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1]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다 p159

일찍이 위대한 마르크스는 인류역사가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 왔으며, 그 이후에는 과도기인 사회주의 사회를 거쳐 모든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 모든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은 생산력의 발전이며, 이는 사회의 토대(하부경제구조)와 상부구조(정치와 문화)가 상호 변화 적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봉건사회의 전통을 지닌 유럽과 일본은 순조롭게 자본주의로 이행, 산업혁명과 급속한 생산력의 발전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산구조에 맞는 정치 사회구조가 도입되어 근대시민사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의 발전조차 이룩하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이들 지역은 자본주의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왜곡된 사회발전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제3세계 지역의 정체성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마련해 설명해보고자 시도했으나 그 원인을 뚜렷하게 밝혀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제3세계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 문제의식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봉건사회의 전통을 경험하지 못했던 대만과 조선도 기타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이들 지역은 일본의 통치로 말미암아 시민혁명을 이룩하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찍이 20세기 초반 조선과 일본 사회의 발전 수준에 있어서 커다란 격차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선의 문명개화를 선도하는 산파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일본에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처음 주장한 것은 후쿠다(福田德三)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의 경제학을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인 경제학자로서, 19세기 말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04년 [대한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 라는 논문을 발표, 최초로 조선 사회의 정체성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근대적인 경제사학의 방법론으로 조선의 경제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후쿠다는 재화의 교환 유통에 입각하여 경제가 발전해 가는 단계를 자족경제, 도부경제, 국민경제의 3 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는 자족경제를 봉건제도가 출현하기 이전의 시기로, 도부경제는 봉건제도에 대응하는 시기로, 그리고 국민경제는 근대국가에 대응하는 시기로 보았다. 그의 연구는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 상태가 아무런 도부경제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자족경제의 단계에 속해 있으며, 봉건제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변태적인 양태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단계는 일본의 9세기말에서 12세기 초에 해당하고 유럽과 비교해도 9세기 초에서 12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 상태가 일본과 유럽에 비해 천년 이상 뒤떨어져 있다는 결론이며, 근대국가의 국민경제가 형성될 수 있는 불가결의 선행 필수조건이 바로 봉건제도이므로 조선은 자본주의는커녕 봉건제도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후쿠다의 이론을 정체성이론, 혹은 봉건제 결여론이라 한다. 바로 이웃해 교류하던 두 나라의 경제발전이 천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주장은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것이긴 하나 일본이 오랜 세월동안 외부세계와 거의 교류 없이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하다. 어쨌건 후쿠다의 연구는 당시의 학문 수준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고 참신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정체된 조선의 경제가 근대화를 이루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나라는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이웃하고 있는 외부의 존재는 곧 러시아와 일본인데, 러시아의 경우 조선과 마찬가지로 경제가 저급하여 그 협력으로 발전의 전기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조선의 발전은 일본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즉,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일본에 동화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자본주의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봉건제도란 무엇인가. 봉건제도란 일종의 정치적 사회적 현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이 토지의 소유관계를 중심으로 결정되는 제도로서, 이 같은 질서에서는 개인의 재산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이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세습된다. 또한 봉건사회의 정치권력은 봉토라는 이름의 영지를 부하에게 나누어줌으로서 생겨나는 충성과 군신관계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사회, 정치제도는 중세유럽에서 번영하였는데, 가령 프랑스에서는 12세기 무렵에 그 정점에 달했다. 유럽 이외에 이와 유사한 사회 정치적 제도가 일찌기 존재했던 다른 지역은 전 세계에서 일본뿐이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 즉 오닌의 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한 시기까지 일본의 봉건제도는 전성기 유럽 봉건제도와 아주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에도 막부시대에 들어오게 되면서 일본의 봉건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안정되고 고도로 조직화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는 지형상 고립된 일본의 독특한 산물이다. 유럽에는 지역에 따라 이 같은 중앙집권적 봉건제도가 출현하지 않았거나 출현했더라도 매우 짧은 기간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유럽은 일본의 경우보다 더 격렬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유럽의 후기 봉건제도는 재빨리 일본식 통일봉건제도의 단계를 거쳐 더욱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봉건제도는 인류 역사상 전 세계의 두 지역에서만 나타났던 매우 드문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과 유럽에만 봉건제도가 생겼는가. 일본의 학설에 의하면, 봉건제도는 이질적인 사회 정치적 요소가 특수한 형태로 서로 융합한 것이라고 한다. 즉 봉건제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마다 토지와 조세에 관한 강력하고 발달된 법령 체계와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존재해야 하고, 이를 보다 큰 범위에서 통합할 수 있는 중앙집권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한두 가지라도 부족하거나 너무 강하게 되면 그 사회는 원시적인 부족사회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왕이 모든 권력을 가지는 전제왕조의 형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봉건제도가 희귀했던 것은 이 '균형상태'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지역을 포괄하는 발전된 법과 정치조직은 중세유럽의 경우 독일의 부족국가 전사단에서 시작되었고 일본은 고대 씨족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육조시대의 중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사회가 발달하여 봉건제도에의 계기가 되었으나 끝내 성숙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런 경우는 이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이라는 두 요소 사이에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중국은 중앙 정부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경우이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부족국가의 경향이 압도적으로 강해 중앙정부가 발전하지 못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 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고대 씨족사회나 부족사회 가운데 한두 개가 강성해지거나 연합하여 주변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봉건사회의 단계 없이 곧바로 대규모의 전제왕조로 발전하였다.

그렇다면 봉건제도는 왜 근대화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는가.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났던 전제제도에 비하면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각 경제주체들의 법률적인 의무와 권리가 중시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근대의 법치주의라는 개념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의 발달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봉건영주는 정복이나 영토의 확장보다는 토지의 소유와 토지세의 징수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영주의 통치를 받는 상인과 제조업자는 전제 국가에 속한 것보다 더 폭넓은 활동범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앞서 기술한 법률관계의 발달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그 결과 근대적인 형태의 상업사회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봉건 사회에서 경제 주체들에 주어진 활동의 자유는 실용적인 윤리관을 길러주었고 분권과 자치라는 정치제도는 지도자에게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활발하고 진취적인 도전정신과 기업가 정신이 생겨났는데, 이는 근대유럽과 일본의 큰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한국(대한제국)에 있어서 경제단위의 발전은 자발적인 것일 수는 없고, 전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전래적이란 어떤 발전된 경제조직을 갖는 다른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토지를 개척 경작하여 서서히 이를 자본화할 수 있게끔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 년 간 교통을 해온 결과 얻어낸 양해와 동정으로써 한인을 사역함에 익숙하고, 또 한인의 토지를 사실상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사경영을 시도하였으며, 더구나 그 생산품인 쌀과 콩(대두)에 대하여 최대의 고객인 우리 일본인은 이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자가 아닌가!

하물며 그 봉건적 교육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완전한 것 중의 하나에 속하며, 토지에 대해서는 가장 집중적인 농업자요, 인간에 대해서는 한인에게 가장 결핍된 용감한 무사적 정신의 대표자인 우리들 일본 민족은, 아무런 봉건적 교육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단위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그 부패쇠망의 극치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저에서 소멸시켜 자기에 동화시킬 자연적 명운과 의무를 갖는 유력우수한 문화의 중대한 사명에 임하는 자가 아닐까!



후쿠다가 이 논문을 발표한 당시는 이미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어느 정도 일본을 미화하고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성과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기본적인 사실은 부인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후쿠다의 정체성 이론은 흑정암, 삼곡, 사방박등 주로 일본의 다른 경제사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후쿠다의 사상을 이어받아 조선은 발전하기 힘든 정체된 사회였다고 규정하고, 조선이 근대화된 것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해서였다고 갈파하였다. 사방박은 세계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성립하는 방법은 그 첫째가 자기 사회의 진통을 통해서 이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히 외래 자본주의의 자극에 강요되어 부득이하게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인데, 전자는 서구와 일본의 경우이고 한국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하였다.

사방박(四方博)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자본주의화는 일본의 자본과 일본인의 기술능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개항 당시 조선에는 아무런 자생적인 자본의 축적도 없었고 기업 정신도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형성을 희망하는 사정과 그것을 필연케 하는 조건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개항 이후 활발한 조선 진출을 통해 자본주의 질서를 전파해 주었으며 합병 이후에도 근대적인 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학교와 각종 시설을 건설하여 조선사회의 근대화, 문명화를 주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종전 후 북한을 중심으로 정체성 이론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뒤이어 남한의 학계에서도 같은 연구가 이루어져 점차 남북한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자생적 근대화 이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이 같은 이론은 기실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저열한 억지주장들로서,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는 무리한 시도'라고 평가되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선구는 역사학계였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최병무, 김석형, 홍희유 등이 조선조 후기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나 요소가 자생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맑스의 이른바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한반도의 역사도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제사회로, 그리고 봉건제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로 각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왔음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 사학계에서는 맹아론 연구가 급속히 소멸하게 되는데, 이는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한 독재체제가 완비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역사관이 대두하면서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에서 중단한 연구를 남한의 학자들이 계속 이어나가면서 자생적 근대화이론을 발전시켰다. 남한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따르면,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러 조선 사회에서도 농업 수공업 상업 신분제의 측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맹아)이었으며 일본의 침략은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던 근대화의 싹을 잘라버리고 산업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왜곡된 사회구조를 이식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이 없이도 조선에서 스스로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 산업혁명이 발생했을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스스로 근대화를 시작한 기점이 어디인가를 찾기 위해 18세기 후반, 19세기 중엽, 개항기, 갑오개혁기로 나누어 수색작업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가 되자 이 네 가지 가운데 18세기 후반 기점론은 폐기한 뒤 1860년대 설, 개항설, 갑오개혁기 설로 구분해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1860년은 고종이 즉위해 대원군의 통치가 시작된 해이다. 따라서 1860년대 기점설은 이 때에 이르러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이에 맞서 반침략, 반제국주의 운동이 시작되어 조선의 민족주체 형성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1876년 개항설은 개항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세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종속됨으로써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 이론은 한국 중세사회의 내재적 발전의 성과로서 근대의 기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이라는 타율적 계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즉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민족정기를 세우고 반일책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맹아론의 목적에는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갑오개혁기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비로소 근대적인 제도와 사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중세적 국가가 근대적인 국가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자본주의 맹아 이론과 기점 수색작업은 한국 역사학자들의 수준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실로 한심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맹아라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만한 좋은 일이겠지만, 이들은 '있어야만 하며 반드시 있을 것이다'는 신념 아래 결과를 먼저 설정해놓고 거기에 역사를 꿰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과연 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이처럼 한심하고도 허무맹랑한 이론이 한국에서는 어느새 정론으로 자리잡아 아직도 일선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으며 일본의 침략성을 비난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도 이들로서는 버릴 수 없는 이론인 것이, 만약에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항일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는 '민족정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때문인 것이다. 답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4지선다형에서 지금은 3지선다형으로 줄어든 맹아 수색작업에 성과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최근 신용하 강만길 등 현대 한국의 관변학자들은 자생적 근대화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제 식민지배 정책의 기본이 민족 자본가의 성장을 막고 민족자본의 축적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만길에 따르면 가령 토지정책의 경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문호개방 이후 성장해 오고 있던 자작농 상층부를 제거하고 농민의 대부분을 영세소작인으로 만드는 한편 친일 지주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한국에서는 농업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로 그것이 저지되고 오히려 지주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할말을 잃게 된다. 그런 식이라면 1910년대는 (스스로 발전했을 경우) 중화학공업이 발달해야 마땅한 시기라든가, 첨단 우주산업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는데 일본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과연 토지대장 같은 것 하나 정비되어 있지도 않았고 등기제도라든지 재판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조선사회가, 일본에 의해 이룩된 체제정비와 토지조사사업 같은 성과 없이도 어디선가 자생적인 농업 자본가가 출현하여 소농들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영농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인가.

어쨌든 이 같은 '내재적 근대화론'은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는 이미 영향력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미국의 팔레와 커밍스는 물론이고 에커트와 맥나마라 등 대부분의 권위 있는 한국학자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안병직, 이영훈, 전상인등 몇몇 양심 있는 학자들이 이 같은 꿰맞추기 식 연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교단과 학계에서는 주류 이론으로 남아 사랑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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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