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민왕후

흔히 민비로 불린다. 본관은 여흥. 1866년에 고종의 왕후가 되었다. 1874년 고종의 친정 이후 척족 민씨 일문의 집권에 중추로서 역할하였다. 임오군란 후 잠시 실권하였다가 청의 지원으로 재집권하였다. 청일전쟁 후 친러정책을 추구하다가 1895년 10월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자객들에게 건청궁에서 시해되었다.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1894년 8월 7일 윤치호는 영문 일기에서 민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의 집권기에 걸쳐 그녀의 신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다.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야' 였다. 세 사람은 왕과 왕후와 왕자였다. 이 지독한 이기주의는 그에 마땅한 파멸을 몰고 왔다."
(p.34)

(임오군란으로 인해) 집권세력인 민황후는 시골로 피신했으며, 흥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였다.
(p.35)

갑신정변에 대한 상반된 평가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1950년대 북한의 역사학은 갑신정변을 봉건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 반면에 오늘날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는 갑신정변을 일본에 의존하여 경거망동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인적 역량만 잃어버렸으며,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기만 부추겼다고 낮게 평가하고 있다. 갑신정변을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하는 것은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서양사에 기계적으로 끼워 맞추려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갑신정변을 저평가하면서 그 주역들에게 식민지화의 책임까지 묻는 것은 1880년대 당시 한국을 반식민지 처지로 내몬 것이 일본이 아니라 청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갑신정변은 개혁을 지지하는 사회적 기반이 취약했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성급한 시도였다. 또한, 일본의 도움을 기대했다는 점에서 정변 주역들의 국제정세 판단이 미숙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한 이후 청일전쟁에 이르는 10년간 조선왕조가 청의 강한 간섭과 통제 하에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황금같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왜 그토록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하면서 성급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청은 일본에 패배하였다. 이 사실은 청의 힘에 의지하여 독립을 유지하려는 조선왕조의 민씨 척족정권도 아울러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갑신정변을 좌절시킨 민씨 척족정권에 자주적 근대화를 기대하는 것은 갑신정변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갑신정변의 개혁 정책은 이후 갑오경장과 독립협회로 이어졌다. 비록 실패했지만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근대화를 추구했던 선각자들로 적극 평가되어야 한다.
(p.40)

동학농민봉기

동학군의 봉기를 ‘농민혁명’이나 ‘농민전쟁’이라 하여 국가체제의 급진적 변혁을 모색한 운동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동학농민봉기’라는 호칭이 농민군의 정신적 배경, 사회적 계층, 저항의 양태를 나타내는 데 가장 적합하다
(p.44)

청일전쟁

청의 패배로 1895년 4월에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關)강화조약은 한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자주국' 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청에 대한 조공과 사대 관계를 폐지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로써 한국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 점에서 청일전쟁은 개항 이후에도 청이 유지하고자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인 조공체제를 최종적으로 해체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의 '독립자주'는 청에 대해서만 의미를 가졌다. 청일전쟁 이후 한국은 청을 대신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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