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9] 타이완의 아버지 고토 신페이 박사 p258

20세기 초반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를 경험한 타이완 사람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의 일제시대를 겪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총독 통치를 받았지만 대만이 일제시대를 평가하는 시각은 한국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있다. 다음은 대만의 영자신문 타이완뉴스지 2001년 3월12일자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영어와 한자로 작성되어 있다.

<타이완이 경험한 일본통치의 가장 큰 특징을 한가지로 말한다면, 그것은 ‘근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 통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고스란히 남아 타이완의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물론 일본제국이 타이완에 근대화의 기초를 건설한 것이 기본적으로 당시 일본 국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약 타이완이 그와 같은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통치를 받은 하이난 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 주, 우리는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경험한 타이완의 근대화와 역사적인 발전, 또한 고토 신페이 박사가 어떻게 해서 타이완 산업발전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담강대학교 역사학과 임정용 교수의 논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타이완의 짧은 400년의 역사에는 5번의 통치자 변화가 있었다. 근대적인 정부조직은 17세기 초 화란 통치 때 처음 등장했고, 정성공과 그의 아들에 의한 시대가 있었으며, 청 왕조와 일본제국의 통치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중화민국의 통치가 있었다. 잦은 권력 변화로 인해 타이완 400년 역사의 각 시기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발전시켰다. 일제시대의 경우, 이 기간을 특징지어 한 단어로 간단히 설명한다면 그것은 '근대화'라고 할 것이다.

일본은 1895년 일어난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 지역을 획득했다. 그러나 최소한 1895년 6월부터 1898년 3월까지는 미개한 대만 땅은 일본 측의 표현을 빌자면 '건드리고 싶지도 않은' 대상이었다.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주민은 아직 문맹이었으며 문화수준도 대단히 낙후된 상태였다. 대만 주민의 문화와 생활상태는 일본과 매우 달랐다. 청나라가 통치한 212년의 기간동안 대만에서는 사회조직과 행정력이 확산되지 못한 탓에 미개한 풍습이 만연하여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위생환경이 깨끗하지 못해 각종 풍토병이 범람하고 있었다. 일본통치 초기 5년 간의 <대만일일신보>의 기사를 펼쳐보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기사를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대만을 경영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일본제국 의회에서는 대만매각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대만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에 이 지역을 1억 엔을 받고 팔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8년 3월 4대 총독 코다마 겐타로가 대만으로 부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코다마는 고토 신페이를 민정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의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대만의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생각은 <생물학적 식민지 경영>이라는 그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대만을 일본의 기준으로 통치하려하는 것은 도미의 눈을 넙치에 이식하는 것과 같은 무리한 일이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일본제국의 각종 제도를 대만에 직접 이식한다면 아직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대만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토 박사는 타이완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점진적 동화'라는 정책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대만통치의 기본정책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기나긴 논쟁, 즉 내지연장주의(동화정책), 특수통치주의(비동화정책) 사이의 논쟁이 비로소 종식되었다.

고토 신페이는 1898년 3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8년 동안을 대만의 민정장관으로 재임했다. 그는 위생환경을 정비하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가 창안한 통일화폐 시스템은 금융과 상업유통을 촉진시켰다. 그는 또한 각종 교통운수 시스템을 만들고 확장했다. 수력 및 화력 발전소를 만들어 대만 공업의 동력 기반을 정립하였다. 농업 부문에서는 품종개량 사업을 시작하여 대만의 쌀과 설탕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해야할 것은, 대만의 근대화 작업은 그 진행 속도에서 일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68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유신이 추구했던 목표는 식산흥업(殖産興業, 산업의 씨를 뿌리고 발전시킴)과 부국강병(富國强兵, 부유한 나라와 강한 군대)이었다. 그러나 1877년 이전 일본의 제국 정부는 끊임없이 무장봉기를 시도하는 국내 불만세력들을 진압하는 일로 인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의 근대화작업은 사실상 이 모든 군사적 충돌이 완전히 멈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895년에 일본은 대만을 새로운 영토로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 자체의 근대화 작업도 대만의 그것에 비추어 그리 일찍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주체적인 근대문명을 건설하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관리들은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들에서 대만은 일본의 중요한 시험무대가 되었다.

일본은 대만에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하고 인구센서스를 실시했다. 이는 그 뒤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와 임야조사, 그리고 대만의 전통관습에 대한 조사를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근대국가에 있어서 통계와 조사 사업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으로서, 특히 인구 센서스는 다른 모든 종류의 통계와 조사 작업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대만이 첫 인구센서스를 이미 1905년에 마무리한 데 비해 정작 일본은 1920년에 이르기까지 인구 센서스를 행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인구센서스라는 개념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식민지인 대만보다도 15년이나 지난 뒤에야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정치가들은 주민등록 사업과 인구 센서스의 차이를 알지 못한 탓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인구센서스에 예산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1905년 대만에서 첫 인구센서스가 이루어졌을 때에도 그 이름은 ‘제1차 대만 임시 호구조사’라는 명칭아래 진행되었다.

1915년에 또다시 인구센서스가 실행되었을 때에도 그 명칭은 ‘제2차 대만 임시 호구조사‘였다. 사실 ’인구센서스’는 정확히 말하면 ’국력에 관한 조사‘이다. 인구 센서스를 책임지고 있는 통계학자들이 인구조사라는 애매한 명칭보다는 국세國勢조사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까닭은 이 조사가 단순히 인구 숫자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과 경제, 계층 조사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나라들에게 그 나라의 총체적인 국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이유로 당시 구미 열상은 모두 정기적으로 인구 센서스를 실시해 그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이 문명국의 대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이 같은 점에 대한 통계학자들의 끊임없는 설득과 압력단체의 활동이 계속된 결과 일본의 정치가들은 1920년에 가서야 인구센서스에 예산을 배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만 역시 비로소 모든 조사 작업을 ‘국세國勢조사’라는 이름아래 추진할 수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에 있어서, 대만 총독부는 1895년 말 영국의 엔지니어인 버튼을 공중위생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해 대만의 공중위생환경을 정비하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1898년까지 타이난과 타이페이 등 2개 주요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이 완공되었고, 그 숫자는 1934년까지 83개로 늘어났다. 당시 대만의 상하수도 시설은 이미 일본의 주요 도시에 비해서도 앞선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통치는 대만경제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대만 점령 초기 일본제국 정부는 대만 총독부에 매년 700만 엔의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처음에는 이 같은 추세로 30년이 지나야 대만의 재정자립이 가능할 것으로 계산했었다. 그러나 역동적인 산업발전이 순조롭게 지속되고 정부 독점사업과 토지세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대만은 1905년에 이르러 재정자립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07년부터는 수입 초과금으로 제국 정부에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1935년 10월, 대만 총독은 일본 통치 아래 대만이 이룩한 근대화의 성과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만통치 40년 기념 대박람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그 독특함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공전무후의 박람회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박람회는 당시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를 비롯해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사실 일본통치 시절 대만이 성취한 ‘식민지근대화‘의 유산은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대만경제 발전에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일본제국이 타이완에 근대화 작업을 실시한 것이 당시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약 타이완이 그와 같은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통치를 받은 하이난 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을 것이다. (『타이완 뉴스지』 2001년 3월12일자 기사)



위의 기사를 보면, 대만의 역사학자들은 대만이 일본의 통치를 받은 것이 오늘날의 대만을 존재하게 한 가장 큰 이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고토 신페이 박사를 근대 대만의 아버지로 추앙하며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고토 신페이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이토를 망국의 원수쯤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위 글에서 중국의 하이난성과 대만을 비교한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하이난과 대만의 역사에는 일제시대 뿐 아니라 전후 서로 다른 체제를 선택했다는 차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대만을 통치한 국민당의 개발독재가 대만 경제발전에 미친 공헌보다도 일본통치 시대 마련된 식민지근대화의 유산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일제시대의 공헌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경제발전의 성공을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로 평가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대만은 20세기 초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1970년대 이후 무역에 중점을 두는 발전 전략을 택해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선진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지역이다. 하지만 대만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오늘날에도 자동차, 가전 등 많은 분야의 산업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산업구조에서는 자동차, 전자 산업에서부터 철강, 조선, 반도체, 석유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발전전략을 고집하고 있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 일본 상품에 비해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자동차, 가전, 철강 등 많은 산업을 포기하고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였으며, 문화면에서도 영화와 TV 드라마, 가요와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시장을 완전 개방하여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 대만 청소년들의 우상은 대부분 일본 연예인들이며 그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반면 한국은 전후 일본과 국교수립 과정에서부터 무리한 주장으로 일관해 15년이라는 기나긴 협상 끝에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그 댓가로 한국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받아냈고 일본의 산업구조를 그대로 모방해 '후발성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처럼 산업구조는 일본을 그대로 복제하면서도 오랫동안 수입선다변화 정책이라는 사실상 일본 상품만을 수입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해 모든 일본산 소비재를 수입금지해 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일본 문화에 대해 '왜색문화'라는 명목으로 수입을 금지하고 국민들에게 반일교육을 강요함으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강한 반일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대만과 한국은 공히 일본의 통치로 인해 무지몽매한 농업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일대 도약을 이룩했고 그 영향으로 인해 빠르게 선진공업국의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나라가 일본에 대해 이처럼 상반되는 태도와 국민감정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대만에는 일본의 통치를 받기 이전 이렇다할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던 데 반해 조선에는 비록 명,청의 속국이긴 했지만 500년간이나 존속되고 있던 왕조가 있었다. 그로 인해 개항 이후 합병에 이르기까지 외세와 야합한 집권세력의 정권유지 시도가 계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충돌과 부작용이 생겨났다.

그 외 두 번째 이유로는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의 기간이 조선에 비해 15년 길었다는 것, 세 번째로는 전후 장개석 군대가 대만을 점령하면서 수많은 대만인을 학살한 까닭에 대만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임진왜란)에 대한 기억 같은 것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거의 무조건적인 반일 감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집단심리 현상이며 연구대상이라 하겠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