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11] 우리는 왜 일본을 선택했나? p140

한국의 국사교과서에서 일제시대는 일종의 '사라진 역사'이다. 한국인들에게 조선 말기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한 일본은 세상에 다시없는 악마요 평화롭게 살아가던 우리민족을 침략해 착취하고 죽이고 괴롭힌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 시기에 대한 역사기술이라는 것은 대체로 개항 이후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의 조상들이 얼마나 피땀 흘려 싸웠는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 그리고 합병 이후 우리 민족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싸웠으며, 일본은 이런 독립운동가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하고 괴롭혔는가를 기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국 사회에서 반일 책동은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도그마가 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 극악했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비교해봤을 때 더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공산당은 싫어요~ 하고 외친 탓에 공비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던 이승복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울먹이며 노래를 불렀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하면서 끔찍한 가사로 채워진 6.25의 노래라는 것을 연습해야만 했다.

이 노래에서는 '파미레미미' 계명으로 빨리 변하는 '쫓고 또 쫓아' 부분이 가장 어려웠는데, 항상 틀리는 반 아이들 때문에 몇 시간씩 반복하면서 연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어린 시절 우리 세대는 언제나 북괴 공산당을 빨간색 늑대로 그리면서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면서 살아왔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6월이 되어도 아무도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북한괴뢰의 우두머리도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고 남한 TV를 즐겨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반공이데올로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렸지만 반일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여전하고, 최근에는 정부의 책동으로 인해 나날이 더 심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서점을 아무리 뒤져봐도 일제시대의 한국 사회를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은 책을 발견하기 어렵고 대신 독립운동사, 반일항쟁사, 친일파 연구, 반민특위 연구, 정신대 연구 같은 제목을 단 책들만 가득 꽂혀있을 뿐이다. 설령 일본이 그렇게 잘못했다손 치더라도 이건 굉장히 심각한 지식의 편중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대해서만은 모든 한국인들이 열렬한 파시스트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한반도에 살고 있던 민초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은 조선왕조를 이어받은 새로운 통치자일 뿐이다. 인간 이하의 생활조건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해야만 했던 백성들에게 조선 왕조는 사라져야만 할 존재였지만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은 변화에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조선의 애국자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근대화를 이룩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과 같은 처지에서 쇄국정책을 펴고 통상을 거부하던 일본은 미국의 강압으로 문호를 개방한 뒤 기적과 같이 발전하여 19세기 말이 되자 어느새 열강의 반열에 올라 서 있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패권을 두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 대신 이웃나라 일본이 조선의 지배자가 된 것은 우리 입장에서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시아를 침략해 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지만 이들이 떠난 뒤 인도와 동남아 지역에 남겨진 것은 여전히 가난한 식민지 농업경제 뿐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동안 서구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모든 지역이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식민 모국에 있어 식민지란 원료공급 기지와 공산품 판매시장으로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영원한 착취를 뜻한다.

반면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었다. 조선은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점령하고자 했던 전략적인 지역이었다. 일본에게 있어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전진방어 기지였으며,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많은 희생을 치르고 조선을 합병한 일본은 나중에라도 시간이 흘러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을 식민지가 아니라 새로이 확대된 일본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조선에서는 1910년대 일차적인 농업생산성 향상과 교육 및 사회제도 개선 사업이 완료되자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공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전쟁 말기에는 일본의 핵심적인 중화학공업시설들을 대부분 조선반도에 건설했던 것이다. 이 같은 조선의 공업화는 비록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지만 일본에게 있어 한반도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었는가를 잘 알려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이듬해부터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농업의 기반을 정비하고 소유권을 확정했는데,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국가와 문중 등 불특정한 공공 소유권이 농민과 지주들의 명의로 분명하게 귀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조선의 자작농들은 조사사업으로 인해 자기 토지의 주인이 되었고, 지주들도 더 이상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필요 없이 자신의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채 지배층의 노예로만 살아왔던 농민들에게는 새 세상이 열린 것과 같은 일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은 사실상 갑오개혁 당시 미루어졌던 토지분배 조치가 뒤늦게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 조선 사회에도 비로소 본격적인 문명개화의 시대가 열렸다. 수많은 학교가 건설되고 경찰서와 법원, 행정기관이 만들어져 시민들은 법의 통치와 서비스를 동시에 받게 되었으며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하여 조선은 본격적인 산업혁명기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민중들은 가난한 대한제국의 백성에서 일본제국의 시민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으며 이 같은 변화는 여러모로 조선 민중들에게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비록 식민통치 말기에는 일본이 총력을 기울인 전쟁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많은 고통을 당해야만 했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기간이 조선의 실질적인 산업혁명기였으며 조선의 민중들은 문명개화라는 사상초유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시절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의 일부였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조선 왕조에 대해 심정적인 귀속감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를 평가할 때에는 조선 왕조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은둔의 왕국이었던 조선은 500년 간 외부 세계와는 담을 쌓은 채 편협한 유교사상에 몰두해 존속해오다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연스레 새로운 세력에게 통치자의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보다 나은 통치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 발전이고 조선 민중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한국은 이 시대를 일본통치에 저항했던 사람들 위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들은 어떤 면으로 보아도 일제시대 한반도의 주류 그룹이라 할 수 없다. 합병 이전 일본에 항거했던 세력은 아직 유교이념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려 했던 '관성그룹'이다. 한 사회의 혁명기를 평가할 때, 우리는 이 같은 집단을 반동 세력 혹은 앙시앙 레짐이라 부른다. 18세기 말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왕조 시대를 청산했던 것이나, 일본이 유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심한 내전을 겪은 것처럼 어느 국가에서나 큰 변화가 일어날 때에는 이 같은 관성그룹의 반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시민혁명은 끊임없이 거듭되는 반동세력의 도전을 쳐부수는 과정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1910년 8월 23일 한일합병의 체결 사실이 대내외에 알려졌을 때 일본 언론들은 이번 병합이 조선반도에 문명의 선물을 가져다주고 평화를 보장해줄 것이기에 한국인들을 위해 행복한 일이라고 논평하였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한국병합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한국민의 행복을 위해 잘 된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미국 언론들도 일제히 향후 한국인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라며 축하의 뜻을 전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도 지지의 뜻을 표명했으며, 유일하게 한일합병에 비난 성명을 발표한 나라는 망하기 일보직전인 청나라뿐이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한일 합병이 이루어진 다음해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실제로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감안했을 때 일본이라는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한 것은 조선인민들의 삶의 질을 신속하게 개선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한때 독립협회의 지도자로서 강력하게 자주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완용이 결국 한일합병을 주도하게 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인식하고 애국의 결단을 내렸던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후 조선반도의 통치권을 인수한 일본은 지금 기준으로 볼 때에는 다소 무리한 인권유린의 사례가 없다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대단히 예의바르고 인본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대량학살

인디오의 인구 감소

일제시대는 세계 전역에서 제국주의에 의한 잔혹한 식민지 탄압과 착취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이전 북미 지역에만 인디언 2천만이 평화스럽게 살고 있었고, 중남미 지역에도 아즈텍 3천만, 잉카 2천만, 마야 2천만 등 많은 원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빙하시대 베링 해협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이주해간 황인종들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들과 함께 들어온 감기(인플루엔자), 천연두, 홍역 등 다양한 바이러스로 인해 중남미 지역의 원주민은 대부분 사망하고 말았다. 북미지역의 원주민들도 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대량학살로 점차 숫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겨우 50만 정도의 인디언이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영국의 잔학했던 인도 통치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자행되었던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착취와 학살, 그리고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흑인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 대만과 조선에 대한 일본 통치는 대단히 신사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일제시대 기간 조선에서는 1919년의 독립운동과 광주학생운동 이외에는 이렇다할 반일 소요가 일어난 적이 없었고 대만인들도 일본의 통치에 만족하면서 잘 협조하였다. 3.1운동만 보아도 국내 교과서에서는 당시 일본군의 진압을 과장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긴 했지만 일본 경찰은 단지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는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으며, 폭동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훈방과 가벼운 벌금형으로 마무리했다. 전국적인 소요사태의 와중에서 약간의 인명피해가 생기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경찰은 만세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평화적으로 대처했으며 시위대에 의한 파괴와 살인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무력을 행사해 진압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3.1운동에 대한 한국 측의 역사기술에는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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