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Ⅰ. '인지부조화' 를 강요하는 교과서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였는가.”, “대한민국에는 건국의 아버지도 없고 산업화의 주역도 없는가.”, “대한민국은 성장에 장애를 겪고 있는 나라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광복 6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또 대한민국이 ‘성공’보다 ‘좌절’이 압도한 국가라고 믿어야 한다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의 미래세대는 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잘못 태어났고 성장에 극심한 장애를 겪고 있는 국가라고 배우고 있다. 배울 뿐만 아니라 시험도 치고 평가도 받는다.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역사쓰기’가 잘못된 것인가. 축구와 한류에서 자부심을, 기업활동에서 생동감을 느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유독 역사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자괴감을 가져야 하는가. 또 얼굴에는 태극무늬를 그리고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축구를 응원하는 청소년들이 학교의 역사시간에는 대한민국을 채찍질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져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이른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상황을 강요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고등학교는 모두 2,700여 개이다. 그 중에 한국근현대사를 과목으로 선택하고 있는 학교는 1,711개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금성 출판사에서 발행한 교과서를 쓰고 있는 학교가 740여 개이다. 6종의 국사교과서 가운데 최대점유율인 약 50%를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알리바이의 역사’로 일관되어있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우리의 상상력, 근면함, 창의력, 열정이 통째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우고 지키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우리의 자화상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독재와 항쟁,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이 있으며, 민중들의 눈물과 아쉬움, 회한만이 넘쳐흐르고 있다. 반대로 북한의 역사기술에서 북한에 대한 부분에는 최소한 중립적인 기술과 최대한 우호적인 서술이 묻어난다. 그 사례들을 다음 항목에서 점검해 보도록 하자.

Ⅱ. 한국 현대사에 대한 교과서(금성사) 서술 분석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한국근대사 서술에서 왜곡되거나 잘못된 부분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건국과정, 둘째는 6·25전쟁, 셋째는 박정희 시대, 마지막으로 경제개발에 관한 부분이다.
첫째, 건국과정에서 정통성을 대한민국보다 북한에 두고 있다.
둘째, 6·25전쟁을 ‘작은 전쟁론’의 필연적 귀결로 묘사하고 있다.
셋째,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대한 부정적 서술과 김일성/김정일 독재에 대한 중립적 서술이 대조적이다.
넷째, 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부정적 서술과 북한 경제의 낙후성에 대한 호의적 서술이 현저하다.

상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건국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친일파 척결을 못한 상황인 반면, 북한은 친일파 척결을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둘째 6·25전쟁에 대해서는 남북 간의 ‘작은 전쟁’이 6·25라는 ‘큰 전쟁’으로 에스컬레이트된 것에 불과하다. 셋째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는 오로지 장기집권과 ‘권력에의 의지’를 불사른 독재였던 반면, 김일성의 독재는 ‘사회주의 가꾸기’를 위한 독재로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독재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외의존 심화, 재벌 등의 독점자본 산출 등, 세계경제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한다면, 북한의 경제실패는 사회주의 경제나 계획경제의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과도한 국방비의 수요이다.

특히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 비하적이고 부정적 기술인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며 긍정적인 평가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정통성 결여’, ‘반기업주의’, ‘반미주의’가 한국현대사 기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면, 북한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라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이 현저하다. ‘성공한 국가’로 평가받는 한국의 정치지도자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로 일관하고 있고, ‘실패한 국가’로 평가받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온정적이라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Ⅲ. 한국현대사의 미완성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무릇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어떠한 나라의 역사에도 자랑스러운 부분과 부끄러운 부분이 혼재되어 있다. 개인의 삶에 수많은 도전과 응전이 있고 따라서 성공의 이야기와 실패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도 자랑스러운 추억도 있고 그렇지 못한 슬픈 추억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부끄러운 역사를 압도할 만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으며 또한 자부할 만한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을 압도할 만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있으며, 또한 감동적인 ‘비사(秘事)’들이 많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체험이 그러하고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그렇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손,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부끄러움 못지않은 자랑스러움과 감동이 넘쳐흐르는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관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은 운명을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가 애써 산으로 끌어올린 돌이 제 무게로 땅으로 내려오는 것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산 밑으로 뛰어 내려가 바위를 다시 산으로 끌어올리듯이 말이다. 대한민국은 강력하고 까다로운 이웃나라들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운명을 멍에처럼 지고 있었다. 이 국가적 운명과 역사적 운명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다. 또 세계적인 냉전구도도 강요된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 빈곤이라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가 모두 자랑스럽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자랑과 자부심만을 느낀다면, 이른바 팔불출(八不出)의 부실한 사관이거나 국수주의자의 오만한 사관일 것이다. 역사에서 아쉬움과 회한도 아울러 짚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래를 위한 균형 잡힌 사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관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자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굴곡과 좌절 및 아픔의 기억이 있다. 특히 세 가지의 미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미완성’, ‘산업화의 미완성’, ‘민주화의 미완성’이 그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국토의 분단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완성의 민족주의를 웅변해준다. 민족주의가 완성되었다면, 지금까지 겪고 있는 이 분단의 아픔은 벌써 치유되었을 것이다. 산업화도 우렁차게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신 있게 후기 산업화를 말하기 어렵다. 산업화가 완성되었다면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온갖 자본주의 모순과 시장의 실패, 노사분규 등이 지금보다 대폭 줄어들었을 것이다. 민주화는 어떤가. 민주화가 완성되었더라면 민주공동체의 질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정당과 정치는 ‘소금 뿌리기’와 ‘솥단지 던지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 존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국회의사당 견학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국회의원들이 몸싸움과 패싸움 등, 당동벌이(黨同伐異)에 익숙한 습성을 고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완성들은 우리에게 ‘대한민국 찬가’를 부르는 데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완성’을 위해 정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미완성이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아름다운 것처럼, 대한민국의 미완성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Ⅳ.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역사’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고 평화적 민주화도 이룩했다. 인권, 민주화, 산업화, 복지제도 등 어떤 기준을 들이대어도 대한민국은 ‘미션 임파서블’을 이루어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은 제3세계에서 성공한 국가의 대표적 사례가 된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꽃필 수 없는 것처럼,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한 서구인들의 암울한 전망을 우리는 평화적 민주화에 의하여 보기 좋게 반증했다. 또 한국에서 고속도로는 불가능하고 제철공장도 성공할 수 없다고 진단한 비관적 전망을 우리는 행동과 실천으로 통쾌하게 반증했다. 압축성장이 그 비결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뭉쳤고 지금은 나름대로 부국화(富國化)를 향해 항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공은 북한의 민주화의 부재나 산업화의 부재와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북한에 인권이 있는가, 북한에 정부를 비판할 자유는 있는가, 북한 주민의 삶은 어떤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국가’의 역사학도들이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를 등치시키면서 ‘성공한 국가’에 대한 성공의 평가에 극히 인색하고 오히려 모순과 상처를 들추어내는 반면, ‘실패한 국가’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가꾸기’로 이해와 동정을 표시한다면, 그것은 ‘겸손한 사관’일까, 아니면 ‘자기비하의 사관’일까. 그것은 사실에도 충실하지 못한 왜곡된 사관이며, ‘마조히스트(masochist) 사관’이 아닐 수 없다. 민주화를 이룩하고 빈곤을 빈곤이 아닌 것으로 바꾸며 세계적인 한국기업들이 부상한 것도 ‘사실’이고 ‘리얼리즘’일 터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대한민국이 성공한 국가이고 북한이 실패한 국가라는 것도 ‘사실’이고 ‘리얼리즘’이 아니겠는가.

‘실패한 국가’에 민족적 정통성을 부여하고 ‘성공한 국가’에 민족적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병적 민족주의’일지언정 ‘건강한 민족주의’는 아니다. 균형감을 상실한 민족주의를 어떻게 ‘건강한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민족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을 지향점으로 삼는다면, 민족의 병적인 부분보다 양호하고 양질의 부분에 대하여 평가하고 이를 중심으로 민족의 활력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병적인 부분에 희망을 걸고 민족의 활로를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민족착오적인 도로(徒勞)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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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