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8] 전제군주 고종 p355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시작된 1894년의 혁명은 조선의 낙후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를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진정한 유신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새로운 국제 환경에 최소한이나마 적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지만, 갑오 혁명 정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갑오년의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혁명군이 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물리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조선에서 일정한 군사적인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청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넘겨받아 만주와 하북 지역까지 영향권에 둔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동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갖게 된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러시아는 중국의 북부 지역에 많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을 설득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 한다. 이들은 3국 공사 명의로 일본 정부에 서한을 보내 요동반도를 포함해 만주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비록 친절한 충고였지만 일본이 거절할 경우 군사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 담긴 정치적 압력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힘겹게 얻은 요동반도의 거점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을 감안할 때 독일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와 요동반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민비와 고종은 즉시 러시아에 붙어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통해 일본과 혁명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있는 혁명정부를 점차 압박해 들어가며 갑오개혁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정계에서는 점점 친러파의 입김이 세어졌고, 그 결과 몇 달 후 김홍집은 총리직에서 실각했으며 혁명정부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퇴조하는 일본 세력과 함께 동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세가 지속되면서 1895년 8월이 되자 조선 내각에는 개혁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들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갑오 혁명정부가 이룩해놓은 모든 개혁의 성과들을 원점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선의 혁명세력은 민비를 제거하여 사태의 역전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이 과업에 민비의 정적인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대원군이 거사의 정치적인 방패막이가 되어 여론을 관리하고 일본 측은 군사행동을 맡기로 각각 역할분담을 한 다음, 이들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잘 훈련된 일단의 일본인 무사와 군인들을 동원해 민비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당시 경복궁은 미국의 퇴역 육군소장 윌리엄 다이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의 정예 무사와 훈련대 병사로 구성된 특공부대는 손쉽게 이들을 제거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날 새벽 대원군은 서울 시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여 거사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최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함으로 인해 5백년 종사가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위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은 사실상 1894년에 이은 제2차 경복궁 쿠데타였으며,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조선 혁명을 구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를 위해 대원군과 연합한 혁명세력은 일본군의 힘을 빌어 민비와 그 척족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개혁세력들이 속속 입각해 중단되었던 유신의 과업을 하나둘씩 진행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 고종은 혁명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군 훈련대가 수비하는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6개월이 흐른 1896년 2월, 미국공사 앨런과 러시아공사 웨베르, 이완용, 이범진 등과 내통한 고종은 어느 날 새벽 경복궁에서 몰래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조정을 천도함)이라 한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의 경호를 받으면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혁명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한 날 아침, 파천 소식을 접하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무장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폭도들은 김홍집을 때려죽인 뒤 그의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로 발길질하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개처럼 끌고 갔다. 이들은 김홍집의 시체를 종각에 팽개쳐버렸다.

이로써 조선의 혁명운동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이 죽고, 10년 후 다시 갑오경장을 주도했던 김홍집마저 피살됨으로써 두 차례 모두 좌절되었다. 시대를 앞선 올바른 정신으로 조선 사회를 개조하려 했던 혁명가들은 대부분 죽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혁명세력은 결단을 내려 일본과의 합작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여기에서 잠시 이완용이라는 인물의 정치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관파천은 혁명세력이 인질로 잡고 있던 고종을 빼돌려 김홍집 등 개화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2차 혁명내각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완용은 이 같은 반동세력의 거사에 중심인물로 참여하고 그 공으로 고종이 새로이 구성한 어용반동내각에서 외무대신겸 학부대신겸 농무대신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3겸직 대신으로서 아관파천 시대 조선정계를 주도하게 된다. 이는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지도자가 되어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는 등 활발한 개혁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완용은 한말에서 근대의 시작까지 조선 정계에서 활동한 거물 정치인으로서, 비록 체계적인 사상을 지닌 혁명가로 보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고종과 일본, 국내 개혁파, 정동파 등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자신만의 활동 영역을 구축했으며 복잡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던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을미사변 이후 자신도 대원군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음식조차 거부하고 있었던 고종에게 있어 영어에 능통한 이완용과 미국인 앨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은 이후 조선 정계에서 정동파로 분류되는 집단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과는 별다른 연줄이 없던 이완용이 고종을 경복궁으로부터 구출해낸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노선과는 관련이 없는 충성심의 발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탁하자 자연히 러시아 공사관이 조선 정부가 되었고 러시아는 이때부터 조선의 보호국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걸쳐 강력하게 남진 팽창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이 정책의 최종 목표는 지중해나 인도양, 혹은 태평양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따뜻한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부산의 영도를 영구 임대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부산의 영도에 러시아의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조선과 일본은 물론 태평양 전체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므로, 일본으로서는 악몽과 같은 일이었다. 또한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게 되면 미국이나 영국으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당시 영국은 러시아가 영도를 점령하자 군대를 보내 무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실력행사를 했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의 영도 조차 문제는 이완용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의 강력한 반대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조선 정계에서 열세에 몰린 일본은 러시아에 접근해 38도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의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897년, 러시아는 썰물처럼 조선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는 청나라를 협박해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군사기지로 확보하고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영도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조선 개혁세력의 반발과 영미일 동맹세력의 견제로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좌절되었지만, 요동반도에 여순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 한반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관심이 만주로 쏠리면서 군대와 외교관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고종은 1897년 다시 경복궁으로 환궁하였다. 이후 조선 정계는 이완용 서재필 등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과 고종의 지원을 받는 친러 반동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로 재편되었으며, 일본은 러시아가 떠난 틈을 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6년 이완용, 서재필 등에 의해 창립된 독립협회는 첫 사업으로 독립문을 세워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했다. 이어 1897년에는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가짐으로써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기 박영효, 안경수, 서재필, 이완용 등 개혁세력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고종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동 세력은 황성신문을 만들고 황국협회를 결성, 개혁파의 모든 활동에 사사건건 방해공작을 자행했다. 황국협회는 홍종우 등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1894년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공로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인물이다.

이 때의 조선 정계의 모습을 살펴 보면, 먼저 개항 이래 항상 조선 혁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일본은 3국 간섭으로 추락한 외교적인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 러시아까지 조선에서 한 발을 빼는 상황이 되자 이미 청나라를 분할 점령한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세력은 조선으로 밀려들어와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분주히 외교전으로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독립협회의 활동은 뚜렷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이후 조선의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민운동을 일으켰으며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대중 계몽에 앞장서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독립협회는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국가로 변모시키려 하였으나, 고종과 황국협회는 헌법제정과 의회구성을 거부하고 왕의 1인 지배체제를 고집했다. 마침내 1898년 10월, 서울 시내에 박영효가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고종은 이를 빌미로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이상재, 남궁억, 박영효 등 독립협회 간부에 대해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본격적으로 혁명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월에 들어 이승만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 지지파는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여 고종을 압박했다. 혁명세력의 위세에 놀란 정부는 체포한 독립협회의 간부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고종은 중추원(상원) 관제를 개정하고 독립협회가 추천한 인물들을 상원의원으로 임명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하원 구성과 독립협회 인정을 요구하고 있던 혁명세력은 이 타협안을 거부하고 고종 독재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급기야 1898년 11월 21일, 고종은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을 사주하여 깡패단을 조직,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 습격사건으로 만민공동회는 3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서대문 밖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이승만은 선동적인 가두연설로 많은 시민을 규합하였으며, 이 날 하루 종일 한양 곳곳에서 왕당파와 혁명파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는 무정부상태가 연출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에게 돌과 각목으로 맞서는 한편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의 집을 습격하고 어용 깡패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1월 26일 독립협회는 고종과의 담판을 통해 윤치호를 상원 부의장에 임명하도록 하고 이승만 등 회원 17명을 상원(중추원)의원으로 파견하였다. 이후 혁명세력은 중추원을 거점으로 삼아 정부와 지속적인 대결을 시도하였으나, 12월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모든 혁명지도자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조선혁명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혁명가들은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다음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조선은 다시 고종의 독재 아래 신음하게 되었다. 이때 체포된 이승만은 이후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까지 5년 동안 기나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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