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3] 어두운 죽음의 시대 p317

가렴주구(苛斂誅求) - 가혹하게 거두고 칼로 베서 빼앗는다는 뜻의 이 한자용어는 조선 말기의 사회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용어라 하겠다. 특히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 사회는 경주 김씨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정권을 잡고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다. 이 시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는데 많은 돈을 투자해 지방의 수령직을 산 방백들은 백성을 가혹하게 갈취해 투자원금을 회수하는 한편, 그 돈으로 다시 중앙의 고관과 줄을 대 신변을 보호받는 방식으로 부귀영화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이 시기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주로 3정의 문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3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한다. 먼저 전정(田政)이란 토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인데, 본래 조선의 농민들은 국가 소유의 땅을 경작하면서 토지 1결당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세금을 납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이 전세보다도 토지에 부과되는 각종 잡세와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당시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다고 하는데 본래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에 부과되는 세금이지만 지주들은 이를 소작농에게 전가하였다. 특히 전라, 경상 지방에서 이 같은 불법행위가 많았다. 또한 지방 아전들은 허복, 방결, 도결 등 여러 가지 농간을 부려 농민의 등을 처먹었기 때문에 전정의 문란은 조선후기 사회의 고질병이었다.

군정(軍政)은 조선 왕조가 백성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을 말한다.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물론 15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군인으로 징발했으나, 평화시에는 군에 입대하는 대신 이를 옷감으로 받았다. 영조 때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들이 국가에 바치는 군포는 연간 베 2필에서 1필로 부담이 줄긴 했으나, 점차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층이 늘어나면서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날로 커져만 갔다. 또한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했으므로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 무리한 정책을 펴는 경우가 많아 백성의 고통이 심했다.

환곡(還穀)이란 3월에서 5월 사이 보릿고개에 관에서 양민에게 곡식을 빌려주어 춘궁기를 넘기게 한 다음, 가을에 다시 돌려받는 정책을 말한다. 원래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정책이지만 지방의 관리들은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제공된 환곡의 양을 속인 뒤 가을에 농민으로부터 훨씬 많은 양을 거두어들인 다음 남는 양을 착복하곤 하였다. 이로 인해 추수기에 모든 양식을 빼앗긴 농민들의 생활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세기 초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중앙 정부의 인사권과 정책결정권을 독점한 뒤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해 벼슬자리를 사고팔았으며 이로 인해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호 세력은 마음껏 백성을 착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이에 따라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해 정조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민란은 점차 조직이 갖춰지고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1862년에 이르면 전국에서 37차례에 걸쳐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안동 김씨 정권이 무너지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정권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이라 한다.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1862년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부패와 착취 때문이었다. 민란이 일어나기 전 백낙신은 직위를 이용하여 약 5만 냥의 돈을 착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쌀로 환산하면 1만 5천 석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게다가 당시 백낙신의 지휘를 받는 하급 관료들은 진주목에서 공금과 군포를 횡령해 빼돌린 뒤 농민들에게 이를 부담시켰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석이나 되었다. 1석이란 과거 농업사회에서 성인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고살 수 있는 양의 곡식을 말하는 단위로서, 지금으로 치면 한 가마 정도 되는 분량이다.

자신의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양은 유럽이나 일본의 봉건시대에 지방 군주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비슷한 단위를 사용했다. 즉 천석군이라는 말은 1년에 자신의 영토에서 10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지주라는 뜻인데, 이는 그가 약 1000명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봉건제도가 발달했던 일본에서는 1석이 1 고쿠인데, 지방을 다스리는 왕들은 작게는 10만 고쿠에서 크게는 30만 고쿠까지를 수확할 수 있었다. 즉 30만 고쿠의 영주라는 것은 매년 자신의 영토에서 30만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왕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30만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의미이며, 전시에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1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던 19세기말 진주에서 일개 관료들이 1만5천석, 2만8천석을 횡령했다는 것은 다음해 보릿고개에 1만5천명, 2만8천명의 농민이 굶어죽을 것이라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굶어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어쨌든 이렇게 봉기한 농민군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지만 농민군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못된 아전들을 죽이고 악질 지주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23개 면을 휩쓸면서 10만 냥의 재물 손실을 일으켰다. 당시 진주의 농민군이 백낙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이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비록 탐관오리라고 할지라도 왕의 대리인인 관리를 함부로 처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폭발한 임술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 경기도로 확산되어 무려 37차례의 크고 작은 농민봉기로 이어졌으며 농민들은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들고 일어나 조선왕조의 학정에 대항하였다. 특히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발생한 것으로 농민봉기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여러 가지 사회 모순으로 인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왕실과 소수 특권층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백성을 쥐어짜 자신들의 배를 불릴 궁리에 여념이 없었으며 지방의 관료와 토착 양반계급은 서로 결탁해 힘없는 농민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은 유교의 잔혹한 규범에 묶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야 했는데, 예를 들어 조선 왕조는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남편이 죽게 되면 아내도 스스로 자결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남편을 따라 여자가 자결하면 이를 기리는 열녀문을 세워 귀감으로 삼고 후한 상을 내렸으므로 가문의 중흥을 꾀하던 사대부가에서는 일부러 미망인을 살해한 뒤 자결한 것처럼 꾸미는 일이 허다했다. 양반 계급에서도 적서 차별로 인해 정부인의 자식이 아닌 사람은 아버지를 나으리로 부르도록 하고 천민 대접을 하여 이들은 체제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공직사회의 부패와 조선 체제 내부의 갈등은 개항 이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돈으로 관직을 산 지방 탐관오리들의 부패가 가장 큰 문제였으나 개항 이후에는 아예 왕실과 중앙 정부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부패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제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갖추지 못했던 조선 왕실은 재정이 고갈되자 당오전 당백전 등 고액의 화폐를 마구 찍어내 사용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1883년 민비 일파가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근대적인 화폐제도의 도입 없이 고액권을 찍어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사반대했으나 민비는 고종을 설득해 끝내 이를 결정해버렸다. 이후 정부는 당오전으로 모든 정부 지출을 집행하기 시작했으나 상평통보 5개의 가치를 갖는다고 적혀있는 것과는 달리 당오전은 시중에서 상평통보의 2배 정도의 가치로만 통용되었다. 정부에서 일정한 기준 없이 화폐를 남발하는 것도 심각한데 그것도 고액권을 남발함으로써 조선 경제에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당오전의 실제가치와 액면가치가 다르게 유통되자 지방관리들은 세금을 받을 때에는 상평통보로만 받고, 중앙 정부에는 당오전으로 지급해 그 차액을 챙기는 새로운 횡령수법을 사용했다. 주민으로부터 1만냥(상평통보 1만개)의 세금을 거둔 뒤 이 가운데 4천냥으로 당오전 2천 개를 매입한 뒤 이를 중앙에 납부하고 차액인 6천냥은 자신들이 빼돌리는 방식으로 지방 관리들은 엄청난 공금을 횡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역사상 가장 뇌물을 좋아했던 임금이었던 고종은 모든 정부관직을 매매할 때 직접 돈을 받아 챙겼고 신하들이 인사차 방문할 때마다 가져오는 돈의 액수로 사람을 대했다고 하니, 조선판 전두환 쯤 되는 인물이었다 하겠다. 혹은 전두환을 현대판 고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한국방송공사, 한국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뇌물 편) 고종은 매월 말 8도의 재산가를 불러 모아 참봉, 도사, 감역 등 중앙관직을 일종의 경매 형식으로 팔아치웠고 지방 수령을 임명할 때에는 입찰 방식으로 관직을 매매했다.

고종의 입찰방식이란 지방 수령직을 원하는 여러 후보자들에게 일단 돈을 받은 다음 제출한 액수에 따라 상위 순번을 몇 명 골라 다시 입찰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현감 목사 감사직은 가장 많은 돈을 낸 후보자에게 낙찰되었으나 입찰에 떨어진 사람들도 이미 낸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고종 특유의 잔머리 굴리기 입찰이었다. 가격은 하급직의 경우 1만냥, 요즘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감사직은 50만냥 수준에서 낙찰되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시험의 합격자도 돈으로 결정되어 소과 합격은 3만냥, 대과 합격에는 10만냥이 필요했다. 1893년경이 되자 조선 정부는 수입을 늘이기 위해 1년에 10여 차례나 과거시험을 시행하는 등 매관매직의 인플레이션도 극에 달했다.

또한 개항 이후 상품유통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중앙부처와 지방관청, 지방 토호(유력인사)들이 서로 나서 유통되는 모든 물품에 갖가지 명목의 세금을 붙이기 시작했다. 법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사회에서는 그저 힘 있는 기관마다 필요에 따라 세목을 만들어 돈을 거뒀기 때문에 백성들은 한 가지 물품을 살 때에도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만 했다. 이처럼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전국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해 1893년이 되자 전국에서 한해에만 65건의 농민반란이 발생하는 등 조선사회는 사실상 통제력을 잃고 내부에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1893년의 민란은 임술민란 이후 30년 만에 다시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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