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3]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p186

그동안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가리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그나마 이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대두한 식민지근대화 이론이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그 이전에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없었더라도 조선사회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발전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창작해내는 등 일본 통치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이는 기회주의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미리 준비된 결론에 역사를 꿰맞추는 곡학아세의 전형이었다.

1987년 교토대학 나까무라(中村哲) 교수의 제안에 따라 안병직 등 한일연구자 16명이 참가한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가 생겨나 식민지근대화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안병직은 1980년대 남한 주사파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라는 이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미국의 착취를 받는 반봉건사회이므로 노동자 계급을 앞세운 정통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반식민지 민족해방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초 서울대에서는 김영환 함운경 등을 중심으로 자생 주체사상파들이 생겨나 이후 삼민투 전대협 한총련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한 안병직은 식민지근대화 이론으로 급선회, 일본이 침략을 위한 목적이긴 했지만 그것을 계기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와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식민지근대화 이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기존 한국 사학계의 주류였던 수탈이론이나 자본주의 맹아이론에 비하면 한층 진일보한 입장으로서, 일본을 옹호하는 어떠한 이론도 백안시되었던 국내 학문 풍토를 감안하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수탈이론이란 비록 일제시대에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근대화가 있긴 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수탈을 위해 생겨난 것이고 또한 일제시대에는 엄청난 자원과 인력, 생산물 등의 수탈이 자행되어 조선인의 삶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시대의 많은 통계 자료를 조작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50%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는 둥, 일제시대에 조선 지역 총생산의 80%가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등의 무리한 수치를 만들어낸 뒤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한 반일 책동의 근거가 되었고 이 허무맹랑한 수탈이론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일선 학교에서 교육되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먼저 자금 유출입과 관련, 일제가 패전 때까지 조선에 투여한 자금이 60억 내지 70억 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통계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302억 엔이고 물자 유출분 140억 엔을 합하면 440억 엔이 넘어 유입자금의 7배에 이르렀으며, 이렇게 식민지 전 기간의 추정 GDP 550억 엔의 80%이상이 유출 또는 파괴됨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것이다. (정태헌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 조세정책을 중심으로』p.61 서울: 역사비평사 1996 )

식민지 근대화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식민지 전 기간 동안의 추정 국내총생산액 550억 엔의 80% 이상이 일제로 유출 내지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나, 일제시대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발생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의 마술 같은 이야기이다.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p.358 )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를 남김없이 착취한다고 했던 맑스도 착취율을 50% 정도로 보았는데, 만약 일제의 착취율이 80% 이상이었다면 조선 사람들 모두는 벌써 굶주려 멸종했을 것이다. (안병직 『식민지 시대 연구, 단견 버려라』 시사저널 1996.7.4 )



일제시대 초기 토지조사 사업에 대해서도 서울대의 신용하 등은 이 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약 절반 이상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 주인을 확인할 수 없어서 조선총독부 소유가 된 토지는 전체 국토의 4%에 불과했으며, 1920년대 들어 총독부는 본토의 일본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선이주정책을 취하면서 조사사업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를 유무상으로 불하해주었지만 이 또한 전체 토지의 10%를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권태억 등 한국의 주류 학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1인당 쌀 소비량이 1910년에는 약 0.71석이었다가 1919년에는 0.62석, 1929년에는 0.44석, 그리고 1944년에는 0.56석으로 감소했다는 통계 수치를 들먹이면서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식량사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상인등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의 쌀 소비량은 평균 0.58석 수준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일제시대 후반기에는 오히려 소비량이 약간 증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자신의 판단을 위임하게 마련이므로 역사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 같은 사실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면서 글을 읽게 되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1990년대 들어 시작된 식민지근대화 이론은 일제시대에 대한 이전의 평가에서 한 걸음 발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일제시대에 이룩된 산업화라는 것이 당시 한반도에서 가능했던 유일하고도 최선의 발전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이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를 순전히 외래적인 형태로,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이영훈)고 말한다. 12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p. 95.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 금융제도 및 교통, 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조처들은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제는 한국을 비롯하여 자신이 통치하던 식민제국 전부를 함께 동원하고 근대화시키는 발전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전상인)

식민지 시대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주의 발전이 불충분하였고 또한 서구가 지배하는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국적(national) 산업화 전략이 아니라 일본과 인근 식민지들, 특히 조선을 포함하는 지역적(regional)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였다. 곧,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방식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모델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도 동시에 해당되는 것이다. (서용석)
Yong Sug Suh, 1991, Class and Colonial Path to Modernity in Korea, 1910-1945,? PhD Dissertation, Department of Soci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참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보호국이 되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때, 일본은 당시로선 감당하기 벅찬 러시아와 무리한 전쟁을 수행한 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경제회복에 투입하는 것인데, 일본은 10억엔의 전비와 40만 이상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로부터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받지 못한 채 대신 조선과 사할린, 쿠릴열도 등 몇몇 영토를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들 새로운 영토를 잘 활용하여 손해를 만회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미 대만을 10년 간 통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저개발 상태의 식민지를 키워 뭔가 빼먹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 통치 첫해인 1896년에만 일본 정부는 정부 예산의 11%라는 막대한 돈을 대만에 쏟아 부어야만 했다. 그 뒤 대만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대만 경영은 계속 적자였고 1905년에 와서야 대만 식민지 정부는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대만 통치 초기 일본은 대만에서 사탕수수 농업을 발전시켜 외화를 얻어내는 데 주력했는데, 1920년대 일본에 쌀이 모자라게 되어 쌀값이 오르자 대만의 농민들은 사탕수수 대신 쌀 농사를 지어 일본에 수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농업은 몰락했을 뿐 아니라 대만의 사탕수수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대만의 쌀 생산을 줄이고 설탕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변변한 지하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후가 따뜻해 플랜테이션 농업을 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닌 척박한 땅이다. 일본은 대만에서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외화획득용 사탕수수 농업이라도 육성할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우엔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일본도 당시 산업혁명 초기의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주들은 쌀과 콩을 생산해 비싼 값으로 일본에 수출해 수익을 올렸지만 이는 일본의 농업경쟁력을 떨어뜨려 경제발전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가치란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었다는 점 이외에는 특별한 이점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조선 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켜 일본경제와 통합함으로써 시장규모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일본과 연계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는 일종의 '장기투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던 이유는 지하자원이나 설탕 고무 같은 원료를 획득하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자원 기후 문화면에서 일본과 닮은꼴이었던 조선은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을 기초부터 착실히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통치 초기인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난잡한 토지소유관계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편하는 일이었고, 1920년대에는 그 성과를 기반으로 산미증산운동 등 토지의 생산성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단계를 통해 조선에 기초적인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게 되자 1930년대에부터 일본으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안병직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식민지 경제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장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었다.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수산업의 생산 비중이 80%에서 43%로 하락하고 대신 공업생산의 비중이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공장이 많이 세워짐에 따라 노동자의 숫자도 1943년 175만여 명으로 늘어나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초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는 일본 전체 공업시설의 25%를 한국에 배치하였고,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에는 중화학공업까지 유치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지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한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일본의 조선 경영은 현지에서 오히려 산업화를 역행해 농업사회로 퇴보시켰던 영국의 인도 경영과 비교해볼 때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브루스 커밍스, The Lagac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및 문화면에서도 단일한 단위로 묶였다. 일본은 꿈에라도 나중에 한반도가 독립할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물량의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한반도에 들어선 흥남의 질소비료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진남포의 공업단지 등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첨단 중화학 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이 조선의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투자한 관개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역시 다른 식민지의 경우에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의 모습이었다.(브루스 커밍스, 같은 책)

그 외 교육면에서는 6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한제국 말 2.5%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78%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전체의 17%가 12년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석탄통계연보) 이 같은 교육이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한국전쟁 후 남한에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과거 대륙을 통일한 여러 왕조들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조공을 받으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자주정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별로 점령할 가치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좋은 것도 아니고 토지가 비옥한 것도 아니요,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구태여 정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19세기 말 얼지 않는 항구에 한이 맺힌 러시아나 대륙진출에 한이 맺힌 일본 정도가 군사적인 이유로 조선을 원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조선을 인수받은 일본은 초기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해 철도를 놓고 신작로를 만들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근대적인 관료 제도를 이식했으며,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식민지로서 최악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로 당시 조선이 기후가 따뜻하지도 않고 별다른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둘째 정치경제 문화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이었던 데다, 셋째로 그나마 동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교근본주의가 뿌리박힌 사회로서 이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맞는 신사상을 보급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통치한 일본이 최초 10년 동안 해마다 일본 예산의 10%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대만의 기반정비를 위해 쏟아 부었던 것을 생각할 때, 지정학적인 중요도를 제외하고도 조선은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덩치가 컸기 때문에 매년 일본 정부 예산에서 엄청난 자금이 조선총독부에 대한 국고보조금으로 투입되었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투입한 보조금은 많을 때에는 2천만 엔이 넘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조선에 투입된 자금은 관공서와 학교를 신축하고 교사와 공무원에게 봉급을 지급하며 도로와 철도 항만 전력 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이례적인 투자는 조선을 키워 잡아먹으려는 웅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는 한반도가 우리 땅이다, 즉 이제는 여기도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이 시기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본토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들을 대거 조선으로 초빙하여 일선 학교에 투입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사범학교 체제에 따라 교사를 양성했는데,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범학교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수한 엘리트 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거 한반도로 부임하여 조선인들의 문명개화를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1906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근대화의 기반을 닦은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근대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이토가 부임한 1906년까지 11년이 지나도록 전국의 소학교는 4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사정을 파악한 이토는 부임하자마자 정부 관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그동안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서 질책한 뒤 학교 건설 사업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개가 넘는 각종 학교가 들어서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토는 해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조선을 일본의 엔 통화권으로 통합하고 역사상 최초로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이후 조선의 물가는 안정되고 현대적인 화폐경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제시대 힘들게 구축된 조선의 경제기반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한반도는 다시 원시시대로 회귀하고 말았다. 특히 해방 전 조선에 있던 일본인 60만 명이 모두 일본으로 귀국한 것이 남북한의 발전에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되었다.

하지만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에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교육과 제도, 이념과 관습, 법률, 경험과 기술 같은 것들은 결코 전쟁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과 일본 경제가 그토록 신속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기적을 베풀어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선진공업국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의 문명을 이루어 향유한 경험이 있는 사회는 일시적인 참화로 물질 기반이 모두 파괴되어버린다 해도 다시 신속하게 일어설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란 보이지 않는 기반과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이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인간 자원이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것들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반도에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공장을 짓고 사람들을 개화시켰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입헌 군주국가를 만들어 근대화를 시도했을 경우 오랜 세월이 걸려도 깨어지지 않았을 완고한 문화유산과 사회제도, 이념 같은 정신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려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지고 갈고 다듬어진 정교한 체제였으므로 어지간한 변화와 충격에는 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토록 짧은 기간에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사회가 이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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