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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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꼬뮌 p332

농민전쟁을 시작했을 때 전봉준의 당초 계획은 전라도 지방에서 세력을 규합 봉기한 뒤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농민군의 숫자와 세력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관군으로는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황급히 청군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 지도부는 초기 작은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전주성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방어진을 구축, 농성에 들어가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농민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군의 입장에서는 항상 대의명분을 세워 인민의 지지를 잃지 않으면서 신속한 기동전을 펼치는 것이 유리한 법이다. 즉, 전쟁 이론상 게릴라부대는 정규군을 점과 선으로 고립시키면서 자신은 인민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때로는 가라앉고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 적을 공격하는 전략을 취해야 하는 법인데, 동학군 지도부는 전주성에 고립되어 농성을 시작함으로써 이 같은 게릴라부대의 장점을 완전히 희석시키고 스스로 점에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4월 28일과 5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시도한 포위망 돌파가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군 지도부 사이에서는 과거 평안도에서 봉기했던 홍경래가 정주성을 점령하고도 고립되어 관군에게 몰살당한 전례를 답습하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간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점차 계절이 따뜻해지고 농번기가 가까워옴에 따라 전봉준 군대에 참여한 농민들은 빨리 고향에 돌아가 벼를 심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는 점차 농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초조하기는 독재자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신속하게 청군이 상륙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뒤따라 일본군의 대병력이 속속 한반도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당황한 정부는 일단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구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청일 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국내 사태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양측의 입장에 따라 1894년 5월7일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성립하게 되었다. 정부는 농민군이 내건 폐정개혁 12개조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생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당시 휴전 협정의 골격이다. 폐정개혁 12개조는 탐관오리 처벌, 노비와 천민에 대한 차별 철폐, 과부 개가 허용, 잡세 폐지, 토지무상분배 등 주로 정치적인 것들이었는데, 고종은 일단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이고 휴전에 합의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천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화약은 실제로는 전라도 지역에 대한 동학의 통치를 허용하는, 사실상 조선의 영토분할 협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폐정개혁 12개조에 대해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후 교정청을 설치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는 시늉만 내는 데 그쳤으며 조선의 정치체제에는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휴전으로 인해 농민군의 통치가 시작된 전라도 지역에서만 폐정개혁 12개조에 따른 혁명적인 조치들이 속속 집행될 수 있었다.

휴전과 함께 1894년 5월 전라도내 53개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6월이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은 공식적으로 모든 행정권을 전봉준에게 이양함으로써 역사적인 '전라도 꼬뮌'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전라감영을 접수하고 감사의 집무실을 사용하기 시작해 사실상 전라도 지역의 통치권을 획득했으며 53개의 모든 군현에서도 집강소가 군현의 행정기관을 접수하였다. 혁명 세력에 의해 조선 역사상 최초의 꼬뮌(주민자치)이 시작된 것이다.

꼬뮌이란 12세기 북프랑스 지역에서 발달한 주민자치 도시를 일컫는 말이나, 1871년의 빠리 꼬뮌이나 1927년의 광동 꼬뮌 등 혁명기에 단기간 존속하면서 주민자치를 실험한 사건들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된 용어이다. 원래 북프랑스 지방의 꼬뮌은 소규모 지역공동체가 왕이나 영주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주민 스스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민주적인 자치정부를 운영하는 형태였다. 초기의 꼬뮌은 시장과 지도부를 주민 스스로 선출하여 자치행정을 시행하였으며, 이 집행부는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왕권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871년 빠리 코뮌에서 다시 등장하였다.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빠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혁명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3개월간 지속된 사건에 붙여진 이름이다.

빠리 꼬뮌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로서, 시민들은 9개의 집행위원회에 각각 10명씩의 위원을 선출하여 정부의 역할을 맡겼다. 위원회의 대부분은 자영업자, 소규모 자본가 등 쁘띠 부르주아지로 분류될 수 있는 계층이었으나, 노동자 20명을 비롯해 블랑키스트, 프루동파, 자코뱅 당원 등 갖가지 종류의 사회주의자들도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었다.

빠리 꼬뮌은 20만 빠리 시민의 열렬한지지 속에 출범하여 짧은 기간 동안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한 뒤 인민군을 창설하였고, 종교 및 재산의 국유화, 주인 없는 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하였다. 빠리 꼬뮌은 3개월 동안 존속하였으나 1871년 5월21일 프랑스 정부군과 프로이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시민들은 처절하게 저항하였고 시가전이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꼬뮌은 끝내 붕괴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3만의 시민군이 죽었으며 이후 반동 세력에 의해 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다.

1894년에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이 같은 빠리 코뮌의 전통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오랜 산업혁명을 통해 이미 선진공업국으로 발전해 있던 프랑스 사회와 비교할 때 갑오농민전쟁 당시 조선 사회의 발전정도는 매우 뒤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 등을 살펴볼 때 동학에 의한 전라도 꼬뮌은 빠리 꼬뮌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파리 꼬뮌이 한 도시만을 대상으로 했던 데 비해 전라도 꼬뮌은 전라도라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자치 권력이었다. 또한 빠리 꼬뮌이 3개월 동안 지속된 것에 비해 전라도 꼬뮌은 5월부터 연말까지 8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군사력에 있어서도 5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동학농민군에 비해 파리 꼬뮌은 10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정부군에 저항하다 무너졌던 것이다. 동학과 농민 계급에 의해 주도되었던 전라도 꼬뮌은 나중에 일본-조선 연합군과 무리한 전면전을 시작함으로써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 한해 집강소 체제에 따른 자치정부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당시 조선정부군이나 청군, 일본군 중 어느 쪽도 섣불리 공격할 수 없는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 과격파들에 의해 시작된 2차 봉기가 없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라도 지역에서 갑자기 공권력의 공백이 생겨나고 농민군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주 감영에 위치한 농민군 지도부는 광대한 전라도 지역의 집강소와 농민군, 동학조직들을 장악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도부의 지시가 현장에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지역 유지와 부자들을 습격해 재산을 강탈하는 등 무정부 상태가 연출되었으며, 나주 등 일부 군현에서는 고을 수령이 자체 보유한 관군과 민병대를 조직해 농민군의 진입을 막는 일도 있었다. 또한 담양 등에서는 집강소 책임자가 스스로 식견이 부족함을 인정해 부사에게 통치권을 일임하기도 했다.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에서 주로 천민과 노비의 해방을 강조했고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균등하게 무상 분배하는 정책을 지향했기 때문에 전라도 전역을 장악한 동학군은 천민과 노비, 빈농 계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동학에 의해 이루어진 전라도 꼬뮌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파리 꼬뮌에서와는 달리 동학농민군이 체계적으로 정치경제학과 사회사상을 공부한 지식인 지도부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농민군은 동학이라는 종교에 대한 탄압과 조선 하층계급에 대한 수탈에 반발해 세상을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일어섰을 뿐, 더 큰 비전과 계획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국제정세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만약 동학농민군에게 개항 이전부터 체계적인 사회변혁을 준비해 온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개화당 혁명가들이 합류할 수 있었다면 보다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조선 땅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개화당의 혁명가들과 동학의 혁명가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이들은 성장한 지역과 배경, 사회계급 등이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노선의 차이도 컸기 때문이다.

결국 19세기말 조선사회의 당면과제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볼 때, 조선은 봉건 사회의 경험을 전혀 갖지 못한 탓에 시장경제와 화폐경제의 발달이 미숙했고 그 결과 사회 변화를 주도할 부르주아 계급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사회는 개항을 맞아 커다란 충격 속에 외부로부터 강제된 사회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급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애국심만으로 무장하고 신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지식인 그룹이 김옥균 등의 개화당이었으며, 지배층의 학정에 대한 반발로 무장봉기한 세력이 동학농민군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약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개화당에게 있어 당시 조선사회의 이상적이고 유일한 발전 모델은 이웃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처럼 오랜 기간동안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호를 닫고 있었으며 산업 구조도 조선과 비슷한 나라였으므로 이 같은 일본이 신속하게 시민혁명을 마무리 짓고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할 수 있다면 조선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개화당의 선각자들은 개항 이후 일본을 자주 드나들며 일본 사회의 모든 변화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처음부터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조선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과거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조선 백성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보다 앞선 일본의 경제시스템에 조선이 편입되어 가는 변화가 시작되자 조선 민중들은 큰 충격을 받는 한편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던 것이다.

개항 이후 조선의 쌀값은 일본에 비해 월등히 낮았기 때문에 일본인 무역상에게 조선과의 쌀 무역은 엄청난 이익이 남는 장사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초기 산업혁명기에 돌입해 급속히 성장한 생산력으로 인구가 급증,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조선으로부터 쌀과 대두(조선콩)를 마구 수입해 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쌀값이 오르고 지주들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나 다른 작물을 팔아 쌀을 사야했던 소작농들은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갈등은 1880년대 황해도와 함경도 경상도등에서 방곡령이 실시되고 일본 상인들이 이로 인한 손해를 조선 정부에서 배상하도록 요구하는 등의 사건으로 인해 나날이 확대되었다. 사실 소작농의 식량부족과 쌀값 폭등은 일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지주와 양반계층은 이를 일본 탓이라고 속여 농민들의 반감을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시스템을 조선에 이식하고자 했던 개화당과, 농민의 생활고와 반일감정을 기반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처음부터 서로 융화될 수 없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주화약으로 인해 시작된 전라도 꼬뮌은 농민군의 무장봉기가 얻어낸 최초의 의미 있는 성과였으며, 조선 사회는 물론 일본과 중국 등 이웃나라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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