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 근대의 세계 (국사 교과서 p95)

16 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즉, 절대 왕정, 시민 혁명,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유럽 세계가 확립되었다.

지방 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추구하는 절대 왕정 국가가 성립하였다. 절대 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였고, 이를 위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식민지 획득에 힘썼다.

절대 왕정에 뒤이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은 근대 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민 혁명은 17 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에서 시작하여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근대 시민 계급이 중심이 되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봉건 세력으로부터 시민에게 넘긴 일련의 정치 변혁으로서,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것이었다.

산업 혁명은 18 세기에 자본, 노동력, 자원, 해외 시장을 갖춘 영국에서 시작하여 19 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확립시켰다.

한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 과학이 발달하였다.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였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해졌다. 또,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속적인 인간 중심의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서양의 근대화는 상대적으로 동양 사회에 위협을 주었다. 산업 혁명이 확산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국력을 증강시킨 서양의 열강은 후진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에 비하여, 그 동안 번영을 자랑하던 청을 비롯한 아시아의 전통 왕조들은 내부적인 취약성으로 인하여 점차 쇠약해져 새로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서양 열강의 아시아 침략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위협으로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어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서양 열강에 마침내 복속되어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2- 세도 정치의 폐단 (국사 교과서 p102)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3 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 왕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널리 퍼지고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다. 이에 농민의 광범위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19 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가지고 조세를 거두도록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더구나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읽기자료 〈목민심서〉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 처와 자식에게“요즘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 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하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

-3- 사회 불안의 심화 (국사 교과서 p225-227)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지만, 일반 서민 중에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양반이 되면 군역을 면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으며,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해 부를 축적하는 데 각종 편의를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은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에게 관직을 팔았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맡아 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지고,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은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탐관오리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 되었다. 특히, 19 세기에 들어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농민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 사이에는 비기, 도참설이 널리 퍼지고, 서양의 이양선까지 연해에 출몰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갔다.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 감에 따라 각처에서는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화적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을 공격하였고, 수적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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