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3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4-1 구미의 진출과 막부 말의 위기  43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 유럽의 산업혁명 ]
일본의 에도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18세기가 되자, 유럽 사람들의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종래의 모직물에 대신해서 인도산 목면을 원료로 한 가볍고 튼튼한 면직물 의복을 즐겨 착용하게 되었다. 면제품은 위생적이고 값싸다는 점에서도 인기가 있어, 간단한 도구를 사용한 수작업으로는 생산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수요를 배경으로,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면사를 만드는 방적업이나 면사로 포를 짜는 면직물업 분야에서 빠르고 대량으로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기계가 잇달아 발명되었다. 또한 석탄을 연료로 한 증기 기관도 개량되어 방적기와 직기(織機)등의 동력으로 이용되게 되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공장으로 모아져 기계 옆에서 집단으로 일하게 되었다.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어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갔다. 이러한 생산 방법의 대변혁을 산업혁명(産業革命)이라고 한다.

예전의 영국은 전원이 펼쳐져 마차가 한가하게 오가는 농업 중심의 사회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결과 검은 연기를 뿜어 내는 공장이 늘어선 도시가 출현하고, 철도도 발달하여 공업 중심의 사회로 변화해 갔다. 산업혁명은 19세기 후반에는 프랑스, 독일, 미국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혁명 ]
한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후반에 걸쳐 정치의 방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였다.1688년 영국에서는 국왕이 다른 신분 사람들의 권익을 침해하였다고 해서 의회가 새로운 국왕을 맞아들였다(명예혁명[名譽革命]). 이에 따라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1)가 확립되고 외회제도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본국에 의한 중세(重稅)와 탄압에 항의하여 1776년에 독립선언(獨立宣言)을 발표하였다. 독립전쟁에 승리한 미국은 삼권분립(*2)을 근간으로 하는 합중국헌법(合衆國憲法)을 제정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에 재정난이 원인이 되어 국왕과 귀족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신분의 특권을 폐지하고 자유・평등을 주창하는 인권선언(人權宣言)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후에 국왕을 처형하는 등의 과격한 유혈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 일련의 움직임을 프랑스혁명이라고 한다.

이들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신분에 기초한 왕이나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사람들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활동하는 사회를 지향한 것으로 시민혁명(市民革命)이라 불리고 있다. 시민혁명에 의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근대국민국가가 탄생하였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달성한 유럽은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우위에 서고, 그후 전세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1) 군주를 받들면서도 실제의 정치는 헌법에 의해 운영하는 국가 구조.
(*2) 국가의 권력을 입법(법률을 만드는 것), 사법(재판), 행정(실제의 정치)의 세 개로 나누어 각각 독립시키는 구조.

44 구미 열강의 아시아 진출

4-1 구미의 진출과 막부 말의 위기  44 구미 열강의 아시아 진출
[ 영국의 인도 지배 ]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완수한 구미 나라들은 값싼 원료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또한 대량 생산된 자국의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구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먼저 인도에 진출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1)가 주체가 되어 영국의 대규모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면직물을 인도에 팔아 넘겼다. 인도의 수공업은 영국의 값싼 제품과 의 경쟁에서 밀려 급속히 쇠퇴하였고 수많은 장인들이 실직 상태에 빠졌다.

1857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되어 있던 인도병(印度兵, 세포이)들이 일으킨 반란을 계기 로 그동안 불만을 가져 왔던 수공업자나 농민이 합류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되었다. 이것 을 무력으로 진압한 영국은 인도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식민지로 하였다.

(*1) 1600년에 설립되어 영국 국왕으로부터 아시아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 받은 회사.

[ 군사력의 격차 ]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30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놀랄만큼 군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국내의 전란이 수습되고 사회가 안정되자, 에도시대의 일본이나 청조(淸朝)의 중국은 모두 군사 기술의 발달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약 250년간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렇게해서 유럽의 군사력은 아시아 나라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과거에 몽고의 기마군단은 말을 달려 초원을 정복했지만, 이 시기의 유럽인들은 군함에서 대포를 쏘아 식민지를 정복한 것이다.

[ 아편전쟁과 영국의 중국 진출 ]
18세기가 되자 유럽인의 생활에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보급된 것으로, 특히 영국에서는 청에서 수입하는 차가 생활필수품이 되어 여기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차는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식민지인 인도인에게 마약인 아편을 만들게 하고 이것을 차의 대금으로 청에 억지로 팔아 넘겼다. (삼각무역)

청이 아편의 수입을 금지하자 영국은 자유무역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군함을 파견하여 전쟁을 유도하였고, 드디어 1840년에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2년 남짓 계속되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영국 해군은 해상을 봉쇄하였고, 결국 1842년 청은 불평등한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조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점차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정보는 일본에도 전해져서 큰 충격을 주었다. (*2)

(*2) 아편전쟁에 관한 정보는 「네덜란드 풍설서(風說書)」를 통하여 일본에 전해져, 민중에게도 퍼졌다

45 페리 내항과 개국

4-1절 구미의 진출과 막부 말의 위기  45 페리 내항과 개국
[ 페리의 내항 ]
약 260년에 걸쳐 평화와 안정을 향유하고 있던 쇄국정책 하의 일본의 문호을 두드린 것은 미국이었다. 1853년 6월, 4척의 군함(구로후네)이 에도만 입구 가까운 우라가(가 나가와현[神奈川縣])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함에는 모두 100문에 가까운 대포가 실 려 있었다. 인솔자는 미국의 해군 제독 페리로, 일본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는 대통령의 국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막부는 어쩔 수 없이 국서를 수취하였다. 페리는 회답을 얻기 위 해 다음 해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의 고뇌 ]
페리가 떠난 후 로주(老中, 역주: 쇼군을 보좌하는 최고의 관직) 아베 마사히로(阿部政弘)는 반 년 뒤에 올 페리에 대한 회답에 고심하였다. 무엇보다 단순한 방법은 요구를 거부하고 외국선을 무력으로 물리치는 양이(攘夷)(*1)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력의 진보를 멈추고 있던 에도막부가 실제로 양이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 단독으로 방침을 정하는 것 보다, 모든 다이묘의 의견을 듣고 국론을 통일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이묘의 의견 중에도 명안은 없었다. 또한 이로 인해 나라의 중요한 정책은 막부의 생각 뿐 아니라 많은 의견을 들어 합의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고가 확산되어 막부의 권위는 오히려 저하되어 갔다.

(*1) 오랑캐(夷, 외국)를 물리친다는 것.

[ 일미화친조약과 해리스의 내일(來日) }
1854년 1월 페리는 다시 가나가와 앞바다에 나타났다. 교섭 끝에 막부는 페리의 요구에 응할 것을 결단하였다. 3월 미국과의 사이에 일미화친조약을 맺고 일본은 개 국하였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은 시모다(下田, 시즈오카 현)와 하코다테(函館, 북해도)의 두 개 항구를 열기로 하고, 미국 선박에 석탄, 식료, 물을 보급하고 시모다에 미국 영사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1856년 일미화친조약에 의거하여 시모다에 부임한 미국 총영사 해리스는 무역을 개시하기 위하여 새로운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해리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고 판단 한 막부는 조정(朝廷)의 허가를 얻어 조약을 맺으려고 하였다. 막부는 정치 권한을 조정으로부터 부여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미국을 격퇴하는 양이(攘夷)를 취할 것인지 아니면 통상조약을 맺어 개국을 취할 것인지는 국론을 양분하는 큰 문제가 되어, 양 쪽 세력은 조정에 대해 영향을 끼치고자 시도하였다. 교토의 조정은 한 순간에 국정의 주 무대가 되었다.

46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전개

4-1절 구미의 진출과 막부 말의 위기  46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전개
[ 일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막부는 조정의 허가를 얻지 못한 채,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맺어 하코다테(函館), 가나가와(요코하마[橫濱]), 니가타(新瀉), 효고(兵庫縣, 고베[神戶]), 나가사키(長崎)의 5개 항구를 열었다.

그 후 일본은 외국 나라들과(*1) 위와 같은 조약을 맺었지만, 이들 조약은 일본에서의 외국인 범죄를 일본측이 재판할 수 없고(치외법권), 일본에게 수입 관세율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 (관세자주권)가 없는 불평등조약 이었다.

(*1)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각각 조약을 맺었다.

[ 존왕양이 운동 ]
막부가 통상조약에 조인한 것에 대해, 조정의 의향을 무시하고 외국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이것은 조정을 받드는 존왕(尊王)과 외국을 배척해야 한다는 양이(攘夷)의 요구가 연결된 존왕양이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조약 체결을 추진한 막부의 다이로(大老, 역주: 쇼군을 보좌하는 최고의 관직) 이이 나오스 케(伊井直弼)는, 미토번(水戶藩, 이바라키현)의 전(前) 번주인(藩主, 역주: 번의 영주,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와 조슈번(長州藩, 야마구치현)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등의 존왕양이파 100 여명에게 극심한 탄압을 가하였다. (안세이의 대옥, 安政의 大獄) 그러나 1860년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에도성으로 출근하는 도중에 사쿠라다몬 근처에서 안세이의 대옥에 분개한 미토번 등의 낭사(浪士, 역주: 주군을 떠나 봉록[封祿]을 잃고 떠도는 무사)들에게 암살되었다. (사쿠라다몬가이 사건[櫻田門外의 變]) 이 사건으로 막부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과거에 세키가하라의 싸움에 패하여 영지가 축소되어 있던 조슈번은 막부 비판 세력의 중심이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숙(私塾, 역주: 사설 교육기관)에서 제자들에게 존왕양이에 대해 강설하여 큰 감화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쇼인이 안세이의 대옥에서 처형되자 그 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2) 등은 조슈번을 움직이게 되고, 일부의 구게(公家)와 연결하여 조정을 강경한 양이론으로 유도해 나갔다.

(*2) 당시에는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 양이(攘夷)의 결행 ]
조정의 양이 요구에 눌린 막부는 1863년 각 번(藩)에 양이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조슈번은 시모노세키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해 양이를 결행하였다. 이듬해 영미불란(英米佛蘭, 역주: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4국 군함이 연합함대를 이루어 보복을 위해 왔다. 조슈번은 구미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참한 패배를 하였다.

막부 말에 있어서 조슈번과 어깨를 겨루는 유력한 세력은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이었다. 1862년 에도로부터 귀국(歸國, 역주: 자신의 영지로 돌아감) 길에 있던 사쓰마번의 행렬에 4 인의 영국인의 말이 접촉하여, 이를 무례하다고 해서 수행 무사가 한 명의 영국인을 베어 죽였다(나마무기사건[生麥事件]). 이듬해 배상을 요구해 온 영국함대와 사쓰마번이 싸워 가고시마 거리는 불바다가 되었다.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

외국과 전쟁을 한 삿초(薩長, 역주: 사쓰마와 조슈) 양 번의 양이파 무사들은 서양문명의 힘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단순한 양이론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연중에 개국론으로 전환하면서 막부비판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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