합병에 순조롭게 추진되었고 1910년 8월에 이르러 역사적인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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