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8 메이지 유신의 시작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48 메이지 유신의 시작
[ 보신전쟁(戊辰戰爭)과 구(舊)막부군의 멸망 ]
천황 밑에 만들어진 신정부의 지도자로 임명된 것은 도막파의 구게(公家)와 무사들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여기에 참가하지 못하고 신정부에 영지의 반환을 명받았다. 구막부군(舊幕府軍)은 이 명령에 분격하여 1868년 1월 교토의 도바∙후시미(鳥羽∙伏見)에서 삿초 양 번을 주체로 하는 신정부군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패하였다(도바∙후시미의 싸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신정부군을 이끌고 구막부군을 추격하여 양 군의 싸움은 전국적인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신정부군은 천황의 군대를 나타내는 니시키노미하타(錦의 御旗, 역주: 붉은 비단에 해와 달을 금은으로 수놓거나 그린 깃발로 가마쿠라시대 경부터 관군의 표장으로 이용)를 선두에 내걸고, 관군(조정군[朝廷軍])으로서의 권위를 배경으로 유리하게 싸움을 진행시켜 에도를 점령하였다. 이 때 신정부군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 측의 가쓰 카이슈(勝海舟)가 서로 이야기를 해 에도성을 무혈 개성(無血開城)하였다.

내전은 그 후 동북에까지 이르러 아이즈번(會津藩)에서는 16-17세의 소년 19 명이 자인(自刃, 역주: 칼로 자결함)하는 뱟코타이(白虎隊)의 비극을 낳았다. 다음해 5월 막부 측의 최후 거점이었던 홋카이도∙하코다테의 고료카쿠(五稜郭)가 신정부의 손에 떨어져 구막부군 은 멸망하였다. 이 1년 반에 이르는 내전을 보신전쟁(戊辰戰錚)이라 한다.

[ 근대국가 건설의 기본 방침 ]
왕정복고의 대호령 가운데에는 옛것을 새롭게 하여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 는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라는 말이 인용되었다. 여기에서 막부 말에서 메이지 초기에 이르는 일련의 변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부른다.

1868년 3월 메이지 천황(天皇)은 구게(公家)와 다이묘(大名)를 이끌고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대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個條의 御誓文)을 발하였다. 여기에서는 회의를 열어 여론을 바 탕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과 언론활동을 활성화하는 것 등이 제창되었다. 이에 따라, 일 본이 서양의 문명을 받아 들여 근대적인 입헌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길이 열렸다.

같은 해 9월 원호를 메이지(明治)로 개원(改元)하고, 이후 한 명의 천황에게 하나의 원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제도를 제정하였다. 또한 에도(江戶)는 도쿄(東京)로 개칭되어 메이지 천황은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기고, 이듬해에 도쿄는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도쿄는 근대 일본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5개조의 서문(五箇條의 御誓文)>
一. 널리 회의를 시행하여 나라의 모든 중요 사항은 공론(公論)으로서 결정할 것
一. 상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히 나라의 정치를 행할 것
一. 문무백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이 없도록 할 것
一. 구래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세상의 법도를 따를 것
一.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고 황도(皇道)의 기초를 진작시킬 것

(『법률전서』에서)
-회의를 열어 모두의 의견을 널리 취합하여, 모든 정치는 여론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을 확실하게 추진해야 한다.
-구게(公家)와 무가(武家)는 하나가 되어, 일반 서민이라도 그 희망을 이루게 하여 사람들 의 마음이 식상하여 불만을 갖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예로부터의 나쁜 습관은 버리고 세계에 통용되는 바른 도리에 따라야 한다.
-지식을 널리 세계에서 구하고,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업의 기초를 크게 분기시켜야 한다.

49 중앙집권 국가로의 길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49 중앙집권 국가로의 길
[ 판적봉환(版籍奉還) ]
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는 어떻게 해서 성립된 것일까.
보신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 해도 신정부는 번(藩)들의 연합체로서 그 기초가 불안정하였다. 신정부 내에서는 각 번의 의향을 언제나 배려할 필요가 있어, 일본국 전체의 입장에서 개혁을 행하는데 항상 곤란이 따랐다. 또한 국내가 다수의 번으로 나뉘어진 채로는 언제 어느 때 외국 세력에게 이용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국내의 통일은 급선무였다.

이에 신정부의 중심이 되어 있던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사가현∙나가사키현)의 네 번(藩)은 1869(메이지[明治]2)년 번주(藩主)가 자청하여 그 영토(판[版])와 인민(적[籍])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다른 번도 잇달아 이러한 움직임에 따랐다(판적봉환[版籍奉還]). 이 판적봉환에 의해 전국의 토지와 인민은 천황(오야케[公])의 것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각 번에 남겨져 있었다.

[ 폐번치현(廢藩置縣) ]
1871(메이지[明治]4)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의 신정부 지도자들은 전국의 번을 일거에 폐지하는 개혁에 관해 비밀리에 상담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쓰마∙조슈∙도사의 각 번에서 모은 천황 직속의 약 1만의 친병(御親兵)을 배경으로, 7월에 도쿄에 체재하고 있던 전 번주들(*1)을 황거(皇居, 이전의 에도성)로 모이게 해 천황의 이름으로 폐번치현(廢藩置縣)의 포고를 알렸다.

폐번치현은 분권적인 제도인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제(*2) 하에서 지방조직인 현을 두는 것으로, 번에 남겨져 있던 군사(軍事)와 징세(徵稅)의 권한도 신정부의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으로부터 모아진 연공은 번이 아니라 신정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사는 실직(失職)하였지만 무사의 녹(祿)은 그후 한동안 신정부가 대신해서 급부하였다.

신정부는 번의 반란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롭게 설치된 현은 신정부에서 파견된 현령(현지사[縣知事])이 통치하게 되어, 일본은 통일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1) 당시에는 판적봉환에 의해 지번사(知藩事)라는 직명이었다.
(*2)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다양한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있는 정치 구조를 중앙집권제라고 한다. ⇔지방분권

[ 사민평등의 사회로 ]
한편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세워 사람들을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국민으로서 통합해 나갔다. 우선 종래의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번주와 구게를 화족(華族), 무사를 사족(士族), 농민과 상인(町人)을 평민(平民)으로 하였다. 또한 평민에게도 성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직업선택, 결혼, 주거,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나아가 1871년에는 해방령(解放令)이 나와 에타(穢多, 역주: 근세·중세 천민 신분의 하나)와 히닌(非人,역주: 에도 시대의 천민 계층)으로 불리던 사람들도 평민이 되어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사회적 차별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남았다.

50 학제∙병제∙세제의 개혁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0 학제∙병제∙세제의 개혁
메이지유신의 3대 개혁
[ 학제 발포 ]
메이지 정부는 3가지의 강력한 제도개혁, 즉 학교제도, 징병제도, 조세제도의 개혁을 추진하 여 평등한 국민들로 구성되는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기반을 굳혔다. 이 3가지는 이윽고 국민들 사이에 취학의 의무,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로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72(메이지 5)년, 학제(學制)가 발포되었다. 교육은 국가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개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사고가 주창되어, 「어느 마을이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집은 한 집도 없고, 어느 집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는 한 사람도 없게 한다.」(*1)라는 선언이 나왔다.

소학교가 의무교육이 되고 에도시대 데라코야(寺子屋, 역주: 에도시대의 초등교육기관. 한국의 서당에 해당)의 대부분이 소학교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불과 수년 사이에 2만 6천 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취학률은 처음에는 50% 이하였지만, 그후 급격히 증가하여 메이지 말기에는 거의 100%에 달하였다.

(*1) 「반드시 마을에 배우지 않는 집이 없고, 집에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힘을 쓴다 」-『학사장려(學事奬勵)에 관한 경출서(仰出書)』에서

[ 징병령의 시행 ]
1873(메이지 6)년에는 징병령(徵兵令)이 공포되었다. 20세에 달한 남자는 사족(士族), 평민 의 구별 없이 모두 병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징병령은 서양의 제도를 받아 들여, 사민 평등 의 사상에 바탕한 국민군(國民軍)을 만드는 개혁이었다.

에도 시대까지 무기를 지니고 싸우는 것은 무사에 한정되었으며, 이것은 무사의 명예이자 특권이기도 하였다. 국민에게 평등한 의무를 부담시키는 징병제는, 사족으로부터는 특권을 빼앗는 것으로서 반발을 사고, 평민들은 일가의 젊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담이 고통스럽다 고 하여, 초기에는 여러 가지 불안을 야기시켰다.

[ 지조개정(地租改正)의 실현 ]
1868(메이지[明治]1)년, 정부는 농민이 전답에 무엇을 심을 것인 지는 자유라고 하고, 전답의 매매를 인정한다는 공고를 냈다. 나아가 정부는 전국의 지가(토지 가격)를 정하고 토지 소유자를 확정하여 이들에게 지권(地券)을 교부하였다. 지권에는 소유자∙면적∙지가∙ 지조(세금)등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지권을 근거로 1873년 정부는 지조개정 (地租改正) 에 착수하였다.

에도시대의 연공은 수확고에 기초해서 쌀을 물납(物納)하는 것으로, 세율도 각 번에 따라 제 각각이었다. 이 지조개정에 의해 지가의 3%(*2)에 해당하는 지조를 화폐로 납부하는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전국의 토지에 일률적으로 과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정부의 세입(稅入) (*3)은 안정되었다.

지조개정은 토지를 보유하는 농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 위에 납세의 의무를 부과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근대국가의 재정기반이 다져졌다.

(*2) 지조개정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1877년에는 2.5%로 인하되었다.
(*3) 연도별 수입. 사진: 지권(地券) (국문학연구자료관 사료관 소장)

[읽기 칼럼] 메이지유신이란 무엇인가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읽기 칼럼] 메이지유신이란 무엇인가
[ 구미 열강의 식민지화를 피하다 ]
1800년에 지구의 육지 약 35%를 지배하고 있던 구미 열강은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 지배권(支配圈)이 약84%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일 메이지유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구미 열강의 지배하에 편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미 열강에 의한 영토확대정책은 제국주의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일본이 독립을 유지해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설 때까지의 역사는, 이러한 제국주의의 시대에 일어난 것이었다.

[ 중국·조선과 일본의 갈림길 ]
이와 같은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청조)은 구미 열강의 무력에 의한 위협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었다. 중국에 조공하고 있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아편전쟁에 충격을 받은 것은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이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자국의 문명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중화사상이 있어, 영국 등은 세계의 끝에 있는 야만스런 민족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도 있어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움직임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결과 청조는 차츰 열강에게 침식당해 영토 보존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에도 시대에 걸쳐 무가(武家) 사회라는 면이 있어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특히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라는 두 유력한 번(藩)이 막부 말에 서구 나라들과 전쟁을 한 결과, 구미와 일본의 힘의 차이를 통절히 인식하고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 무사의 희생에 의한 개혁 ]
메이지유신에 의해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사민평등의 사회가 실현되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사의 특권은 폐지되고 무사 신분 그 자체가 소멸하였다.

메이지유신은 유럽의 혁명, 특히 프랑스혁명처럼 시민이 폭력으로 귀족의 권력을 타도한 혁명이 아니었다. 무사신분을 폐지한 것은 다름아닌 무사신분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었던 메이지신정부(明治新政府)였다.

이것에 관해 어느 프랑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본의 특권 계급이었던 무사는 다른 계급에 의해 타파된 것이 아닙니다. 외국의 압력 앞에서 스스로 혁명을 추진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희생을 치룬 것입니다. 혁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어느 계급이 다른 계급을 쓰러뜨린다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이 아닙니다. 무사들이 바란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힘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모리스 뱅거[Maurice Bange]『스스로를 죽인 일본사』에서 일부 요약)

메이지유신은 오야케(公)을 위해 일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던 무사들에 의해 실현된 개혁이었다.

[ 메이지유신과 교육입국(敎育立國) ]
메이지유신의 개혁에 있어서 새로운 나라만들기의 근본으로 여져진 것은 교육이었다. 교육을 중시하는 사상은 에도시대로부터 계승된 것이었다. 그것은 막부 편에 섰던 번(藩)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막부 편에 붙어 보신전쟁에서 패한 나가오카번(니가타현)에서는 전란과 홍수의 피해가 겹쳐 심각한 식료부족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괴로움을 차마 못본 친척 관계에 있는 번으로부터 「미백표(米百俵), 역주: 쌀 100석」가 위문품으로 보내어져 왔다. 그러나 번정(藩政)의 책임자였던 고바야시 도라사부로(小林虎三郞)는 한 톨의 쌀도 번사에게 배분하지 않고, 장래의 인재 육성을 위해 번의 학교를 개교하는 자금으로 돌려 버렸다. 장래에 대비해서 자원(資源)을 인재 만들기에 중점적으로 배분하는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근원이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무사의 자제를 위한 번교(藩校)와 일반 서민을 위한 데라코야(寺子屋)의 두 교육 기관이 있었다. 메이지정부에서는 일찍부터 평등하고 공평한 교육 기회를 국민에게 보장하는 학교제도를 만들었다. 학제발포(學制發布)에 의해 정부는 2만 6천 교의 소학교 설치를 목표로 하였다. 그 대부분은 데라코야나 번교를 전용한 것이었다. 학교는 국민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무사의 아이들도 정인(町人)∙농민의 아이들과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여 경쟁하게 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평등하게 미래가 약속되는 이러한 구조는 그때까지의 신분의식을 파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명치유신의 교육입국 방침은 일본 근대화의 토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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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