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4] 사람이 곧 하늘이다 p324

1824년 경상북도 경주의 한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최제우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최제우는 한학을 공부한 다음 1844년부터 10년 동안 도를 닦기 위해 나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조선말기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탐욕에 눈먼 관리들이 힘없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생지옥과 같은 현실은 최제우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최제우는 어지럽고 병든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 결심한 뒤 울산의 한 산골짜기에 암자를 짓고 도를 닦기 시작했다.

1856년 천성산에서 도를 닦기 시작한 최제우는 이듬해에는 굴에서 49일간 기도를 하는 등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처럼 도를 닦기 시작한 지 4년 뒤, 최제우는 마침내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고 동학을 창시하기에 이른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합치고 예전부터 우리 민족이 믿어오던 한울님 사상을 합쳐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동학의 중심 사상을 이끌어 내었다.

동학의 '한울님'은 천지만물을 낳고 그 속에 잠재해 있으면서 모든 일을 간섭하고 명령하는 무형의 기운이며 대우주의 정신이자 생명 그 자체이다. 이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포스'와 정확히 같은 개념으로서, 종교로서의 동학은 이미 세계 정신을 한 세기 이상 앞서간 훌륭한 것이었다. 당시 생지옥과 같은 삶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 민중들에게 동학의 가르침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인간존중, 만인평등의 사상은 커다란 호소력을 지니고 다가왔다. 민초들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종교로서 동학은 신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미개한 조선왕조의 눈에 동학은 체제를 위협하는 불순 사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교세가 점차 확장되던 1864년 최제우는 이상한 종교를 만들어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기만함)한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대구에서 처형된다. 그러나 동학은 2세 교주 최시형의 영도로 지하로 잠적한 뒤 계속해서 세를 불려나갔다. 당시 천주학과 동학은 신생종교로서 대원군의 탄압을 받는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천주학이 주로 양반과 부농 등 지배계층의 여인와 서자 등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데 비해 동학은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고통을 함께 하였으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민중 그 자체가 되었다.

최제우가 처형당한 뒤 무려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지하에서 세를 확장한 동학은 1892년이 되자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힘으로 조선왕조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심감이 생긴 것이다. 동학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첫 번째 사업은 교조인 최제우의 신원운동이었다. 신원(伸寃)이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누명을 벗긴다는 용어로서, 교조 최제우는 혹세무민한 역도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도를 설법한 성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동학교도들이 세를 과시하며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고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자, 이에 놀란 관리들은 옥에서 동학교도를 석방하는 등 유화책으로 대응하였다.

지방에서 시작한 교조신원운동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자 이에 고무된 동학의 지도부는 다음해인 1893년 손병희 등 지도부 40명이 상경, 광화문에서 연좌하고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복합상소를 올렸다. 복합상소란 같은 문제에 대해 여러 명이 집단으로 상소를 하는 것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연좌시위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고종은 이들에 대해 '일단 해산하고 생업에 임하면 요구를 들어 주겠다'고 거짓말로 달래 돌려보낸 뒤 복합상소가 끝나자 동학의 활동을 금지도록 명령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 주도하는 농민계층과 조선왕조의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1893년 3월 동학은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수만 명이 모여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동학이 충청도 보은집회에 2만명, 전라도 금구 집회에 1만명의 군중을 동원하면서 세를 과시하자 조선 정부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려 했다. 이에 시위대는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관군과 일대 결전을 준비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학 지도부는 무력항쟁을 포기, 집회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비록 물리적인 충돌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때의 집회 경험은 동학 지도부에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 동학은 1894년 새해가 밝자마자 전북 고부군에서 무장봉기의 횃불을 올릴 수 있었다.

처음에 고부사태는 우발적인 무력충돌로 시작했다. 1893년 당시 동학의 일개 접주에 불과했던 전봉준은 전라도 금구에서 대규모 농민 집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조직력과 정치력, 지도력 등을 축적한 바 있다. 이후 전봉준은 독자적으로 농민전쟁의 필요성과 봉기계획, 강령 등을 만들어 동학조직망을 통해 사발통문으로 유포하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던 중 평소에도 백성을 괴롭히기로 소문난 고부군수 조병갑이 고을의 저수지 아래 만석보라는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물세를 받아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농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성난 농민들은 조병갑 타도를 외치며 죽창과 낫 도끼 등을 들고 봉기해 순식간에 관아를 점령하고 창고를 열어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었으며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고부 농민들은 전봉준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일단 봉기했으나 이후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 그의 지도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농민군 사령관이 된 전봉준은 시급히 인근 고을로 사람을 파견, 봉기를 독촉하고 조직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준비가 갖춰지기 전에 중앙 정부에서 안핵사(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 이용태가 800여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공격을 시작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하였고 이들은 흩어져 따로 고부를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도 고부군을 포기하고 도피했다.

무사히 고부를 빠져나간 전봉준은 두 달 뒤 무장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사전에 뜻을 같이하기로 합의한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과 합류한 뒤 전면 봉기를 결의하고 농민전쟁의 취지와 향후 계획을 담은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 22일, 전라북도 무장군에서 조직된 군대의 모습으로 봉기한 농민군은 이때 4천명이었다. 이어 3월 25일 백산으로 진군한 농민군은 진용을 갖추고 곳곳에서 몰려든 자원병을 받아들여 병력을 8천명으로 증강했다. 농민군은 백산에서 [호남창의군 대장소]를 설치하고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련에 손화중과 김개남 등을 임명해 사령부와 계급체계를 갖추었다. 이들은 여기에서 "안으로 탐획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외적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내용의 격문과 4개조의 행동수칙을 제정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이후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기세가 등등해져 영광, 함평, 무안 등으로 남하, 관아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더욱더 병력이 늘어난 농민군은 4월 24일부터는 진로를 북으로 돌려 북상하던 중 전라남도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만나 격파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정읍, 원평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전주성에 도달하게 된다.

1894년 4월 27일 손쉽게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사령부를 설치한 뒤 성문을 굳게 잠그고 방어태세에 돌입하였다. 이어 도착한 관군은 전주성 주변에 진을 치고 포대를 설치한 뒤 전주성 탈환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전주성을 두고 대치한 농민군과 정부군은 그 뒤 몇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르지 못하였다. 이후 관군과 농민군이 성명전을 벌이며 소강상태에 돌입하자 겁이 많은 고종은 4월 30일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청군 2천명이 5월2일 아산만에 상륙했고, 5월 5일에는 일본군도 인천항에 상륙하였는데,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태였다. 과거 갑신정변 이후 1885년 일본과 청은 천진 조약을 체결, 조선반도에서 함께 군대를 철수하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해 양국 중 한쪽이 군대를 보내게 될 때에는 반드시 사전에 서로 통지하며, 사태가 해결되는 즉시 철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청군은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투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에 통고하였던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혁명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가 투입되면서 서울 시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많은 일본군과 민간인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살해된 일본인들의 원수를 갚고 조선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청나라와 전면전을 감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이 같은 국내의 강경한 분위기를 업고 일본정부는 청나라와 전쟁도 불사한다는 전제 아래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 지배권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힘겨운 상태였다. 따라서 청나라는 조선반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일본은 일단 조선에서 청과 대등한 군사적 지위를 얻게 된 것에 만족하고 선전포고를 훗날로 미루어 둔 것이다.

즉, 조선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청 사이의 전쟁은 이미 갑신정변 당시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당시 일본은 정부 내에서 청과 전면전을 벌이는 문제에 대해 의견조정이 돼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갑신정변의 혁명 정부를 지원하지 못하고 철수했던 것일 뿐, 후일 힘을 길러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뒤, 조선에서 농민군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조선 정부에서 청나라의 군사력 투입을 요청하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미루었던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자연스런 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미 이 때의 일본은 1884년 서울에서 청나라 군대 2천에게 꼬리를 내리며 후퇴해야만 했던 그때의 나라가 아니었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고 이어 일본군까지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정 개혁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시작한 그들의 전쟁이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는 구실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에 다시 외국의 군대가 상륙함으로써 이제 갑오년의 조선은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청군과 일본군의 네 가지 군사력이 병존하면서 복잡한 이합집산을 시작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조선반도에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 확실한 상황이 다가오자 가장 당황한 것은 조선 조정이었다. 여우를 잡기 위해 호랑이와 사자를 불러들인 격이니 이들은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서둘러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전라도 지방의 통치권을 동학군에게 넘겨주고 농민군의 모든 정치적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농민군과 조선 정부는 휴전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청과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군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한판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후 전라도 꼬뮌, 경복궁 쿠데타, 갑오개혁, 청일 전쟁, 동학군의 2차 봉기 등 숨가쁜 사태 전개가 이어지게 되는데, 이 모든 사건이 1894년 단 1년 동안에 일어났다는 점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1894년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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