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1]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다 p159

일찍이 위대한 마르크스는 인류역사가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 왔으며, 그 이후에는 과도기인 사회주의 사회를 거쳐 모든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 모든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은 생산력의 발전이며, 이는 사회의 토대(하부경제구조)와 상부구조(정치와 문화)가 상호 변화 적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봉건사회의 전통을 지닌 유럽과 일본은 순조롭게 자본주의로 이행, 산업혁명과 급속한 생산력의 발전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산구조에 맞는 정치 사회구조가 도입되어 근대시민사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의 발전조차 이룩하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이들 지역은 자본주의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왜곡된 사회발전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제3세계 지역의 정체성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마련해 설명해보고자 시도했으나 그 원인을 뚜렷하게 밝혀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제3세계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 문제의식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봉건사회의 전통을 경험하지 못했던 대만과 조선도 기타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이들 지역은 일본의 통치로 말미암아 시민혁명을 이룩하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찍이 20세기 초반 조선과 일본 사회의 발전 수준에 있어서 커다란 격차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선의 문명개화를 선도하는 산파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일본에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처음 주장한 것은 후쿠다(福田德三)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의 경제학을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인 경제학자로서, 19세기 말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04년 [대한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 라는 논문을 발표, 최초로 조선 사회의 정체성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근대적인 경제사학의 방법론으로 조선의 경제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후쿠다는 재화의 교환 유통에 입각하여 경제가 발전해 가는 단계를 자족경제, 도부경제, 국민경제의 3 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는 자족경제를 봉건제도가 출현하기 이전의 시기로, 도부경제는 봉건제도에 대응하는 시기로, 그리고 국민경제는 근대국가에 대응하는 시기로 보았다. 그의 연구는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 상태가 아무런 도부경제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자족경제의 단계에 속해 있으며, 봉건제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변태적인 양태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단계는 일본의 9세기말에서 12세기 초에 해당하고 유럽과 비교해도 9세기 초에서 12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 상태가 일본과 유럽에 비해 천년 이상 뒤떨어져 있다는 결론이며, 근대국가의 국민경제가 형성될 수 있는 불가결의 선행 필수조건이 바로 봉건제도이므로 조선은 자본주의는커녕 봉건제도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후쿠다의 이론을 정체성이론, 혹은 봉건제 결여론이라 한다. 바로 이웃해 교류하던 두 나라의 경제발전이 천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주장은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것이긴 하나 일본이 오랜 세월동안 외부세계와 거의 교류 없이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하다. 어쨌건 후쿠다의 연구는 당시의 학문 수준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고 참신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정체된 조선의 경제가 근대화를 이루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나라는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이웃하고 있는 외부의 존재는 곧 러시아와 일본인데, 러시아의 경우 조선과 마찬가지로 경제가 저급하여 그 협력으로 발전의 전기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조선의 발전은 일본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즉,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일본에 동화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자본주의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봉건제도란 무엇인가. 봉건제도란 일종의 정치적 사회적 현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이 토지의 소유관계를 중심으로 결정되는 제도로서, 이 같은 질서에서는 개인의 재산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이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세습된다. 또한 봉건사회의 정치권력은 봉토라는 이름의 영지를 부하에게 나누어줌으로서 생겨나는 충성과 군신관계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사회, 정치제도는 중세유럽에서 번영하였는데, 가령 프랑스에서는 12세기 무렵에 그 정점에 달했다. 유럽 이외에 이와 유사한 사회 정치적 제도가 일찌기 존재했던 다른 지역은 전 세계에서 일본뿐이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 즉 오닌의 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한 시기까지 일본의 봉건제도는 전성기 유럽 봉건제도와 아주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에도 막부시대에 들어오게 되면서 일본의 봉건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안정되고 고도로 조직화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는 지형상 고립된 일본의 독특한 산물이다. 유럽에는 지역에 따라 이 같은 중앙집권적 봉건제도가 출현하지 않았거나 출현했더라도 매우 짧은 기간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유럽은 일본의 경우보다 더 격렬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유럽의 후기 봉건제도는 재빨리 일본식 통일봉건제도의 단계를 거쳐 더욱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봉건제도는 인류 역사상 전 세계의 두 지역에서만 나타났던 매우 드문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과 유럽에만 봉건제도가 생겼는가. 일본의 학설에 의하면, 봉건제도는 이질적인 사회 정치적 요소가 특수한 형태로 서로 융합한 것이라고 한다. 즉 봉건제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마다 토지와 조세에 관한 강력하고 발달된 법령 체계와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존재해야 하고, 이를 보다 큰 범위에서 통합할 수 있는 중앙집권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한두 가지라도 부족하거나 너무 강하게 되면 그 사회는 원시적인 부족사회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왕이 모든 권력을 가지는 전제왕조의 형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봉건제도가 희귀했던 것은 이 '균형상태'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지역을 포괄하는 발전된 법과 정치조직은 중세유럽의 경우 독일의 부족국가 전사단에서 시작되었고 일본은 고대 씨족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육조시대의 중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사회가 발달하여 봉건제도에의 계기가 되었으나 끝내 성숙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런 경우는 이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이라는 두 요소 사이에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중국은 중앙 정부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경우이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부족국가의 경향이 압도적으로 강해 중앙정부가 발전하지 못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 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고대 씨족사회나 부족사회 가운데 한두 개가 강성해지거나 연합하여 주변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봉건사회의 단계 없이 곧바로 대규모의 전제왕조로 발전하였다.

그렇다면 봉건제도는 왜 근대화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는가.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났던 전제제도에 비하면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각 경제주체들의 법률적인 의무와 권리가 중시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근대의 법치주의라는 개념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의 발달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봉건영주는 정복이나 영토의 확장보다는 토지의 소유와 토지세의 징수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영주의 통치를 받는 상인과 제조업자는 전제 국가에 속한 것보다 더 폭넓은 활동범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앞서 기술한 법률관계의 발달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그 결과 근대적인 형태의 상업사회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봉건 사회에서 경제 주체들에 주어진 활동의 자유는 실용적인 윤리관을 길러주었고 분권과 자치라는 정치제도는 지도자에게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활발하고 진취적인 도전정신과 기업가 정신이 생겨났는데, 이는 근대유럽과 일본의 큰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한국(대한제국)에 있어서 경제단위의 발전은 자발적인 것일 수는 없고, 전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전래적이란 어떤 발전된 경제조직을 갖는 다른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토지를 개척 경작하여 서서히 이를 자본화할 수 있게끔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 년 간 교통을 해온 결과 얻어낸 양해와 동정으로써 한인을 사역함에 익숙하고, 또 한인의 토지를 사실상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사경영을 시도하였으며, 더구나 그 생산품인 쌀과 콩(대두)에 대하여 최대의 고객인 우리 일본인은 이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자가 아닌가!

하물며 그 봉건적 교육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완전한 것 중의 하나에 속하며, 토지에 대해서는 가장 집중적인 농업자요, 인간에 대해서는 한인에게 가장 결핍된 용감한 무사적 정신의 대표자인 우리들 일본 민족은, 아무런 봉건적 교육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단위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그 부패쇠망의 극치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저에서 소멸시켜 자기에 동화시킬 자연적 명운과 의무를 갖는 유력우수한 문화의 중대한 사명에 임하는 자가 아닐까!



후쿠다가 이 논문을 발표한 당시는 이미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어느 정도 일본을 미화하고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성과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기본적인 사실은 부인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후쿠다의 정체성 이론은 흑정암, 삼곡, 사방박등 주로 일본의 다른 경제사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후쿠다의 사상을 이어받아 조선은 발전하기 힘든 정체된 사회였다고 규정하고, 조선이 근대화된 것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해서였다고 갈파하였다. 사방박은 세계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성립하는 방법은 그 첫째가 자기 사회의 진통을 통해서 이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히 외래 자본주의의 자극에 강요되어 부득이하게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인데, 전자는 서구와 일본의 경우이고 한국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하였다.

사방박(四方博)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자본주의화는 일본의 자본과 일본인의 기술능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개항 당시 조선에는 아무런 자생적인 자본의 축적도 없었고 기업 정신도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형성을 희망하는 사정과 그것을 필연케 하는 조건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개항 이후 활발한 조선 진출을 통해 자본주의 질서를 전파해 주었으며 합병 이후에도 근대적인 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학교와 각종 시설을 건설하여 조선사회의 근대화, 문명화를 주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종전 후 북한을 중심으로 정체성 이론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뒤이어 남한의 학계에서도 같은 연구가 이루어져 점차 남북한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자생적 근대화 이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이 같은 이론은 기실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저열한 억지주장들로서,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는 무리한 시도'라고 평가되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선구는 역사학계였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최병무, 김석형, 홍희유 등이 조선조 후기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나 요소가 자생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맑스의 이른바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한반도의 역사도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제사회로, 그리고 봉건제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로 각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왔음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 사학계에서는 맹아론 연구가 급속히 소멸하게 되는데, 이는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한 독재체제가 완비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역사관이 대두하면서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에서 중단한 연구를 남한의 학자들이 계속 이어나가면서 자생적 근대화이론을 발전시켰다. 남한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따르면,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러 조선 사회에서도 농업 수공업 상업 신분제의 측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맹아)이었으며 일본의 침략은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던 근대화의 싹을 잘라버리고 산업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왜곡된 사회구조를 이식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이 없이도 조선에서 스스로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 산업혁명이 발생했을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스스로 근대화를 시작한 기점이 어디인가를 찾기 위해 18세기 후반, 19세기 중엽, 개항기, 갑오개혁기로 나누어 수색작업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가 되자 이 네 가지 가운데 18세기 후반 기점론은 폐기한 뒤 1860년대 설, 개항설, 갑오개혁기 설로 구분해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1860년은 고종이 즉위해 대원군의 통치가 시작된 해이다. 따라서 1860년대 기점설은 이 때에 이르러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이에 맞서 반침략, 반제국주의 운동이 시작되어 조선의 민족주체 형성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1876년 개항설은 개항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세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종속됨으로써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 이론은 한국 중세사회의 내재적 발전의 성과로서 근대의 기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이라는 타율적 계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즉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민족정기를 세우고 반일책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맹아론의 목적에는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갑오개혁기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비로소 근대적인 제도와 사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중세적 국가가 근대적인 국가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자본주의 맹아 이론과 기점 수색작업은 한국 역사학자들의 수준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실로 한심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맹아라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만한 좋은 일이겠지만, 이들은 '있어야만 하며 반드시 있을 것이다'는 신념 아래 결과를 먼저 설정해놓고 거기에 역사를 꿰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과연 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이처럼 한심하고도 허무맹랑한 이론이 한국에서는 어느새 정론으로 자리잡아 아직도 일선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으며 일본의 침략성을 비난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도 이들로서는 버릴 수 없는 이론인 것이, 만약에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항일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는 '민족정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때문인 것이다. 답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4지선다형에서 지금은 3지선다형으로 줄어든 맹아 수색작업에 성과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최근 신용하 강만길 등 현대 한국의 관변학자들은 자생적 근대화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제 식민지배 정책의 기본이 민족 자본가의 성장을 막고 민족자본의 축적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만길에 따르면 가령 토지정책의 경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문호개방 이후 성장해 오고 있던 자작농 상층부를 제거하고 농민의 대부분을 영세소작인으로 만드는 한편 친일 지주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한국에서는 농업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로 그것이 저지되고 오히려 지주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할말을 잃게 된다. 그런 식이라면 1910년대는 (스스로 발전했을 경우) 중화학공업이 발달해야 마땅한 시기라든가, 첨단 우주산업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는데 일본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과연 토지대장 같은 것 하나 정비되어 있지도 않았고 등기제도라든지 재판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조선사회가, 일본에 의해 이룩된 체제정비와 토지조사사업 같은 성과 없이도 어디선가 자생적인 농업 자본가가 출현하여 소농들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영농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인가.

어쨌든 이 같은 '내재적 근대화론'은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는 이미 영향력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미국의 팔레와 커밍스는 물론이고 에커트와 맥나마라 등 대부분의 권위 있는 한국학자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안병직, 이영훈, 전상인등 몇몇 양심 있는 학자들이 이 같은 꿰맞추기 식 연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교단과 학계에서는 주류 이론으로 남아 사랑 받고 있는 것이다.

[2-2] 조선총독부는 강도였나 p169

한국에서 출판된 각종 교과서와 공무원 시험서, 교재, 역사서적 등에 묘사된 토지조사사업 항목을 보면 한국 사회가 일제시대에 대해 얼마나 악의적인 사실왜곡을 일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한일합병 직후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 공무원 시험서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토지 조사 사업>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의 확립을 구실로 하여 펼친 대대적인 조사 사업으로서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하여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개편한 사업이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들은 당연히 그들의 소유가 되어야 할 농토를 빼앗겼고, 門中 소유 또는 촌락 공유의 토지는 총독부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여러 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결과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논밭과 임야가 총독부의 소유로 나타났다.

1. 일제의 실시명분: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 확립
2. 실제목적: 토지약탈
3. 방법: 기한부신고제
4. 결과: 1)전 농토의 40%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어 일본인에게 불하됨 2)우리 농민은 소유권이나 영구 경작권을 잃고 기한부 계약의 소작농으로 전락, 생계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함

다른 종류의 책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묘사를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첫째, 조선총독부가 조사사업을 통해 전 국토의 40%, 혹은 어떤 책에서는 50%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조선인민으로부터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 조사사업의 결과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해 삶의 터전을 잃고 거지처럼 국내외 각지를 떠돌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는 조사사업을 둘러싼 이 두 가지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하나씩 논의해 보기로 한다.

그 이전에 2002년부터 새로이 도입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조사사업에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2002년판 국정교과서는 일제시대에 대해 ‘약간’ 진전되어 조사사업에 있어서 문제의 ‘40%’라는 숫자를 삭제하였다. 이는 과거 교과서의 어처구니없는 조작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의 왜곡과 조작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국권 피탈 후 일제는 우리 경제를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拓植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國史, p360)

지난 2001년 5월 한국 정부는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바다를 넘는다’거나 ‘조선반도에 진출했다’라는 사소한 용어 사용까지도 일일이 트집을 잡아 35개항의 수정을 요구한 바 있는데, 만약 일본 정부에서 마찬가지 수준으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대응한다면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만 35개항 정도는 충분히 수정 요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 1945년까지 70년 동안 일본에 관련된 기술이 통째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필자가 일본 외무성의 교과서 왜곡문제 담당자라 하더라도 특정 부분을 지적해 수정을 요구할 엄두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온몸이 망가져 어느 특정 부위를 손보는 것으로는 소생하기 힘든 환자와 마찬가지 상태라고 생각된다.

토지조사사업은 통치 초기 대표적인 치적이라 할만한 총독부의 업적이다. 그런데도 그 역사적인 의미와 공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마치 일제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즉 한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은 善意로 실시된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기본적으로 ‘총독부는 강도’라는 조잡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문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1. 일제는 과연 조선의 토지를 강탈했는가 ]
한일합병 이후 8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던 토지일제조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 기본조사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성공함으로 인해 비로소 토지 소유권이 법의 보호를 받아 현대적인 소유권 제도가 정착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자유로운 토지매매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즉 조사사업은 미개한 조선에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이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으며, 이 사업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은 비로소 원시적인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를 착취구조로 보는 사람에게는 양반계급의 착취나 原始資本主義에서 기업영농을 하는 지주의 착취나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는 자본주의는 보다 발달된 착취구조로서 인민에게 보다 나은 삶을 가져다준 경제질서라고 말하고 싶다. 封建사회조차도 경험하지 못한 미개한 조선경제를 단기간에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전환시킨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 헌신적이고 체계적인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성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토지에 관한 한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였다. 조선에서 모든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소유였으며 민간의 토지 소유는 사실상 국가에 의한 임대권으로만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수 백년 동안 전국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워낙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고 복잡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토지조사를 ‘量田사업’이라 불렀는데, 이는 토지의 성격과 위치 등을 측량해 서류에 기록하는 사업이었다. 이는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부정확한 작업이었으며, 그나마 전국 규모의 양전은 1719년(肅宗45)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200년 동안 중단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조선의 토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소유자 사망, 이주, 개간, 산불 등으로 토지의 성격과 소유자(경작자)가 바뀌었음에도 정부는 실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전국규모의 양전사업(光武量田)을 시작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이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이등박문이 이끄는 통감부는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재정혁신과 일제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고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즉,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한국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 광무양전으로 시작된 자주적인 조사사업을 저지한 뒤 이를 총독부가 토지 강탈사업으로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광무양전을 계승해 훨씬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사업으로 대체한 것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이씨왕조를 대신해 대한제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조선총독부는 대단히 미개하고 저개발 상태인 조선 경제 전반에 대해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재정혁신과 안정적인 세금징수를 위해 토지와 인구, 산업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모든 현대국가에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일본은 이미 1895년 일본영토로 편입된 대만에서도 같은 성격의 國勢調査를 실시한 적이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정확한 위치와 성격, 소유관계가 정확히 밝혀져야만 그에 기반해서 정책이 수립되고 세금을 거둘 수가 있으며 또한 매매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 현대화의 초석을 닦은 이 거대한 사업에 대해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인 연구서가 출판된 바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각종 제도 정비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했고 8년이나 걸려 시행한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이 ‘사업’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199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조선토지조사사업>은 564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서로서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지계사업 (光武量田地契事業)과 이를 계승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체계적으로 연구분석한 최초의 실증적인 연구성과이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 - 金鴻植 미야지마宮嶋博史 李榮薰 朴錫斗 趙錫坤 金載昊 등은 일제 식민통치 시기에 대해 기존 경제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참신한 시각을 지닌 그룹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업의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사업‘을 둘러싼 기존 학설에서 극복되어야 할 세가지 신화로서 ① 일제가 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를 강탈해갔다는 이론, ② 일제시대 조선의 사회구성체는 植民地半封建사회였다는 이론, ③ 광무양전이 근대적 토지개혁이었다는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가운데 저자들이 특히 일제의 토지강탈 신화에 대해 중점적으로 비판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고 자부한다.

지난 1990년대 대우그룹은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적 출판을 지원하기위해 대우재단 주도로 대우학술총서 사업을 전개했는데, 이 책도 그 총서 시리즈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최근 석연 찮은 이유로 절판된 상태인데, 아마도 저자들의 용 기있는 주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출판계 및 학계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여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서로 인해 그간 반일 책동의 주된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일제의 토지 강탈이론은 비로소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강조된 저자들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업'의 과정에서 토지의 강탈은 없었다. 사업의 과정에서 국유지(토지) 약탈은 전혀 없었고(이영훈, 539면), ꡐ사업ꡑ 기간에 쌀값(米價)이 4배나 올라 농민의 입장에서 지세의 실질부담은 오히려 절반 정도로 줄었다. 박문규(朴文圭)이래 인정식(印貞植) 이재무(李在茂)신용하(愼鏞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토지 강탈에 대한 억측이 확산되어온 것은 조선민족의 집단 심성구조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김홍식, 22면).

조사사업이 시작되기 이전 조선에는 소유관계가 불분명한 토지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사업’을 영구병합의 꿈을 가진 침입자가 조선의 말단모리배와 결탁해 벌인 한탕의 토지사기극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봉착한 총체적 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소화시키는 무책임한 작태이다(김홍식, 31~33면). 또한 토지 경계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지 처리에서 민족별 편기(偏奇)도 없었고 총독부는 전반적으로 민유처분에 관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이영훈, 조석곤)

둘째, '사업'은 근대적 개혁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조선 총독부는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사적 소유를 근대적 규정에 따라 법인화하고 증명제도를 구비하여 근대적 소유제도 및 지세제도를 확립했다. ‘사업’은 토지의 경계와 성격을 파악하고 규정하는 측면에서는 이미 이같은 조사가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무양전과 계승관계에 있지만, 소유자 파악의 측면에서는 광무양전이 불철저했고 ꡐ사업ꡑ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미야지마조석곤이영훈).

셋째, 농촌주민 또는 일반인민은 '사업'의 성과를 환영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국 농민들은 대체로 즐거워하고 협조를 제공하는 분위기였으며, 8년에 걸친 사업기간 동안 농촌 주민이 이에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건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조사사업을 위해 ‘임시토지조사국’이라는 기관을 설치 운영했는데,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 저자들은 이같은 강력한 관료집단이야말로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본질적 구성요소였을 것이라고 하며 총독부 관료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료들은 100년이 지난 현대 한국의 공무원들보다도 훌륭한, 수준 높고 청렴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신고주의는 효율적인 사업방식이었다. 특히 조사사업과 관련해서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관변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신고주의에 대해서 저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미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와 관행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어서 신고주의는 그에 조응한 효율적인 소유자 파악방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씨가(柳氏家) 사례를 보면 신고주의에 대한 대응도 대한제국기의 양전이나 과세지 조사 때와 크게 달랐다(박석두).

즉 조사사업에서 먼저 일정한 기간동안 정해진 양식에 따라 토지의 물목과 소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뒤, 분쟁이 발생한 토지에 대해서만 총독부가 개입해 소유자를 확정해주는 방식은 일제가 조선 인민의 무지를 악용해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이에 대해 조선인민들은 자발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기술하고 있는 바,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라는 기술이 역사에 대한 악의적인 조작 왜곡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그 자체로 총독부의 통치를 모독하고 국민에게 반일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흉기’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토지신고 과정에서는 불법적인 소유권 이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교과서와 일부 역사서에서 주장하는 바 50%가 넘는 식민지 국가의 광대한 국유지가 창출되었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조선을 영구 병합한 일본은 한국에서 한 탕의 토지사기극을 연출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동일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조선에 이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하여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 수취관계가 사라지고 대신하여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새로운 수취관계가 발생했으며,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됨으로 인해 비로소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김홍식, 같은 책)

우선 국정교과서에 의하면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결과 “조선총독부는 조선 땅의 40%를 차지한 최대 지주가 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40%라는 정체불명의 수치가 나타난 배경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업결과 창출된 국유지는 전체 대상면적 490만여 정보의 2.6%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된 사실을 떠나서, 왜 이 사업이 한국근대화와 연관되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첫째, 토지소유와 관련된 신분적 제약은 없었지만, 국가의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잔존하고 있었다. 둘째, 또한 토지로부터의 수익이 소유자에게 전유되기 위해서는 토지생산성이 안정화된다는 조건 하에서 토지의 수익에 대한 여러 형태의 자의적인 수탈이 철폐되어야 한다. 조선후기 생산력의 발전은 집약적 소농경영의 자립화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국가의 수취체제는 자의적 운영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근대적 토지소유는 성립될 수 있다. 국가적 규정의 철폐는 결국 국-민유의 구분을 포함한 소유권 사정과 소유권 공시제도의 완비에 의해서, 토지에 대한 자의적 수취는 수익지가에 근거한 비례세제의 도입으로 해소될 수 있다. 필자가 ‘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는 것은 이제 ‘사업’을 계기로 자본관계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인 수취관계를 대신하여 자본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수취관계로 나타났다. 이는 ‘사업’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수취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뿐 일부 독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미화론’과는 전혀 무관하다. (같은 책)

이처럼 토지조사사업은 1894년 경복궁 쿠데타 이후 일본의 주도 아래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조선 維新사업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사업이 마무리됨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근대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인 정비가 완료되어 순조롭게 자본주의 경제로 이전하게 된다. 1910년대 일본의 조선 통치는 주로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방대한 토지조사사업과 농업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짐으로서 1920년대의 산미증식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고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2. 조사사업으로 인해 농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이가 되었는가 ]
일제시대 초기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전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어떻게 정립되고 운용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세조 시절 정립된 과전법을 기초로 운영되었다.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였으며 민간인의 토지 소유는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동안에는 민간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나라는 곧 땅과 백성이며 이는 모두 왕의 소유로 여겨졌다. 토지의 소유권과 매매에 대한 개념과 관행이 정착된 것은 조선 말기였다.

조선 사회에서 왕의 대리인인 관료와 지방수령들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생산된 모든 토지수확물에 대해 일정한 세금을 거둬 중앙으로 보냈다. 이 가운데 科田에 대해서만은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과전의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생산물에 대해 농민에게 일정량의 조세를 거둘 수 있었고, 또한 소유권을 매매할 수도 있었다. 과전은 관료에게 지급되는 땅이며, 급료로서의 성격을 가진 토지를 말한다. 이처럼 과전으로 인해 소유권이 민간에게 이양되어 국가의 租(토지에 붙는 세금)를 면제받은 토지를 私田이라 하였다. 즉 과전 체제란 국가가 관료에게 급여 대신 토지의 수조권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전은 세습이 금지되었고 경기 지방에 한정되었는데, 이는 과전(사전)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국가의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 토지제도가 바로 조선사회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근간을 이루었다. 조선이 서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봉건사회였다면 경기 지방은 왕이 직접 세금을 거둬들이는 영토였을 것이고,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신하들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에 일정한 봉토를 부여받아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권과 조세징수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중세 조선이나 중국 같은 절대왕조 사회가 봉건사회에 비해 경제발전에서 뒤쳐진 것은 지나친 중앙집권이 관료들의 부패를 가져오고 그 결과 토지의 생산성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농민은 경작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작권이란 조를 납부하고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국가는 모든 토지에 대해 收租權(세금을 받는 권리)을 보유하고 있었고, 농민은 경작권만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은 조를 제외한 생산물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었고, 경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매매할 수도 있었다. 즉 조선시대에 토지의 매매란 경작권을 매매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토지를 매수한 경우에도 매수자가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노비를 통해 경작하거나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 소작농은 생산물의 절반 정도를 지주에게 납부하였다. 즉 조선시대의 농민은 자신이 경작권을 가진 땅에 대해서는 국가에 조를 납부하였으며, 타인의 땅을 소작하는 경우에는 소작농이 지주에게 세를 납부하고 지주는 여기에서 국가에 조를 납부한 뒤 나머지를 자신의 소유로 하였다.

조선의 토지 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우선순위는 안정적인 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조는 왕실 재정과 국가를 유지하는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과전이 늘어나 조가 줄어들자 이를 폐지하고 국가가 관리들에게 직접 녹봉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조세의 납부자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 때 토지를 측량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양전이라 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문서를 양안이라 불렀다.

양안에는 토지의 등급, 지형, 위치, 결수, 수조권자와 소유자(경작권자)를 표시하였다. 전국 규모의 양전 사업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를 통틀어 단 4회만 이루어졌으며, 그나마도 이 가운데 3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란으로 인해 많은 문서와 토지대장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이처럼 힘들었기 때문에 대개는 일정 지역에 한해 간헐적인 양전 사업이 진행되었다. 어쨌거나 그 규모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양전은 힘든 사업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토지의 소유권(경작권) 변동을 막기 위해 농민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였고, 과전의 소유자가 죽거나 토지가 황폐화되어 수확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를 국가 소유로 회수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경작권에 대해서는 농민들이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강력히 보호해줬기 때문에 누구도 농민의 경작지를 마음대로 빼앗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토지 매매는 이루어졌으며, 경작권을 소유한 개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토지를 매매하였다. 그러나 수백 년에 한번씩 이루어지는 양전 사업으로는 이같은 소유권의 변동을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보완책을 마련하여 비교적 토지매매가 자유롭게 되었고,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기만 하면 누구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경작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왕조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의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교통수단과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조선의 토지 생산성은 크게 증가할 수 없었다. 즉 토지의 생산성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미곡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서 농산물이 상품으로서의 매력을 지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이같은 전제가 충족되지 못한 탓에 토지는 재산으로서 그리 큰 매력을 가지지 못했다.

특히 18세기부터는 권력보다는 경제력(토지매매를 통한)에 의한 토지소유가 진행되어 갔다. 조선의 토지사유권은 적어도 15세기부터는 확립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 말기에는 토지의 사적 매매가 자유롭게 성행하고 있었다.

한편, 토지소유권의 증명과 매매, 상속 등의 관계에 있어서는 文記가 사용되어 왔다. 문기는 관민이 함께 그 효력을 인정하였으며, 분실시에는 군수에게 가서 입지(立旨) 또는 완문(完文)이라는 증명을 받아서 토지소유권을 입증하였다. 특히 개인간의 토지 거래는 국가에 등록되어 공증 받는 제도가 없어 땅문서(文記)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문서를 강탈당하면 땅도 강탈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로 인하여 토지의 매매는 위축되어 지역 시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지역 관료와 양반들에 의한 토지 강탈과 생산물에 대한 수탈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농민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이처럼 조선 사회의 원시적인 토지소유 구조는 대규모 기업농의 출현과 농업의 기계화를 저해함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일합병 이후 역사적인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조선에는 일본의 현대적인 등기제도가 그대로 도입되어 모든 토지에 대해 등급, 종류, 지형, 위치, 크기, 소유자 등이 공공성을 가지고 확정될 수 있었으며,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매매가 시작되고 그 결과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토지의 소유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소작농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점차 땅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로 나가 임금노동자가 되고 상업에 종사하는 등 자유로이 직업을 선택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봉건사회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독립자영농민이 점차 땅의 소유규모를 키워 지주로 성장해야 하고 수공업자나 기술자들은 점차 사업의 규모를 키워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로 성장해야 한다. 또한 유통과 시장이 발달해 사람들은 소비를 위한 생산에서 점차 시장을 겨냥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경제주체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봉건사회였던 서유럽과 일본에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이 세가지 변화가 모두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런 봉건사회의 경험을 갖지 못했던 조선에서 이같은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백년하청과 같은 일이었으므로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은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일본식 관료제도와 인력이 투입되어 강력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같은 기반 조성이 마무리된 뒤 조선은 순조롭게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했는데, 농업부문에서 전통적인 자영소농 위주의 생산체제가 지주와 소작농 체제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고도 자연스런 변화이며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발전된 지주-소작농 체제에 대해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國史, p360) 그리고 이 교과서에는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표가 제시되어 있다.

농가 호수 구성비
연도 지주 自作 自小作 小作
1916 2.5 20.1 40.6 36.8
1920 3.3 19.5 37.4 39.8
1932 3.5 16.3 25.4 52.7
출처: 조선총독부 <조선소작연보> 1집

이같은 기술은 역사적인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한 모략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한국 정부는 학생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 모든 문장이 모략과 조작이어서 어디서부터 비판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표를 보면 지주와 자작농을 제외하고 자소작농과 소작농을 합치면 교과서 문장에 나타난 77%라는 숫자가 된다. 이 77%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한 것인지는 줄어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통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통계 숫자가 드러날 수 있었던 것도 조사사업이 완결되고 총독부에서 해마다 통계숫자를 발표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소작농이 77%라는 것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제쳐두고라도 혹시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라 할지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악화되었는지 약화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라고 말하여 마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농민 대다수가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유치한 중상모략이 아닐 수 없다.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라는 부분도 마치 3%의 지주가 경작지의 절반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농민이 땅을 골고루 나눠 가지거나 혹은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고 농민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사회주의식’ 방식이 옳다는 것인가. 어쨌거나 이같은 문장에서 나는 이 교과서를 집필한 고교 교사들의 무지와 독선, 그리고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만을 찾을 수 있을 뿐 역사를 기술하는 자세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정도 수준의 저급한 교사들에게 단 하나뿐인 국정교과서의 집필을 맡기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준이라는 말인가.

소작료에 대해서도 50% 내지 70%를 지주에게 제공하는 것이 착취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역시 이 소작료라는 것도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게 되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50%가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조선시대에는 아마 소작농이나 자영농이 양반들에게 빼앗기는 비율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앞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는 대규모 기업농의 출현과 수공업자의 자본가로의 변화, 그리고 시장경제체제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영농이 대규모화되고 기계화되면 자연히 농민들은 농업에서 이탈하여 도시로 몰려들고 이같은 잉여 인력으로 인해 공장이 돌아가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다. 이것이 소위 ‘자본주의식 수탈’의 구조인데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자본주의 체제가 적어도 조선 노예사회나 일본의 봉건사회에 비해서는 한층 발전된 체제라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자본주의 이행기에 접어든 조선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새로운 직업을 찾거나 혹은 만주나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해 이주하는 변화는 당연한 것이며 이같은 변화와 갈등을 겪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바람직하고도 당연한 사회변동을 두고 마치 일제가 우리 민족에 앙심을 품고 괴롭혔다는 증거로 언급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구시대적 농업시스템의 해체’는 조선총독부의 업적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총독부의 통치를 비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둘러싸고 한국정부가 교과서를 통해 주장하는 두 가지 거짓말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사사업을 통해 전 국토의 절반을 강탈한 일도 없고, 조사사업으로 인해 농촌이 해체된 것도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변화일 뿐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정부가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학계에서 어떠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한국인을 제외한 독자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이 글에서 비판한 두 가지 거짓말도 겨우 국정교과서에서는 한 페이지도 못되는 분량이다. ‘국사’에서 1876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룬 분량은 약 50페이지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이 이런 식의 거짓말로 채워져 있다. 그나마 2002년판이라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 이 정도인데, 교과서 이외에 각종 참고서와 교재, 고시서적, 공무원 수험서 등의 기술은 교과서보다 훨씬 더 황당하고 어이없는 거짓말들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3]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p186

그동안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가리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그나마 이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대두한 식민지근대화 이론이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그 이전에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없었더라도 조선사회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발전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창작해내는 등 일본 통치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이는 기회주의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미리 준비된 결론에 역사를 꿰맞추는 곡학아세의 전형이었다.

1987년 교토대학 나까무라(中村哲) 교수의 제안에 따라 안병직 등 한일연구자 16명이 참가한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가 생겨나 식민지근대화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안병직은 1980년대 남한 주사파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라는 이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미국의 착취를 받는 반봉건사회이므로 노동자 계급을 앞세운 정통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반식민지 민족해방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초 서울대에서는 김영환 함운경 등을 중심으로 자생 주체사상파들이 생겨나 이후 삼민투 전대협 한총련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한 안병직은 식민지근대화 이론으로 급선회, 일본이 침략을 위한 목적이긴 했지만 그것을 계기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와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식민지근대화 이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기존 한국 사학계의 주류였던 수탈이론이나 자본주의 맹아이론에 비하면 한층 진일보한 입장으로서, 일본을 옹호하는 어떠한 이론도 백안시되었던 국내 학문 풍토를 감안하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수탈이론이란 비록 일제시대에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근대화가 있긴 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수탈을 위해 생겨난 것이고 또한 일제시대에는 엄청난 자원과 인력, 생산물 등의 수탈이 자행되어 조선인의 삶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시대의 많은 통계 자료를 조작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50%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는 둥, 일제시대에 조선 지역 총생산의 80%가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등의 무리한 수치를 만들어낸 뒤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한 반일 책동의 근거가 되었고 이 허무맹랑한 수탈이론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일선 학교에서 교육되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먼저 자금 유출입과 관련, 일제가 패전 때까지 조선에 투여한 자금이 60억 내지 70억 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통계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302억 엔이고 물자 유출분 140억 엔을 합하면 440억 엔이 넘어 유입자금의 7배에 이르렀으며, 이렇게 식민지 전 기간의 추정 GDP 550억 엔의 80%이상이 유출 또는 파괴됨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것이다. (정태헌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 조세정책을 중심으로』p.61 서울: 역사비평사 1996 )

식민지 근대화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식민지 전 기간 동안의 추정 국내총생산액 550억 엔의 80% 이상이 일제로 유출 내지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나, 일제시대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발생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의 마술 같은 이야기이다.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p.358 )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를 남김없이 착취한다고 했던 맑스도 착취율을 50% 정도로 보았는데, 만약 일제의 착취율이 80% 이상이었다면 조선 사람들 모두는 벌써 굶주려 멸종했을 것이다. (안병직 『식민지 시대 연구, 단견 버려라』 시사저널 1996.7.4 )



일제시대 초기 토지조사 사업에 대해서도 서울대의 신용하 등은 이 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약 절반 이상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 주인을 확인할 수 없어서 조선총독부 소유가 된 토지는 전체 국토의 4%에 불과했으며, 1920년대 들어 총독부는 본토의 일본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선이주정책을 취하면서 조사사업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를 유무상으로 불하해주었지만 이 또한 전체 토지의 10%를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권태억 등 한국의 주류 학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1인당 쌀 소비량이 1910년에는 약 0.71석이었다가 1919년에는 0.62석, 1929년에는 0.44석, 그리고 1944년에는 0.56석으로 감소했다는 통계 수치를 들먹이면서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식량사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상인등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의 쌀 소비량은 평균 0.58석 수준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일제시대 후반기에는 오히려 소비량이 약간 증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자신의 판단을 위임하게 마련이므로 역사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 같은 사실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면서 글을 읽게 되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1990년대 들어 시작된 식민지근대화 이론은 일제시대에 대한 이전의 평가에서 한 걸음 발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일제시대에 이룩된 산업화라는 것이 당시 한반도에서 가능했던 유일하고도 최선의 발전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이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를 순전히 외래적인 형태로,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이영훈)고 말한다. 12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p. 95.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 금융제도 및 교통, 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조처들은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제는 한국을 비롯하여 자신이 통치하던 식민제국 전부를 함께 동원하고 근대화시키는 발전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전상인)

식민지 시대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주의 발전이 불충분하였고 또한 서구가 지배하는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국적(national) 산업화 전략이 아니라 일본과 인근 식민지들, 특히 조선을 포함하는 지역적(regional)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였다. 곧,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방식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모델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도 동시에 해당되는 것이다. (서용석)
Yong Sug Suh, 1991, Class and Colonial Path to Modernity in Korea, 1910-1945,? PhD Dissertation, Department of Soci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참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보호국이 되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때, 일본은 당시로선 감당하기 벅찬 러시아와 무리한 전쟁을 수행한 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경제회복에 투입하는 것인데, 일본은 10억엔의 전비와 40만 이상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로부터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받지 못한 채 대신 조선과 사할린, 쿠릴열도 등 몇몇 영토를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들 새로운 영토를 잘 활용하여 손해를 만회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미 대만을 10년 간 통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저개발 상태의 식민지를 키워 뭔가 빼먹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 통치 첫해인 1896년에만 일본 정부는 정부 예산의 11%라는 막대한 돈을 대만에 쏟아 부어야만 했다. 그 뒤 대만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대만 경영은 계속 적자였고 1905년에 와서야 대만 식민지 정부는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대만 통치 초기 일본은 대만에서 사탕수수 농업을 발전시켜 외화를 얻어내는 데 주력했는데, 1920년대 일본에 쌀이 모자라게 되어 쌀값이 오르자 대만의 농민들은 사탕수수 대신 쌀 농사를 지어 일본에 수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농업은 몰락했을 뿐 아니라 대만의 사탕수수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대만의 쌀 생산을 줄이고 설탕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변변한 지하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후가 따뜻해 플랜테이션 농업을 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닌 척박한 땅이다. 일본은 대만에서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외화획득용 사탕수수 농업이라도 육성할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우엔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일본도 당시 산업혁명 초기의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주들은 쌀과 콩을 생산해 비싼 값으로 일본에 수출해 수익을 올렸지만 이는 일본의 농업경쟁력을 떨어뜨려 경제발전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가치란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었다는 점 이외에는 특별한 이점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조선 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켜 일본경제와 통합함으로써 시장규모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일본과 연계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는 일종의 '장기투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던 이유는 지하자원이나 설탕 고무 같은 원료를 획득하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자원 기후 문화면에서 일본과 닮은꼴이었던 조선은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을 기초부터 착실히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통치 초기인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난잡한 토지소유관계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편하는 일이었고, 1920년대에는 그 성과를 기반으로 산미증산운동 등 토지의 생산성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단계를 통해 조선에 기초적인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게 되자 1930년대에부터 일본으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안병직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식민지 경제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장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었다.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수산업의 생산 비중이 80%에서 43%로 하락하고 대신 공업생산의 비중이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공장이 많이 세워짐에 따라 노동자의 숫자도 1943년 175만여 명으로 늘어나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초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는 일본 전체 공업시설의 25%를 한국에 배치하였고,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에는 중화학공업까지 유치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지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한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일본의 조선 경영은 현지에서 오히려 산업화를 역행해 농업사회로 퇴보시켰던 영국의 인도 경영과 비교해볼 때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브루스 커밍스, The Lagac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및 문화면에서도 단일한 단위로 묶였다. 일본은 꿈에라도 나중에 한반도가 독립할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물량의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한반도에 들어선 흥남의 질소비료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진남포의 공업단지 등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첨단 중화학 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이 조선의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투자한 관개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역시 다른 식민지의 경우에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의 모습이었다.(브루스 커밍스, 같은 책)

그 외 교육면에서는 6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한제국 말 2.5%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78%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전체의 17%가 12년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석탄통계연보) 이 같은 교육이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한국전쟁 후 남한에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과거 대륙을 통일한 여러 왕조들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조공을 받으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자주정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별로 점령할 가치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좋은 것도 아니고 토지가 비옥한 것도 아니요,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구태여 정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19세기 말 얼지 않는 항구에 한이 맺힌 러시아나 대륙진출에 한이 맺힌 일본 정도가 군사적인 이유로 조선을 원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조선을 인수받은 일본은 초기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해 철도를 놓고 신작로를 만들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근대적인 관료 제도를 이식했으며,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식민지로서 최악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로 당시 조선이 기후가 따뜻하지도 않고 별다른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둘째 정치경제 문화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이었던 데다, 셋째로 그나마 동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교근본주의가 뿌리박힌 사회로서 이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맞는 신사상을 보급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통치한 일본이 최초 10년 동안 해마다 일본 예산의 10%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대만의 기반정비를 위해 쏟아 부었던 것을 생각할 때, 지정학적인 중요도를 제외하고도 조선은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덩치가 컸기 때문에 매년 일본 정부 예산에서 엄청난 자금이 조선총독부에 대한 국고보조금으로 투입되었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투입한 보조금은 많을 때에는 2천만 엔이 넘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조선에 투입된 자금은 관공서와 학교를 신축하고 교사와 공무원에게 봉급을 지급하며 도로와 철도 항만 전력 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이례적인 투자는 조선을 키워 잡아먹으려는 웅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는 한반도가 우리 땅이다, 즉 이제는 여기도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이 시기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본토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들을 대거 조선으로 초빙하여 일선 학교에 투입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사범학교 체제에 따라 교사를 양성했는데,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범학교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수한 엘리트 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거 한반도로 부임하여 조선인들의 문명개화를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1906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근대화의 기반을 닦은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근대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이토가 부임한 1906년까지 11년이 지나도록 전국의 소학교는 4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사정을 파악한 이토는 부임하자마자 정부 관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그동안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서 질책한 뒤 학교 건설 사업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개가 넘는 각종 학교가 들어서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토는 해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조선을 일본의 엔 통화권으로 통합하고 역사상 최초로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이후 조선의 물가는 안정되고 현대적인 화폐경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제시대 힘들게 구축된 조선의 경제기반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한반도는 다시 원시시대로 회귀하고 말았다. 특히 해방 전 조선에 있던 일본인 60만 명이 모두 일본으로 귀국한 것이 남북한의 발전에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되었다.

하지만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에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교육과 제도, 이념과 관습, 법률, 경험과 기술 같은 것들은 결코 전쟁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과 일본 경제가 그토록 신속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기적을 베풀어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선진공업국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의 문명을 이루어 향유한 경험이 있는 사회는 일시적인 참화로 물질 기반이 모두 파괴되어버린다 해도 다시 신속하게 일어설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란 보이지 않는 기반과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이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인간 자원이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것들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반도에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공장을 짓고 사람들을 개화시켰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입헌 군주국가를 만들어 근대화를 시도했을 경우 오랜 세월이 걸려도 깨어지지 않았을 완고한 문화유산과 사회제도, 이념 같은 정신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려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지고 갈고 다듬어진 정교한 체제였으므로 어지간한 변화와 충격에는 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토록 짧은 기간에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사회가 이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2-4]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p198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몰락한 선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마치고 동몽선습을 익혔다고 한다. 7살에는 효경, 8살에는 소학을 완성해 마을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데다 글 읽기를 좋아해 밤을 새워 고전을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곧 우봉 이씨 가문에서 영특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런 덕에 이완용은 10살 되던 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어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으로 발탁되었다. 이호준은 당시 우봉 이씨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서 고종과 민비 등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완용을 양자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려 한 것이다. 이호준의 후광과 타고난 재주를 바탕으로 이완용은 한말 난세에도 별다른 불행 없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기념해 실시된 특별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시강원 사서 등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했다. 1886년에는 정부에서 설립한 신식 귀족학교인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익혔다. 1886년은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한 역사적인 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학교인 이화학당을 비롯해 배재학당, 육영공원 등 3개의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등 민간인들이 설립해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처음부터 고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 아래 정부에서 설립 운영했던 교육기관으로서, 미국에서 초빙한 정식 교사와 학교시설을 갖추고 출발하는 등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했는데, 좌원은 현직관리, 우원은 고관들의 자제나 친척 가운데 선발된 영재들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제 1기 학생은 좌원 14명 우원 21명 등 모두 35명이었으며 강의는 미국에서 초빙된 교사 3명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즉 이완용은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교육을 받고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된 관리였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익힌 덕에 이완용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을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미국 현지에 교민도 없고 미국과 교역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외교관들은 아무 할 일도 없이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씻지 않아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말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상한 복장을 고집하던 당시 조선 외교관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미국의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은 이들이 왜 미국 땅에 머무르면서 비싼 국고를 탕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혁명가 서재필과 서광범 등 2명의 조선인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인물들이어서 공사관측과는 아무런 접촉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1890년 미국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형조,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1895년에는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의 경복궁 탈출을 도운 공으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고, 이후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되었으나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1905년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905년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하여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이완용에게 통고하게 된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 이재명으로부터 습격당해 허파를 칼에 찔리고 온몸이 난자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천황에 의해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후작의 반열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 동양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27년 69세에 이르러 이재명으로부터 얻은 상처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였다.

당시 이완용의 왼쪽 허파는 습격 때 입은 자상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오른쪽 허파마저 폐렴으로 인해 기능을 하지 못하자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이완용 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인격은 뭇 사람들로부터 흠모할 바가 많았으니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라고 추모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래 최대의 추모인파가 몰린 행사였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항상 이름 앞에 '매국노'라는 호칭을 붙여 대개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거짓말들이 국사학자들에 의해 당당히 언급되는가 하면, 그의 묘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의 일생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면 그가 이처럼 큰 모욕과 비난을 받을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동양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 천황은 몸소 그의 글씨를 청하고 답례를 했다고 한다.(윤덕한, 이완용 평전) 또한 이완용은 고매한 학식과 인품으로 조선과 일본의 정치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 통치에 협력한 것은 무능한 조선 왕실이 끝내 거부한 문명개화의 과제를 일본의 힘을 빌어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들을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관직에 입문한 이후 이완용은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정동파는 주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 조선 정치가 등으로 구성된 클럽으로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조선 정치에는 그리 큰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그룹이었다. 이완용은 1896년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독립협회의 이완용 대신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 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이다. 독립협회는 고종 환궁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는 정부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문부대신과 외부대신이 이완용에서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완용이 신념과 용기를 갖춘 애국자임은 서재필이 독립신문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였다.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는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하였다. 정부에서 이같이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리완용 씨는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필경 일은 그의 뜻대로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1897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무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3국 간섭에 굴복한 일본은 조선에서 힘을 잃었고 대신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는 외국 공사는 바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지칭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관리가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실제로 생명을 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러시아만이 조선 영토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었고 다만 여러 가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열강이 조선에서 차지하고자 했던 이권은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 크게 세 가지였다. 고종은 이 같은 여러 이권들을 서양에 넘겨주면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종이 군주라 할지라도 담당 대신(지금의 장관)의 결재 없이는 이권을 쉽게 넘겨줄 수 없었으니, 학부대신이자 외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20년 동안 압록강 및 두만강과 울릉도의 삼림을 베어갈 수 있는 권리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이었던 이 사업은 러시아에게 넘어갔지만, 제국주의 강대국의 부당한 압력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던 일은 이완용의 강직한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처럼 아관파천 기간과 고종이 환궁한 이후에 줄곧 러시아에 맞서 국익을 수호하던 이완용은 1897년 말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1898년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잠시 서울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중앙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수도 서울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다. 그 뒤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으로 임무를 수행함으로서 독립협회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고쳐 부름으로써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는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조선의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이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폭발하였다.

러시아의 영도 점유는 침략의 첫 단계라고 판단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영도조차(租借, 빌려줌)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국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이완용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그 성과로 1898년 11월 2일에 이르러 대한제국에는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하는 중추원신관제가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수구파들은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던 것이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이후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인물로서, 후세에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매국노라고 부르기는 힘든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1898년과 1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투쟁은 결국 고종과 수구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추진했던 혁명세력은 모두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북관찰사로 일하던 이완용도 입헌군주제 투쟁이 실패로 끝난 뒤 황국협회 및 황성신문 등 수구파들의 모략을 받아 결국 관찰사에서 면직 당하게 된다. 이후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완용은 고종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직을 고사한 채 고향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다시 조선의 개혁이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왕실의 일을 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 직을 받아들여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과 독립협회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혁명 세력은 일진회를 결성하여 수구파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문명개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혁명세력의 노선은 궁극적으로 일본과 합병함으로써 신속하게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이 같은 새로운 정세에 따라 기존의 자주독립 노선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합병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이완용은 이후 을사보호조약, 고종의 양위, 한일합병 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재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수구파들의 첫 번째 테러대상이 되었다. 이는 이완용이 당시 조선 정계에서 고종과 일본, 일진회 등 3대 세력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중심 역할은 이완용의 고매한 인품과 정치역량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는 선선히 자신의 소임을 받아들여 행동에 옮겼다.

당시 조선 반도의 통치자를 낡은 이씨 왕조에서 일본으로 교체하는 역사적인 작업은 악역을 자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조를 유지하고 전통관습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완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통감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서 이 땅에는 비로소 문명개화를 위한 작업들이 속속 추진되기 시작되었다. 개항이래 개화당의 선구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의 유신이 일본과의 합작을 이룬 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삼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었으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일본 정규군의 투입이 목전에 다가오자 이완용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을 중지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완용은 마지막으로 발표한 3차 경고문에서 조선 민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하는 것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다. 오늘날과 같이 국제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요. 병합 이해 근 십년 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 문제 등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급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완용은 당시 세계 정세로 보아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보다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실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이완용은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이완용의 호소로 인해 1919년 3.1운동은 6월초 군대에 의한 유혈진압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이완용의 사상은 이후 이광수 최남선 등 젊은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이완용은 새로이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설득하여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멸시와 차별을 없애도록 하고 각 도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문화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문예부흥이 시작되어 수많은 시인, 작가, 예술인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1927년 고종의 국장 이래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이완용의 장례식에서는 위대한 개화혁명가 박영효가 장례부위원장을 맡아 생전에 이룩한 업적과 활동을 추모하는 조사를 낭독했으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추모객이 참석해 위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운구 행렬은 서울의 옥이동에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10리에 걸쳐 이어졌으며, 장지인 전북 익산군에 운구가 도착한 뒤에는 현지의 추모객들에 의해 10리가 넘는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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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