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9] 아, 일진회 p364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방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개혁세력 사이에서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같은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던 것이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조선의 모든 혁명단체가 연합하여 조선 왕조 및 수구 반동세력을 무너뜨리고 일본과 연대 아래 조선혁명의 과제인 문명개화를 이룩하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대의 근대적인 대중 정치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서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사이비 단체인 것처럼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한 예로, 어느 백과사전에서 일진회에 대한 항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일진회 : 1904년 일본이 고문 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

설립연도: 1904년
구분: 친일단체
소재지: 서울
설립목적: 친일적 민의의 필요
주요활동: 대한제국 탄핵 문제 제출

한국에서 만들어진 역사책이나 국사 교과서들은 일진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혹 언급한다 해도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해 만든 단체라는 식으로 간단히 기술한 채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일진회는 20세기 초 조선혁명을 위해 모든 혁명세력이 연합해 결성한 역사상 최대의 정치 조직이며 수십만 혁명가들의 결사체로서, 이들의 희생을 딛고 비로소 조선혁명은 완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니 일진회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한국 근대사의 큰 줄기를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진회의 원래 이름은 유신회였다. 1898년 고종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지도부와 조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발동되자 당시 모든 혁명세력은 지하로 잠적 할 수밖에 없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믿고 개화파를 죽이고 독재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동반도에서 부동항을 확보한 러시아가 조선에 흥미를 잃고 썰물 빠지듯 물러가자 자연히 조선 정계에서는 다시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특히 일/러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조선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자 조선에서 고종과 친러파 등 수구 세력의 힘이 약해지게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고종의 탄압을 피해 일본 등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던 개혁파들은 일본군을 따라 하나둘씩 귀국하여 유신회라는 이름으로 독립협회를 재건하였다. 유신회는 그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국가체계를 개조, 현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04년 8월 18일 창립된 유신회는 이틀 뒤인 8월 20일 일진회로 이름을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 단체는 다음과 같은 4개 강령을 제정하였다.

1. 왕실의 존중
2.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3. 시정의 개선
4. 군정 및 재정의 정리

일진회는 이후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솔선해 단발과 양복차림으로 외모를 바꿈으로써 회원들에게 개화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진보회> 라는 단체가 등장하여 전국 조직을 갖추며 무섭게 성장해 나갔다. 역시 일진회와 마찬가지로 시정개선(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이 단체의 회원들은 머리를 서양식으로 자른 뒤 검은 옷을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뜨였다.

진보회는 생겨나자마자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 1904년 말이 되자 그 회원이 38만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제국 정부는 처음에는 진보회의 정체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것이 동학당의 후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전 동학군과의 전쟁에서 일패도지, 수도 함락까지 각오해야만 했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힘을 빌어 간신히 동학군을 물리친 정부는 2세 교주 최시형을 죽이고 수년 동안 혹독한 토벌을 감행, 동학당의 씨를 말려왔다. (조선관군들은 사람들이 보는 길에서 산사람들의 눈을 뽑고 혀를 잘았다고 함, 이들의 비명 때문에 농민들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함)

그런데 그 동학당이 정부개혁과 국정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일어선 것이었다. 진보회의 정체를 파악한 대한제국 정부는 즉시 군대를 동원해 진보회를 탄압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도 진보회 토벌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수구세력의 본격적인 탄압에 직면한 진보회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민중조직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일진회는 진보회에 대해 통합을 제의했다. 이렇게 해서 구 독립협회의 개화파와 동학교도들은 하나로 뭉쳐 진보 세력의 통일전선을 수립하였으며, 이들은 새로운 통합조직의 이름을 일진회로 하였다.

개항 이래 줄곧 조선의 유신을 후원해왔던 일본은 조선 혁명세력의 거대조직이 출범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조선에서 동지를 얻게 되었다. 일본은 일진회를 토벌해달라는 고종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이로써 1870년대 이래 3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조선 혁명운동은 비로소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지식인 혁명가와 민중조직, 그리고 일본 등 3대 혁명 세력이 처음으로 한데 뭉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조선 혁명운동은 정당성과 물리력을 모두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조선이 개항한 이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으로는 크게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 5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이것이 번번이 좌절 됨으로서 조선은 세계의 흐름에서 뒤쳐지게 된 것이다.

임오군란은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군인들이 일으킨 무장봉기였으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탓에 아무런 계획도 비전도 없었고 특히 지도부가 없었다. 이들은 민씨 척족 몇 명을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중심인물인 민비를 살해하는 데에는 실패함으로써 이후 청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잘 조직된 지식인 계층이 소수의 군대와 일본군의 지원을 업고 시도한 쿠데타였으나 기층 민중 조직의 지원을 받지 못한 데다 청군의 무력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 농민군은 강력한 기층 민중 조직과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지도부의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진해 개화당 등 지식인 그룹과 연대하지 못했으며 무조건 일본을 배척하는 잘못된 노선을 선택함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일/청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어 추진된 근대화 개혁이었으나, 일본이 3국 간섭으로 고립되자 고종과 민비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조선의 혁명가들은 1895년 민비를 죽이고 다시 고종을 인질로 잡아 갑오개혁의 정신을 이어가려 했으나 이 마저도 아관파천으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가 처한 절대절명의 과제는 시민혁명, 즉 낡은 절대군주제와 신분사회를 타파하고 법과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적인 사회구조를 세우는 일본식 유신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부르주아 계급이라 불릴만한 세력이 전혀 성장하지 못했고 시장경제와 화폐 시스템, 무역 등 경제발전의 정도도 매우 낮은 낙후된 미개 사회였다.

따라서 조선의 시민혁명은 자체 역량으로는 수행될 수 없었고, 조선의 문명개화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조선에 우호적인 외부세력의 후원이 있어야만 달성될 수 있는 과제였는데, 이 같은 외부의 마땅한 후원세력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개항 이래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했던 집단으로는 동학, 개화당, 일본 등 3개의 세력이 있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수구 세력은 왕실과 양반계급 및 청, 러시아 등이 있었다. 동학은 올바른 사상에 의해 지도된 민중세력이었고 개화당은 지배계급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각성된 애국 지식인 집단이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 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무역을 하고 일본 열도에 대한 ''공격적인 방어'' 지역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힘없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로서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책이었다.

이 3개의 혁명세력은 1개, 혹은 2개의 세력이 연합해 간헐적으로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3대 세력은 점차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4년에 와서야 동학의 후신인 진보회, 독립협회와 개화당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일진회, 그리고 새로이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 등 3대 세력이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해 손을 잡게 된 것이다.

통합 일진회로 인해 일본은 조선 내부에서 강력한 지원 세력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국제적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일진회는 일본과 연합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룩하려 했으므로 이들의 결합은 이상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가르침을 내걸고 생겨난 동학은 신분에 귀천이 없는 세상을 추구했으므로 조선의 계급사회로서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동학이 세를 펴기 시작하자 조선 왕조는 잔혹한 탄압을 펼쳐 교주인 최 제우를 살해했고 그 결과 동학농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후 난이 진압되고 2세 교주인 최시형 마저 처형 당하자 손병희가 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손병희는 1861년 충청도 청주에서 서자로 태어나 양반들의 가혹과 멸시를 받으며 자라난 인물이다. 1882년 22세 되던 해 동학에 입도한 뒤, 7년 뒤에는 최 시형의 수제자가 되었다.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북접 의통령으로서 동학군을 지휘해 전투를 벌였고 전쟁에 패하자 은신 생활을 하였다.

그 뒤 2대 교주 최시형 마저 체포되어 참수당하자 1897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이후 동학에 대한 조선 왕조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이에 손병희는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 1901년 상하이를 거쳐 일본 동경으로 갔다. 거기에서 갑신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혁명가 박영효를 비롯해 오세창, 최인 등 개화당의 인사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는 우연히 찾아온 천금 같은 만남이었으며 조선의 개혁을 위로부터 추진했던 개화당과 아래로부터 추진했던 동학이 망명지인 동경에서 서로 조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사건이었다. 손 병희는 1904년 일본에서 만난 개화 인사들과 함께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애국단체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손병희는 일/러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3년 권동진, 이용구 등을 국내에 들여보내 전국의 동학조직을 진보회 조직으로 재편하고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검은 옷을 입도록 했다.

진보회가 전국적으로 추진한 유색옷 입기와 단발은 조선유교 사회와 완전히 결별하고 근대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으며 또한 실용주의 운동이기도 했다.

조선의 유교 규범은 평상복으로 흰색만을 강요하여 백성들은 때가 잘 타고 빨래도 힘든 흰색 옷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또한 긴 머리를 감아올린 상투는 비위생적이며 평소 수많은 기생충(이)의 온상이 되어 조선의 남자들은 머리에 하얗게 서까래가 끼어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동학당은 1894년의 전쟁 이후 10년 동안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인해 무수한 희생자를 냈다. 2세 교주 최시형이 처형 당한 것을 비롯해, 동학 교도는 물론 그 들과 친분이 있는 사실만 드러나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탄압을 피해 은거해 있던 동학의 지도부는 서재필, 이완용, 이승만 등 독립 협회파가 주도한 1898년의 시민혁명이 고종과 수구파의 탄압으로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들 지식인 혁명가 그룹은 물론 조선혁명의 후원자인 일본과도 연합하는 것만이 동학의 생존과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 손병희의 대리인 자격으로 진보회를 조직한 이용구는 갑오 농민전쟁 당시 논산에서 동학군 5만을 지휘했던 남접 의통령으로서, 손병희가 교주로 취임한 뒤에는 동학의 2인자가 되어 손병희를 그림자처럼 호위한 군사 지도자였다.

이 용구는 1903년 말 몰래 귀국하여 그동안 수구세력의 잔혹한 탄압으로 붕괴한 동학 조직을 진보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 용구는 조선 정부의 학정을 공격해 조선혁명의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고 이 과정에서 진보회의 조직은 순조롭게 성장하였다.

1904년 10월에 이르자 색옷을 입고 단발한 진보회원은 전국에 30만 명으로 늘어났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904년 말이 되자 창립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진보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13개도에 지부를, 360여 군에 지회를 가진 명실상부한 전국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조직 이었으며 독립협회 이후 최대의 민간단체였다. 진보회는 교주인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일/러 전쟁 기간 중 5만 여 명의 동학교도를 동원해 일본군의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와 군수품 수송을 도와주었다.

또한 러시아 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정보원을 한반도와 만주 각지에 파견, 적의 동태를 감시함으로써 일본군의 눈과 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러 전쟁은 개화당과 동학, 일본의 3각 연합이 그 연대를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일진회의 지도부는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과의 합방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를 결심하게 되었다. 1904년 말, 일/러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 해 12월 26일 진보회와 일진회는 합동 총회를 열고 13도 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에 송병준을 각각 선출하였다.

1년 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 등을 지도부로 선출하였고 일본인 <모치츠키 류타로> 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윤시병과 홍긍섭은 과거 독립협회의 간부로서 1898년 시민혁명에 앞장섰던 개화운동가이고 송병준은 민씨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일/러 전쟁 당시 일본군의 통역이 되어 귀국한 인물이었다.

일진회는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정부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방침이 알려지자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하라'' 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하여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원하였다.

1905년 드디어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고 1906년 3월2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던 날, 일진회는 남대문에 <환영> 이라고 쓰인 거대한 현수막을 내걸고 이토의 부임을 환영하였다.

일찍이 1880년대 일본의 시민혁명과 정치개혁을 이끌었던 ''일본의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되어 일본의 시민혁명을 조선에 이식하는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토에 의해 비로소 조선의 선각자들이 오랜 세월 고대하였던 유신의 과업이 시작됨으로써 조선은 근대사회로 가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1907년 조선에서는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국채 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나라의 외채를 국민의 성금을 거둬 갚자는 소동으로서, 당시 고종의 학정으로 인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조선 인민의 입장에서는 실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소동이었다.

이에 대해 일진회는 1907년 5월 2일 정부탄핵 문제를 제출하여 국채 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백성의 고통과 모든 부작용이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고종과 그를 둘러싼 수구세력의 무능력과 비도덕성을 공격했다.

1907년 7월 18일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물러나고 한국 군대에 대해 해산령이 내려졌는데, 이에 반발한 일부 군인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면서 서울에서 시가전을 펼치는 한편, 이어 전국 각지로 흩어져 무기고를 습격하고 반일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 수구세력의 마지막 저항이 시작된 것이었다. 일본군과 일진회의 혁명가들은 의연히 내전에 임하였으나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일진회원들이 희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불에 탔으며, 반혁명 세력의 공격으로 전국의 많은 지부 건물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19세기말 20세기 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의 이홍장과 함께 세계 4대 정치가의 하나로 추앙 받던 이토 히로부미가 테러리스트 안 중근에게 피살된 지 1달이 지난 1909년 12월 4일, 일진회는 마침내 대한제국 2천만 국민을 대표하여 1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역사적인 성명서는 한일 합방 상주문이라는 제목으로 순종에게 보내어지고 내각에게는 한일 합방 의견서라는 제목으로 전달되었으며, 대내외에는 한일 합방 성명서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인민을 편안히 하며 동궁을 보도하여 우리 한국에 노력을 다한 것을 가히 잊기 어렵 거늘 의외의 하얼빈 변사를 일으켜 일본 전국의 여론이 비등하여 대한 정책에 근본적 해결을 주창함이 어떠한 위험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음도 우리 한국인이 스스로 취함이니.... >

우리 황제폐하와 대일본 천황폐하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단(一團) 정성으로 애소하여 우리 황실의 만세존숭(萬世尊崇)하는 기초를 공고히 하며 우리 인민을 일등 대우하는 복리를 향유하여 정부와 사회를 더욱 발전시킬 것을 주창하여 하나의 큰 정치 기관을 설립할 지면, 우리 한국의 보호, 열등(劣等)에 있는 수치에서 벗어나 동등 정치에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는 법률상 정합방(政合邦)이라 일컫는 문제이다....

오호라! 이를 다행히 성립하여 두 날개가 같이 날며 두 바퀴가 같이 구르는 정치 범위 아래 살고자 원하되 삶을 얻지 못하고, 죽으려 하되 죽음을 얻지 못하는 우리 2천만 국민은 노예된 모멸에서 벗어나며 희생된 곤고(困苦)를 면하고 동등한 오열(伍列)에 한 번 새로이 회생하여 여지를 확립하고 전보를 시진(試進)하여 실력을 양성하면 전도의 쾌락을 향유하고 훗날의 활약을 가히 얻을 수 있음은 명확한 바이다. ....>


이 성명서는 내용이 내용인 만큼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해 본뜻을 숨기고 문장을 늘어뜨려 표현하고 있어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지만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이 일/청 전쟁을 통해 조선을 독립시켜주고 일/러 전쟁으로 러시아에 먹히게 된 한국을 구해주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이것을 고맙게 여기기는 커녕 이 나라에 붙었다 저 나라에 붙었다 하다가 필경은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정미7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 역시 헤이그 문제를 일으킨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이등박문 태사가 백성들을 보살펴주고 태자를 이끌어주며 우리 조선을 위해 수고를 다한 것은 잊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하얼빈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이제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이 또한 우리 조선 사람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천황 폐하는 너그럽고 어진 마음과 큰 도량으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고 형제처럼 어루만져주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일에서 신의를 잃고 있다. 지금 한국은 환자에 비유하면 이미 목숨이 끊어 진지 오래된 시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이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최근 해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본인이 1만명이 넘는다. 이대로 가면 조선은 일본 천지가 되고 조선인은 일본인의 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보호 받는 열등 국민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일본과 합쳐 세계 대제국을 만들어 세계의 일등 국민으로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보자. 이것이 조선 민족이 사는 길이며 황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같은 일진회의 주장에 대해 당시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은 일진회의 합방 상주문을 순종에게 올리지 않고 감추는 한편, 일진회의 합방 주장을 규탄하는 국민대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이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한일 합방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정부와 언론기관에서도 일진회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일진회의 주장이 조선 민족이 생존해나가는 유일하고도 유력한 방안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진회의 합방노선은 점차 조선내부의 대세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합방론에 반대했던 이완용도 이 성명서가 발표된 며칠 뒤, 이재명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입장을 바꾸어 한일 합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처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초지일관 조선혁명을 위해 올바른 노선을 지켜온 일진회는 1910년 9월 한일 합방 직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산 됨으로써 그 소임을 다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이용구 등 일진회의 지도부는 조선총독부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당시 테라우치 총독으로서는 이처럼 강대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정치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통치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해산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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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