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6] 리엔지니어링조선 p339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농성에 들어가자 4월 30일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즉시 5월2일 북양 함대 소속 군함 2척을 인천항에 파견하는 한편, 5월7일에는 정규군 2천명을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청나라는 천진 조약에 따라 5월 2일 일본에 대해 '조선 정부의 청원에 따라 비적 토벌을 위해 육군 일부를 조선에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일본정부는 외무상을 통해 '지리상 무역상 중요성에 비추어 조선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는 매우 긴요하므로 이와 같은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즉시 대응 출병을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5월12일 일본육군 제9여단 병력 9천여 명이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초기 투입부대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열강에 의해 사실상 분할점령된 청나라는 일본에 비해 군사력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개항 이후 외국과 벌인 모든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더 이상 서양열강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었다. 즉 청나라는 1884년 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것처럼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도 일본과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이미 군사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의 선발대는 아산만에 상륙해 농민군의 수도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반면, 일본군 9여단은 인천항에 상륙해 곧장 서울로 입성하였다. 이로 인해 5월초 이미 일본군은 숫자에서나 주둔 지역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반도에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한 것으로, 그 의의가 작지 않은 일이다.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첫 번째 조치는 1884년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즉 1894년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 9여단은 혁명군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은 청에 대해 공동으로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으나 청은 이를 거절하였다.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공사 오오토리가 이끄는 일본군 3천여 명은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과 민비를 감금하고 신속하게 서울의 4대문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궁궐호위병과 관군의 저항을 받아 대포와 총을 난사하면서 치열한 시가전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곧 고종의 항복 명령이 내려졌고 관군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민씨 정권의 주요 대신들은 모두 지방으로 도망갔고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장해제한 뒤 궁궐과 정부요인들의 집을 포위, 가택에 연금하였다.

이로써 조선에는 10년 전에 실패했던 혁명을 다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이미 민씨 정권에 의해 모두 죽거나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고, 혁명세력의 중심이었던 김옥균마저도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김옥균이 두 달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이 때 귀국하여 조선의 혁명내각을 이끌었을 것이므로 그의 죽음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일의 하나이다. 갑신정변 이후 해외로 망명한 박영효 서재필 등도 민씨 정권에 의해 3족이 몰살당하는 참화를 겪은 뒤였다.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박영효 만이 일본군에 의한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해 서서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개항 이후 20년 만에 본격적인 조선의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은 1894년 6월 25일, 개혁을 집행할 임시 최고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창설하였다. 이 기관은 일체의 국정을 관할하고 심의 결정하는 초정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혁명평의회와 같은 기구였다. 일본은 군국기무처의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기존 민씨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인사는 철저히 배제하고 김홍집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인사들을 포진시켰다.

김홍집은 과거 갑신정변 시절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김옥균 등 개화당과는 달리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하자고 주장했던 온건개혁파였다. 김홍집은 갑신정변 당시에는 미처 유교적인 국가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을 취했으나 이후 10년이 흐르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신사상을 습득하면서 보다 개혁적인 인물로 변해 있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에서는 개화당의 씨가 마른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김홍집을 내세워 혁명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경복궁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내건 대의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 개혁이었다. 조선은 개국 이래 단 한번도 자주독립국으로서 국제 사회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었으며,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천자에게 충성하는 명, 청의 일개 제후국일 뿐이었다. 조선은 해마다 중국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왕과 왕후, 세자를 책봉할 때마다 중국에 책봉사절단을 보내 관리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천자의 책봉첩을 받아오기도 했다.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도착하면 조선의 국왕 휘하 주요 대신들은 모두 영은문(寧殷門, 은혜를 맞이하는 문)까지 나와 엎드려 사신을 맞았다. 이처럼 명청조 시대 조선은 중국의 일개 성에 불과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은 사실상 천자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을 통상교역의 대상이자 군사적인 완충지대로 여기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을 독립시키고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였다. 당시 나라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뒤늦게 일본의 힘을 얻어 시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가 아닌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김홍집은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이 되었고, 박정양은 부총재관, 위원으로는 김종한, 안경수, 유길준 등 16명이 임명되었다. 일단 조직 구성이 완료되고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자 혁명 정부는 신속하게 조선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권력체계를 궁내부와 의정부로 분할하였다. 이는 왕실과 정부가 정식으로 분리되어 궁내부에서는 왕실 관련 문제를 전담하고 모든 정치 행정 재정 등의 업무는 의정부에서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근대적인 내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뜻에서 모든 공문서에 청의 연호를 사용하던 관례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개국기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즉 조선이 창건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여 1894년은 개국 503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기존 6조가 폐지되고 8아문이 설치되었다. 8아문은 내무, 외무, 탁지, 군무, 법무, 학무, 공무, 농상무 등의 부서로 재편되어 각각 담당분야의 국가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영의정은 총리대신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각 부서의 수장을 부르는 호칭도 판서에서 대신으로 바뀌었다. 또한 좌우포도청을 통합하여 독립 경찰기구인 경무청을 신설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전제 왕조 사회의 틀을 벗고 서구식 내각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회분야에서는 낡은 신분계급제도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양반 중인 평민 노비 등 신분제도가 완전히 사라졌고 과부의 재혼이 허용되었으며,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일가친척을 모두 처벌하는 연좌제도 폐지되었다. 특히 신분제의 혁파는 조선 사회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양반에게만 허용되던 관직등용의 기회가 노비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에게 주어짐으로써 조선은 미개한 계급 사회의 틀을 벗고 만인평등의 시민사회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노비문서에 의해 사람을 사고팔던 노예제가 불법화되었으며 적자와 서자에 대한 재산상 신분상의 모든 차별이 금지되었다. 또한 양반들이 병역과 조세를 면제받는 특권도 사라지게 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모든 재정관련 업무가 탁지부로 일원화되었고 시급하던 화폐제도 개선이 이루어져 모든 조세는 금으로 받고 화폐는 은본위제를 시행함으로써 화폐가치를 통일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은본위제에 기반한 새로운 화폐를 제정 통용하기 시작하면서 과거 현물과 돈을 병용해서 납부하던 세금도 새로운 화폐로 징수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방 관료들의 세금 횡령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왕실재정과 정부재정을 분리하여 민비가 나랏돈을 물 쓰듯 하여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었던 것과 같은 일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무려 200건이 넘는 개혁안을 일사천리로 의결 공포하였는데, 이는 다소 급작스러운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개항 이후 조선의 근대화 작업이 20년간이나 미뤄졌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갑오개혁은 대체로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제기되었던 시대적 과제를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단지 토지제도에 있어 농민들이 요구하던 무상분배는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갑오개혁이 조선에 근대자본주의를 싹틔우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향후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지주 자본에 따른 기업농의 출현과 이에 따른 원시 자본의 축적 과정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을 당시 김홍집 내각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주 제도를 혁파하고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하는 조치는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채 자치정부를 운영하고 있던 전라도의 농민들은 갑오개혁 정부에 의해 농민전쟁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자 처음에는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점차 토지소유권에 욕심을 부리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헛소문으로 반일감정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해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부르주아 혁명에 반기를 들고 혁명 세력에 맞서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체제의 변혁을 위해 일어섰던 농민군이 이제는 공짜로 땅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강도떼로 돌변하여 모든 개혁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갑오개혁은 일본이 1868년에 실시했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그대로 이식한 근대화 혁명이었으며, 변형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변형되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 시민혁명을 이끌만한 어떠한 계급 계층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당시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을 원했던 유일한 외세인 일본의 개입과 일부 선각 지식인들의 협조로 시행되었다는 의미이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제 개혁은 그 본질상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독일의 강제 개혁과 같은 것으로서, 이웃나라에 시민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한 정당한 무력행사였다.

이후 1894년 말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가 내각에 참여함으로서 김홍집-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성립하게 되었고, 1895년 고종은 홍범 14조를 선포하고 머리를 자르는 등 솔선수범하여 조선의 문명개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써 그동안 군국기무처에서 담당하던 개혁 작업이 내각으로 이전되어 조선은 안팎으로 근대국가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와 내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거제도를 갖춘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국가로 변모해 신속하게 국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웃나라인 조선에 혁명을 전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것은 값진 희생이었으며, 갑오년에 일본군에 맞서 저항했던 동학 세력도 10년 후 결국 진보회와 일진회를 통해 일본의 개혁에 협력하는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든든한 동맹군이 되었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