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대한민국 이야기’ 이영훈 [목차] (전문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제2부 문명사의 대전환
[3]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
[3]-1 문화적 민족주의 비판
[3]-2 환경 파괴와 경제 위기
[3]-3 성리학의 정치원리
[3]-4 중화제국의 국제질서
[3]-5 대전환
[4] 식민지수탈론 비판
[4]-1 역사란 무엇인가?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4]-3 토지수탈설이 만들어진 과정
[4]-4 만들어진 기억의 상업화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1 한용운의 자유의 논리
[5]-2 ‘영구병합’을 위한 근대의 이식
[5]-3 신분제의 해체
[5]-4 근대적 경제 성장
[5]-5 사유재산제도의 확립
[5]-6 수탈의 메커니즘
[6] 협력자들
[6]-1 제국주의의 조건
[6]-2 중인 출신의 협력자들
[6]-3 협력과 저항의 역설
[6]-4 친일 내셔널리스트
[6]-5 제국의 이등시민으로서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1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
[7]-2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7]-3 기억의 집단화, 공식화
[7]-4 일본군 위안소의 역사
[7]-5 위안부들의 처지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7]-7 일본군의 전쟁범죄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1 무엇이 문제인가?
[8]-2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1)
[8]-3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2)
[8]-4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3)
[8]-5 식민지 지배라는 수준
[8]-6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라는 수준
[8]-7 그날의 토론회
[9]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
[9]-1 개발(development)의 뜻
[9]-2 물적 유산
[9]-3 제도적 유산
[9]-4 인적 자본
[9]-5 충성과 반역의 정신세계
제3부 나라세우기
[10]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0]-1 갑작스런 해방
[10]-2 도움은 어디에서?
[10]-3 독립운동의 실태
[10]-4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 변동
[10]-5 해방의 세계사적 의의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1 역사교과서의 난폭한 서술
[11]-2 해방 공간의 사회 실태
[11]-3 소용돌이의 중앙 정치
[11]-4 분단의 선구는 어느 쪽에서?
[11]-5 천황제를 계승한 수령체제
[12] 건국의 문명사적 의의
[12]-1 헌법을 읽자
[12]-2 자유민주주의 국가
[12]-3 자유시장 경제체제
[12]-4 농지개혁
[12]-5 애비는 종이었다
[12]-6 소경영적 개혁
[12]-7 전통에 바탕을 둔 문명사의 전환
[13]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13]-1 중상모략
[13]-2 개종과 자유민주주의
[13]-3 그의 정치적 자산
[13]-4 농지개혁과 이승만
[13]-5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재해석
[13]-6 칼을 물고 뜀을 뛰다
[13]-7 문명개화파의 적자(嫡子)
[14] 반민특위를 되돌아 봄
[14]-1 반민특위의 좌절
[14]-2 분열의 근원으로서 친일파 문제
[14]-3 박흥식의 재판기록
[14]-4 역사의 아픔을 정신혁명으로
[15] 한국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나
[15]-1 전쟁의 상처
[15]-2 커밍스의 수정설
[15]-3 모스크바 문서가 이야기하는 전쟁의 진실
[15]-4 일제가 북한에 남긴 군사공업
[15]-5 끝나지 않은 ‘나라세우기’
[16] 1950년대 재평가
[16]-1 1950년대의 암울
[16]-2 절대 가난의 역사적 업보
[16]-3 교육혁명
[16]-4 마지막 소농사회
[17] 개발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17]-1 그 고집불통의 합리성
[17]-2 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
[17]-3 이승만의 꿈 '자립경제'...50년대 중반 고도성장 기록
[17]-4 도덕해이를 피하다
[17]-5 이승만, 몇백달러 일본출장 식사에 펄펄 뛰다
[17]-6 줄어드는 미국원조...국제환경은
[17]-7 그의 시대는 저물고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지금부터 저는 이 같은 역사가의 직업의식에서 1910~1945년 일제하의 식민지로 있었던 우리의 불행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그 시대에 대해 보통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수탈’입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수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가 수탈입니다. 일제는 무자비하게 우리 민족의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을 수탈하였지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거나 해외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60년간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국민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게 믿고 있지요.

국사교과서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2001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보면 “일제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 수탈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컨대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전국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였으며, 이 토지를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농민이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과 같은 국책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였습니다. 또 총독부는 생산된 쌀의 절반을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경찰과 헌병이 총칼을 들이대고 절반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문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일제는 노동력을 수탈하였습니다. 1940년대의 전시기에 약 650만 명의 조선인을 전선으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강제 연행하였으며,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와 같이 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조선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른다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서 확인한 사실입니다만, 국사 교실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선생도 울먹이고 학생도 울었답니다. 그렇게 악독한 수탈을 당한 조상들이 너무 서럽고 분하여 울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런 교과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예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비슷한 사실이 없지 않으나 과장되거나 잘못 해석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깜짝 놀랄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교과서를 쓴 역자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제가 이전에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혹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으로서 역사가 정치화된 역사가에 의해 또는 역사화된 정치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역사의 본질을 국사교과서의 수탈설만큼 적나라하게 잘 보여 주는 다른 사례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생산된 쌀의 거의 절반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쌀이 건너간 경로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시장경제의 경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는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 했습니다. 수탈과 수출은 매우 다르지요. 수탈은 조선 측에 기근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수출은 수출한 농민과 지주에게 수출소득을 남깁니다. 쌀이 수출된 것은 총독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값이 30%정도 높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수출을 하면 농민과 지주는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됩니다. 그 결과 조선의 총소득이 커지면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되지요. 모자라는 식량은 만주에서 조나 콩과 같은 대용 식량을 사와서 충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추계에 의하면 인구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줄었다고도 반드시 이야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또 수출소득으로 면제품과 같은 공산품을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아예 기계나 원료를 수입하여 방직공장을 차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 김성수 선생의 경성방직(京城紡織)이 그렇게 해서 세워진 공장입니다. 요컨대 수출을 하면 수탈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한국의 교과서는 이 평범한 경제학의 상식을 거꾸로 쓰고 있을까요.

[5]-3 신분제의 해체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3 신분제의 해체
이후 조선에서는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문명이 접합하여 서로 다른 유전자를 섞으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이하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신분제의 해체입니다. 이른바 사민(四民)평등의 시대가 찾아 왔습니다. 1909년 경상도 예천군의 맛질이란 양반 마을에서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 온 박씨 양반가는 어느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저 을사(乙巳) 이후에 양반과 이속(吏屬)들이 겁탕당하고 궁민과 평민이 때를 만났는지라. 동리의 상한(常漢)들이 양반을 칭하고 옛날 호칭은 간데없고 다툴 때는 호이호군(呼爾呼君)하니(하략)”(《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93쪽).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 마을의 상놈[常漢]들이 양반을 업신여기고[겁탈하고] 서로 다툴 때는 막말을 하는[呼爾呼君] 사태가 생겼다는 겁니다. 양반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변화가 왜 생겼습니까. 일제라는 새로운 지배자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일제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과 무관한 중립 권력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신분으로 차별하는 일은 일제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동화정책에 어근나기 때문입니다. 1908년 같은 마을에서의 일입니다. 동네 앞을 지나는 도로를 닦는데 노동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양반가의 자제들은 그러한 부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들은 그런 일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양반가의 자제들도 삽을 들고 도로에 나가 흙을 파고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히 양반과 상놈이 말을 트는 평등의 시대가 찾아 온 것이지요.

1920년대가 되면 형평사(衡平社)라는 백정(白丁)의 단체가 백정의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을 벌입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 백정은 소나 돼지를 도살해 주고 그 가죽으로 신발 등을 만드는 직업인이었습니다만, 보통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아니기에 성도 없었고 호적에도 등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1909년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에게도 등록을 강제했습니다. 그 통에 백정들은 성도 갖고 본관도 갖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백정의 자녀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형평사 운동 당시의 일이지요. 그러자 양반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어찌 내 자식을 백정의 자식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게 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특히 경상도 예천 지방에서 양반의 데모가 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국가의 간성(干城)이라 하여 양반들이 데모를 하면 국왕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통과 무관한 외래 권력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양반의 데모대는 총독부의 경찰에 의해 간단히 진압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백정 신분은 죄다 사라지고 보통사람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백정과 비슷한 존재가 일본에는 아직도 있습니다. 부락민(部落民)이라고 하지요. 자기 나라의 전통과 관습이니까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에 비하면 조선에 온 제국주의 권력은 차별의 해고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셈입니다. 현지의 전통과 관습과 무관한 외래 권력이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식민지기의 신분제 해체는 어디까지나 공적 영역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관습과 의식의 영역에서 신분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신분은 인간관계의 사회적 결을 가르는 차별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크게 보아 1950년대까지의 농촌사회가 그러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16장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5]-4 근대적 경제 성장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4 근대적 경제 성장
두 번째의 상징적 변화는 근대적인 경제 개발과 성장입니다. 식민지기에 관한 경제사 연구는 지난 몇 년간 큰 발전을 보였습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라는 곳에 모인 경제사 연구들은 식민지기의 각종 생산통계, 무역통계, 재정통계 등을 망라하여 오늘날 한국은행이 매년 추계하고 있는 국민계정과 동일 수준의 경제통계를 작성하였습니다. 동 연구소에서 나온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서울대학교 2006)라는 책이 그 종합판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식민지기에 한반도라는 지리적 범위에서 어떠한 경제적 변화가 있었는지를 한층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대강의 내용에 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김낙년 교수의 논문,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위 책은 김낙년 교수가 중심이 되어 편집할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1910~1940년 조선의 경제는 연평균 3.7% 성장하였습니다. 동기간 인구증가율이 연평균 1.3%이니까 일인당 실질소득은 연평균 2.4% 증가한 셈입니다. 이 같은 성장률은 같은 기간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경제성장에 따라 1차산업 농업의 비중이 줄고 2차산업 공업의 비중이 증가하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공장과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습니다. 경제란 무엇입니까. 기계와 기업과 정부 간의 재화와 서비스와 소득의 흐름이지요. 이 흐름에서 일부가 아무런 대가 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고 칩시다. 경제는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점점 쭈그러들지요. 이것이 바로 수탈론이 주장해 온 내용입니다만, 실제 일어난 경제적 변화는 그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재화와 소득의 흐름은 연간 3.7%의 속도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수탈론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경제성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부 일본인 차지였는데 우리 조선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주익종 박사의 논문, <식민시 시기의 생활수준>을 참조해 주십시오. 아주 훌륭한 반비판입니다. 여기서는 인구 2~3%의 소수에 불과한 일본인이 연간 3.7%의 경제성장의 과실을 모조리 다 차지하면 논리적으로 어떤 모순이 발생하는가를 여러 가지 가정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을 일본인 자본이 주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민족 간 소득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논문은 조선인의 평균소득도 증대하였음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활수준을 반영하는 지표에는 일인당 소득수준 이외에 일인당 칼로리 섭취량, 신장, 보건위생, 교육수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쌀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의 영양상태가 퍽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주익종은 만주에서 들어온 곡물과 지금까지 관심 밖이었던 채소·과일·통조림 등의 보조식품까지 합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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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