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2] 조선의 별 (혁명가 김옥균) p306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성난 백성들은 궁궐까지 쳐들어와 민비를 죽이려 했다. 궁궐을 탈출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민비는 충주의 장호원에 머물면서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따라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 1개 여단 4천명이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13명이 참살 당하는 등 피해를 입자 공사관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군대 500여명을 서울에 상주시키게 된다. 임오군란으로 인한 청군과 일본군의 주둔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외국 군대가 서울에 상주하게 된 사건으로, 그 역사적인 의미가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1870년 경 조선에는 천주학과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사상, 그리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학(서양 학문) 등의 영향으로 박규수, 유홍기 같은 중인계층에서 개화 1세대가 생겨났다. 이들은 나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가문의 청년 엘리트를 포섭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 개항 직후인 1880년대가 되자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빌붙어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고종과 민비 등 황실 세력에 의해 탄압을 당하자 향후 정치 노선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러시아의 혁명세력이 온건 멘셰비키와 급진 볼셰비키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김홍집이 이끈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유교 체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고 청국과는 종래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노선은 당시 청에서 일어나고 있던 양무개혁 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 뿐 아니라 근대적인 정치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수구반동세력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했으며 조선이 문명개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급진파만이 실질적인 조선의 혁명세력이었고 이후 이들은 개화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사이비 개혁파와 민씨 일파, 청나라 등 수구 반동세력의 연합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자, 본격적으로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들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상주하고 있던 외국 병력은 청나라 1개 여단, 일본 1개 대대로서 청군이 일본군보다 8배나 많았다. 하지만 2년이 지난 1884년 베트남의 지배권을 놓고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시적인 군사력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전선에 군대가 부족했던 청나라는 1884년 8월 조선 주둔군 가운데 절반을 빼돌려 베트남 전선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청불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싱겁게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서양제국과 벌인 모든 전쟁에서 일패도지함으로서 대국의 체면에 손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주변 국가들은 청나라를 종이호랑이로 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국제환경의 변화에서 자신감을 얻은 조선의 혁명가들은 비로소 거사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는 거사 계획이 결정되자 개화당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접촉해 혁명군의 의도를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 측에서는 이들의 쿠데타가 성공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판단, 조선주둔 일본군을 동원해 혁명을 호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개화당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개화당은 일본이라는 든든한 우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혁명군의 군사력은 자체 병력 150명과 일본군 500명 등 650명에 불과해 청의 주둔군 2000명에 비해 숫자에서는 열세였으나, 그 사기와 전투력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청의 군대를 감당해낼 만한 수준이었다.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1884년 10월 17일,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은 일본군의 호위 아래 우정국 개설 기념 연회가 벌어지고 있던 장소를 기습, 민씨 정권의 수괴들을 대부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혁명군이 참살한 민씨 척족들은 민영익,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 실질적으로 민씨 정권을 움직이던 핵심인물들이었다. 연회장 습격이 성공하자 개화당 가운데 관직을 갖고 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3명은 경복궁으로 입궐, 자고 있던 고종을 깨워 거처를 경우궁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어 사태파악을 위해 경우궁으로 고종을 알현하러 온 민씨 정권의 요인들을 차례로 살해하였다. 이날 개화당은 일본군의 호위 아래 경우궁에서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삼아 수구파를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은 서울에 있는 모든 외국 공관으로 사절을 보내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한편,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에 홍영식, 호조참판에 김옥균, 전후영사겸 좌포장에 박영효, 조우영사겸 우포장에 서광범, 병조참판에 서재필 등을 임명했다. 혁명 정부는 이어 14개항의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청으로부터의 주권 독립, 신분제도의 철폐, 조세제도 개혁, 경찰제도 신설, 행정기구 개편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을 위해 시급한 조치들이 담겨 있었다. 개화당 정부가 발표한 14개조는 다음과 같다.

1.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해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육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혁명정부의 이 같은 초기 14개 정강은 일단 신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군사력과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정권의 기반이 안정 되는대로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일본식 유신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눈치 챈 민비에 의해 고종은 다음날 창덕궁으로 돌아갔고 1884년 10월 19일, 민비의 요청을 받은 청군은 혁명 정부가 위치한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초 혁명군의 지도부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이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가능성, 개입을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공격하다 물러날 가능성,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혁명정부를 붕괴시키려 할 가능성 등 3가지 경우를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청불 전쟁에 패해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국이 조선의 신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신흥 강국인 일본과 정면충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최악의 경우 청군이 사생결단의 각오로 공격해오더라도 이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현실로 드러난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당시 조선에서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면서 국정을 좌우하고 있던 원세개는 사력을 다해 개화당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다. 청의 입장에서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베트남을 잃은 마당에, 이제 조선마저 일본식 유신을 이룩하고 독립하게 된다면 이로울 것이 없었다. 반면 개화당이 기대했던 일본군은 갓 태어난 조선의 혁명 정부를 수비하는 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군이 예상외로 강력하게 창덕궁을 공격하여 혁명수비군을 밀어붙이자 일본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일본은 당초 청나라 주둔군과의 정면충돌까지는 계산에 넣지 않았으며, 서울의 일본군 1개 대대로 청군을 제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추가로 병력을 파견하여 청군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종이호랑이라고는 하지만 당시로서 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일본은 아직 힘이 약했다. 일본군이 퇴각하자 신복모 윤경완 등이 이끄는 조선혁명군 100여명은 숫적인 열세와 빈약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전멸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개화당의 혁명정부는 3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창덕궁 전투에서 수많은 혁명 열사들이 청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지도부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에서 10년 동안 머물다 청나라로 건너갔지만 상하이에서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의 손에 살해되었다.
조선 말기,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던 시절 분연히 떨쳐 일어나 조선을 부강한 자주독립국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만고의 애국자 김옥균은 이렇게 이국땅에서 매국노의 손에 죽어갔다. 개화당은 1894년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대원군 주도의 갑오개혁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꿈이었던 조선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한 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조선말기 개화 혁명가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봉건제도 아래의 일본만이 자체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개혁파들은 사쓰마 한과 조슈 한을 중심으로 일어나 막부에 대항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 한(번)은 독자적인 군주와 영토, 군대를 가진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의 존왕개혁파는 스스로 무력을 가지고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연합군을 결성, 막부에 대항할 수 있었다. 반면 모든 군사력과 행정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과 청나라의 개혁운동은 앞선 지식과 사상을 지닌 엘리트 개혁세력과 무력에 의존한 하층 계급의 폭동이라는 양 갈래로 분리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개화당이 1890년대에 들어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던 동학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다면 조선에서도 일본식 유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말기 개화당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이상적인 모델이었고 이들은 조선을 일본처럼 개조해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자발적으로 개혁을 이루기엔 모든 면에서 너무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조선과 같은 약소국이 독자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동시에,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성취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서 일본식의 개혁을 추구해 조선을 근대사회로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과 병합하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의 왕족과 수구파는 끊임없이 개혁을 거부하면서 정권을 연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위대한 혁명운동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그들의 종교 집단이라는 특성상 중앙의 엘리트 혁명가들과 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처음부터 실패가 불가피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 혁명이 주요 과제였던 조선말기에는 개혁적인 친일파만이 유일한 애국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과 한일합병 등을 추진했던 친일파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1884년과 1894년, 1904년 이렇게 20년간을 놓고 보면 당시 일본의 국력이 10년마다 일취월장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일본은 청나라에 대항하지 못해 힘들게 성립한 조선의 혁명정부를 포기한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1894년에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개혁이라는 비슷한 문제로 대립했을 때 일본은 청나라와 전면전을 감행, 승리를 거두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 인해 조선에는 다시 한번 자주적인 근대화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갑오경장이다.

그러나 이 갑오경장마저도 일본이 3국 간섭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틈을 타 민비 등이 재빨리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갑오년의 개혁정부를 무너뜨린 조선 왕실은 모든 개혁의 성과를 철폐하고 다시 예전의 왕조 독재체제로 회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에도 일본은 너무나 큰 적 앞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고, 조선 혁명의 좌절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 힘을 기른 일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공한 뒤 만주와 한반도로 기세 좋게 침략해 내려오던 러시아에 맞서 전면전을 감행했고 기적과도 같이 승리를 거두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일본만의 영광이 아니라 당시 백인들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던 전 세계 모든 유색인종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당시 일본은 자신의 힘을 냉철하게 파악하여 힘이 부족할 때는 이를 악물고 물러설 줄 알았고, 다시 힘을 길러 이제는 해볼만하게 되었다고 판단되면 정면 대결을 통해 적을 물리칠 줄 아는 현명한 국가였다.

개항 이후 조선에게 절대절명의 과제로 남아있던 근대화 개혁은 부패한 고종과 민씨 척족들에 의해 무려 30년 동안이나 가로막혀 있었으며, 이들은 번번이 외세를 끌어들여 개혁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의 군사력이 수구외세를 제압할 때마다 조선에는 자주독립과 근대화 개혁이 시도되었으며, 일본이 패퇴하면 조선은 다시 중세 암흑시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 시민정신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도입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중세의 낡은 전제정치에 의존하고 있었던 청나라나 러시아는 결코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를 바라지 않았으며 조선의 반동수구세력을 이용하여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반면 조선과 비슷한 처지에서 신속하게 발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일본은 조선이 하루빨리 개혁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시장경제체제가 정착되기를 원했다. 이 같은 이유로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의 혁명세력을 후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낡고 부패한 조선왕조의 쓰레기들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일본과 다른 외세와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이 같은 일본의 입장에 따라 당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공동운명체였으며, 일본의 진출로 인해 비로소 조선은 제한적이나마 개항과 근대화의 혜택을 맛볼 수 있었다. 1876년의 개항,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갑오개혁, 그리고 1895년의 민비살해 등은 개화기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명백한 공헌이며, 오늘날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이 점에 대해 일본을 전근대적인 왕조시대의 시각으로 예단하고 비난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개항 이후 조선 내부의 개혁세력을 측면 지원함으로써 조선을 스스로 개혁시키려던 노력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직접 전면에 나서 1905년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며, 1910년에는 조선을 흡수합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조선에는 이씨 왕조의 낡은 유산이 완전히 제거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도입되어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개항이후 합병에 이르기까지 34년 간 일본과 조선은 대륙진출과 근대개혁이라는 서로 상이한 목표와 이해관계 속에 조선이 개혁되어야만 일본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고, 일본의 힘이 커져야만 조선이 문명개화를 이룰 수 있었던 절묘한 상생의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가 주변국을 무력으로 침략하는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침략이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은 어두운 가난과 압제의 터널을 벗어나 개명된 근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생의 관계는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의 분단 이후까지 계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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