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1] 한일 상생의 역사 p295

사람은 개인이든 국가든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 낫기 때문에 집단생활을 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된다. 크게 보면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식물과 동물은 둘 가운데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는 긴밀한 의존 상태에 놓여 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는 크게 공생관계, 기생관계, 천적관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공생관계는 서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관계이고 기생관계는 서로의 관계에서 한쪽은 이익을 얻는데 다른 쪽은 피해를 입거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관계이다. 또한 천적 관계는 한 쪽이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쪽이 사라져야 하는 불구대천의 원수관계이다.

과거 미국에서 백인들은 흑인노예들을 혹사하며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의 백인과 흑인 노예의 관계는 일방적인 수탈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백인들이 흑인의 노동력에 기생했던 관계이다. 개와 고양이는 애완동물로 자리를 잡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날로 수가 늘어나고 있고 사람도 이들로 인해 위안을 얻고 있으니 이는 상생(공생)의 관계라 하겠다. 또한 과거 나치독일은 심각한 오해에 근거한 이론을 만들어 유태인과 슬라브인 등을 열등민족으로 구분, 멸종시키려 했기 때문에 나치즘과 이들 두 민족은 인간과 페스트균의 관계처럼 불구대천의 원수관계가 되는 것이다.

전후 반세기가 넘게 우리 민족 사이에 암묵적으로 계승 발전되어 온 반일감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수탈을 당했다는 판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판단 위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이 진심으로 과거의 악행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며, 그래야만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우정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같은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니 양국관계에는 형식적인 진전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우정과 신뢰가 싹틀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놓고 볼 때 한일관계는 결코 수탈이나 기생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 공존의 관계였다고 생각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온 역사를 일방적인 수탈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면 진정한 우정이 싹틀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오늘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누구누구의 집안이 일제시대 친일파였던 것 같다느니,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옛 은사를 찾아 '선생님 저 도요타(風田)입니다' 라고 인사를 했으니 친일행위라느니 하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의 낙인이 찍히면 과거 간첩의 낙인이 찍힌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든 사회생활이든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니, 정치인이나 학자 교수 작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말이 나오면 펄쩍 뛰며 어떻게 해서든 친일파로 분류되는 것만은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는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의 4 배가 넘는 인구가 있었다. 게다가 칼 솜씨가 좋아야 출세할 수 있는 무인 사회였기 때문에 글공부를 최고의 가치로 치던 조선보다는 무력에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간동안 일본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갈라져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을 천하라고 부르는 것이다. 밖으로는 딱히 갈 데도 없으니 그들에게는 일본만이 유일한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고, 간혹 영웅이 나와 일본 전체를 장악하기라도 하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칭송을 받았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조선이 강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작은 나라들로 나눠져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간혹 천하통일을 이루게 되면 조선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다. 동으로는 태평양, 북으로는 차가운 시베리아가 있으니 조선을 통하지 않고는 대륙으로 진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뒤 여세를 몰아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게 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통일 국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우여곡절 끝에 조선을 병합하고 대륙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말의 일본과 19세기말의 일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은 한반도를 침략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물을 약탈해간 도적 떼였다. 하지만 19세기말의 일본은 근대적인 헌법과 선거제도, 정치체제를 갖춘 세련된 현대국가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정을 겪으면서 근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신속히 개화된 사회로 변모해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있었는데, 당시 열강의 각축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조선과 청나라 등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해 각종 이권을 획득하고 시장을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조선의 당면 과제는 미개한 중세의 정치제도를 타파하고 근대사회로 변모하는 것이었다.

왕과 귀족에 의한 전제 계급사회에서 벗어나 법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로 변화하는 것은 조선이나 일본 뿐 아니라 당시 전 세계 모든 국가에게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이는 19세기말 시민혁명의 조류 속에서 변화를 거부한 청나라와 러시아 조선의 왕조들이 차례로 멸망한 반면, 뒤늦게나마 시민혁명에 성공한 독일과 일본 등이 당당히 국제사회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쉽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즉 19세기말 조선에 있어서 체제를 뒤집는 혁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조선에서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은 동학운동과 개화당이라는 두 갈래로 진행되었는데, 둘 가운데 하나만 성공할 수 있었어도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조선을 거쳐 대륙으로 진출해야만 하는 일본의 이해관계와 시민혁명을 통해 문명개화를 이룩해야 하는 조선의 이해관계는 서로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민비나 대원군 등 왕족의 이해관계에서 보지 않고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을 통한 강제 개항, 1884년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성공했던 갑신정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가능했던 갑오경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일본은 국운을 걸고 끊임없이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추진하고 부추기려 했다. 이 시기에 조선의 개혁파들은 모두 친일 노선을 선택했는데 이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조선의 개혁을 후원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 상생의 역사 ]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인들을 해적에서 평화적인 교역대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회유책을 추진하였다. 왜인들이 자주 한반도의 해안을 침략하는 원인이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으므로 이들에게 교역을 허가함으로서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평화적으로 통교를 원하는 경우 왜인들이 남해안의 어느 포구에서든지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 초에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일본인들이 조선에 출입하게 되었다.

왜인들은 처음에 경상도의 해안을 주로 이용했다. 그러다 시일이 흐르면서 점차 지역을 확대하여 여러 지역으로 무질서하게 내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그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1407년(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를 왜인의 출입항구로 한정시켜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상경한 왜인에게는 한양에 동평관을 설치하여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1419년 쓰시마정벌 이후에는 염포를 추가해 부산포, 제물포(인천), 염포 등 삼포제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왜인들은 이 지역에 한해 배를 정박한 뒤 지정된 숙소에 머무르면서 교역과 관광 및 학술조사 등을 할 수 있었다.

이후 1544년이 되자 조정에서는 다른 곳의 왜관을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제도를 실시했다. 그 뒤 왜관은 몇 차례 장소를 옮긴 후 1678년에 초량 왜관이 건설되어 양국의 외교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왜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외교 및 무역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868년 이후 일본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이룬 일본은 국제무대에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적극적으로 교역을 하려 했으므로 단일 왜관을 통한 제한적인 교역으로는 그 뜻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에 대해 보다 폭넓은 대일 문호개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양 나라들과 전쟁을 치른 뒤 쇄국정책을 더욱더 강화하고 있었던 대원군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전 세계를 나눠 점령하였고, 마지막 남은 중국마저도 서유럽 열강들에 의해 사실상 분할 점령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다른 열강들보다 먼저 조선에 진출하여 세력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사활의 과제가 되었다. 그로 인해 1872년 일본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조선의 보호국인 청나라와 전면전을 치를 능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제한적인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 정부를 굴복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바로 1876년의 운요호 사건이다.

조선에서는 1863년 철종이 죽고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는 중국을 통치하던 만주족들의 부패가 극심하여 청의 국력이 약해진 시기였다. 이를 틈타 영국은 1842년 아편전쟁을 일으켜 홍콩을 차지했고,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청나라에 상륙, 광동성을 점령하고 점차 북상해 북경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곧 조선에 전해졌다. 서양 오랑캐에 의해 청나라의 수도가 함락되고 함풍제가 만주의 열하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서양 오랑캐들이 만주마저 점령하게 되면 황제는 당연히 조선으로 도망 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마저도 오랑캐들에게 침범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양반과 부유층들은 미리 보따리를 챙겨 남쪽으로 피난을 갔고, 백성들은 서양 오랑캐한테 살아남으려면 천주교를 믿어야 한다는 소문에 따라 일부러 가슴에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행동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통상과 이권을 원했던 것이지 중국을 점령하는 데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이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 사이에 평화교섭이 이루어져 함풍제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고, 러시아는 중재의 댓가로 청나라로부터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를 넘겨받았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가 된 것이다.

한편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다가,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천주교도 8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몇 년 전 영불 연합군이 청나라를 침공하고 북경을 점령한 전쟁이 단지 프랑스 선교사 1명이 피살된 사건 때문에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대원군의 이 같은 행위는 대담하다못해 무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1866년 5월 간신히 살아남아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압록강을 넘어 중국 천진으로 도망갔다. 천진에는 당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리델 신부는 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고, 그 해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함이 포함된 7척의 함대와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다.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서울을 점령하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 제독은 군함 5척과 해병대 1200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들의 목적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이었다. 이들 역시 강화도에 상륙하여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관군과 의병까지 동원된 조선의 치열한 반격을 못 이기고 퇴각하고 만다.(신미양요)

조선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도 못 막아낸 양이를 격퇴했다는 기쁨에 빠져 더더욱 쇄국정책을 강화했는데, 이는 조선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옴에도 싸우지 않음은 즉 화하는 것이요, 화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고 적힌 척화비를 전국곳곳에 세워 쇄국을 아예 국시로 삼아 버렸다.

그렇다면 프랑스와 미국 함대는 작은 조선 하나도 굴복시키지 못할 정도로 약했던 것일까. 당시 이들 열강의 침공은 본격적인 침공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에 대한 보복 성격을 지닌 소극적인 군사행동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경영에 집중하고 있었고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해외에 눈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던 시기이다. 청나라 침략의 선두에 섰던 영국은 당시 인도에서 발생한 내란의 수습에 골몰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동진정책의 성과물인 연해주 개척과 블라디보스톡의 군항 건설에 바빴다. 그러므로 이들 서양 제국은 모두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시킬 적극적 의도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소규모의 병력만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완강한 저항을 받자 더 이상 군대를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유신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키우면서 첫 번째 목표인 조선 진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1874년 일본은 사소한 사건을 핑계로 연습 삼아 대만을 정벌했는데, 이는 일본의 무력이 만만치 않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일본군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준비를 거쳐 일본은 1876년 무려 30척의 대규모 함대와 전투부대를 파견, 강화도에 상륙했다. 조선군은 나름대로 열심히 항전했지만 무기체계를 비롯한 전쟁수행 능력에서 두 나라의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계속 저항하다가는 서울까지 함락될 것이 뻔한 상황이 되자 조선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 일본과 수교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비록 무력에 의한 강제이긴 했지만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해 시급한 과제였던 개항과 문호개방을 성취하게 됨으로써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국가이익과 조선의 당면과제는 대체로 같은 방향이었으며 그 결과 일본의 무력행사가 조선에게 있어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의 조선 개항은 22년 전인 1854년 미국함대에 의한 일본의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일본이 조선에 그대로 갚아준 사건으로서, 두 사건은 비록 군사적인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지만 개항 당사국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변화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청 일본 조선 등 동아시아 3국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 세력에 저항하다가 차례로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경험하게 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1842년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1854년 조선은 1876년에 각각 개항을 맞았다. 이 가운데 일본만이 14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끝에 사쓰마-조슈 지역을 근거로 한 연합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여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도입하고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항시기 일본은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통치자 천황과 모든 권력을 쥔 에도 막부로 권력이 2원화되어 있었는데, 이 점이 격변기에 신속하게 개혁을 이루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에도 나름대로 개혁세력이 존재했으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쥔 전제 군주는 강력하게 변화에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근본적인 개혁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를 향해 눈을 뜨게 되었고 많은 관리와 민간인들이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를 여행해 신문물을 접하고 신사상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처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정부 관리가 조정회의에서 말하길, 일본에서는 쇠로 만든 시커먼 마차가 연기를 뿜으면서 달리는데 그 빠르기가 어떠한 준마보다도 빠르며, 전신기를 통해 천리밖에 떨어진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하자 이를 아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미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례는 당시 조선이 신문물에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과제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일본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 및 러시아와 대립하면서도 조선의 혁명세력을 일관되게 지원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84년의 갑신정변과 1894년의 갑오경장이다.

[3-2] 조선의 별 (혁명가 김옥균) p306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성난 백성들은 궁궐까지 쳐들어와 민비를 죽이려 했다. 궁궐을 탈출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민비는 충주의 장호원에 머물면서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따라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 1개 여단 4천명이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13명이 참살 당하는 등 피해를 입자 공사관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군대 500여명을 서울에 상주시키게 된다. 임오군란으로 인한 청군과 일본군의 주둔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외국 군대가 서울에 상주하게 된 사건으로, 그 역사적인 의미가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1870년 경 조선에는 천주학과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사상, 그리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학(서양 학문) 등의 영향으로 박규수, 유홍기 같은 중인계층에서 개화 1세대가 생겨났다. 이들은 나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가문의 청년 엘리트를 포섭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 개항 직후인 1880년대가 되자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빌붙어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고종과 민비 등 황실 세력에 의해 탄압을 당하자 향후 정치 노선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러시아의 혁명세력이 온건 멘셰비키와 급진 볼셰비키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김홍집이 이끈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유교 체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고 청국과는 종래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노선은 당시 청에서 일어나고 있던 양무개혁 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 뿐 아니라 근대적인 정치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수구반동세력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했으며 조선이 문명개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급진파만이 실질적인 조선의 혁명세력이었고 이후 이들은 개화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사이비 개혁파와 민씨 일파, 청나라 등 수구 반동세력의 연합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자, 본격적으로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들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상주하고 있던 외국 병력은 청나라 1개 여단, 일본 1개 대대로서 청군이 일본군보다 8배나 많았다. 하지만 2년이 지난 1884년 베트남의 지배권을 놓고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시적인 군사력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전선에 군대가 부족했던 청나라는 1884년 8월 조선 주둔군 가운데 절반을 빼돌려 베트남 전선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청불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싱겁게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서양제국과 벌인 모든 전쟁에서 일패도지함으로서 대국의 체면에 손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주변 국가들은 청나라를 종이호랑이로 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국제환경의 변화에서 자신감을 얻은 조선의 혁명가들은 비로소 거사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는 거사 계획이 결정되자 개화당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접촉해 혁명군의 의도를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 측에서는 이들의 쿠데타가 성공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판단, 조선주둔 일본군을 동원해 혁명을 호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개화당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개화당은 일본이라는 든든한 우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혁명군의 군사력은 자체 병력 150명과 일본군 500명 등 650명에 불과해 청의 주둔군 2000명에 비해 숫자에서는 열세였으나, 그 사기와 전투력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청의 군대를 감당해낼 만한 수준이었다.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1884년 10월 17일,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은 일본군의 호위 아래 우정국 개설 기념 연회가 벌어지고 있던 장소를 기습, 민씨 정권의 수괴들을 대부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혁명군이 참살한 민씨 척족들은 민영익,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 실질적으로 민씨 정권을 움직이던 핵심인물들이었다. 연회장 습격이 성공하자 개화당 가운데 관직을 갖고 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3명은 경복궁으로 입궐, 자고 있던 고종을 깨워 거처를 경우궁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어 사태파악을 위해 경우궁으로 고종을 알현하러 온 민씨 정권의 요인들을 차례로 살해하였다. 이날 개화당은 일본군의 호위 아래 경우궁에서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삼아 수구파를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은 서울에 있는 모든 외국 공관으로 사절을 보내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한편,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에 홍영식, 호조참판에 김옥균, 전후영사겸 좌포장에 박영효, 조우영사겸 우포장에 서광범, 병조참판에 서재필 등을 임명했다. 혁명 정부는 이어 14개항의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청으로부터의 주권 독립, 신분제도의 철폐, 조세제도 개혁, 경찰제도 신설, 행정기구 개편근대적인 국가의 형성을 위해 시급한 조치들이 담겨 있었다. 개화당 정부가 발표한 14개조는 다음과 같다.

1.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해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육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혁명정부의 이 같은 초기 14개 정강은 일단 신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군사력과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정권의 기반이 안정 되는대로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일본식 유신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눈치 챈 민비에 의해 고종은 다음날 창덕궁으로 돌아갔고 1884년 10월 19일, 민비의 요청을 받은 청군은 혁명 정부가 위치한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초 혁명군의 지도부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이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가능성, 개입을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공격하다 물러날 가능성,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혁명정부를 붕괴시키려 할 가능성 등 3가지 경우를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청불 전쟁에 패해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국이 조선의 신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신흥 강국인 일본과 정면충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최악의 경우 청군이 사생결단의 각오로 공격해오더라도 이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현실로 드러난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당시 조선에서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면서 국정을 좌우하고 있던 원세개는 사력을 다해 개화당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다. 청의 입장에서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베트남을 잃은 마당에, 이제 조선마저 일본식 유신을 이룩하고 독립하게 된다면 이로울 것이 없었다. 반면 개화당이 기대했던 일본군은 갓 태어난 조선의 혁명 정부를 수비하는 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군이 예상외로 강력하게 창덕궁을 공격하여 혁명수비군을 밀어붙이자 일본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일본은 당초 청나라 주둔군과의 정면충돌까지는 계산에 넣지 않았으며, 서울의 일본군 1개 대대로 청군을 제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추가로 병력을 파견하여 청군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종이호랑이라고는 하지만 당시로서 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일본은 아직 힘이 약했다. 일본군이 퇴각하자 신복모 윤경완 등이 이끄는 조선혁명군 100여명은 숫적인 열세와 빈약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전멸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개화당의 혁명정부는 3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창덕궁 전투에서 수많은 혁명 열사들이 청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지도부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에서 10년 동안 머물다 청나라로 건너갔지만 상하이에서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의 손에 살해되었다.
조선 말기,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던 시절 분연히 떨쳐 일어나 조선을 부강한 자주독립국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만고의 애국자 김옥균은 이렇게 이국땅에서 매국노의 손에 죽어갔다. 개화당은 1894년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대원군 주도의 갑오개혁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꿈이었던 조선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한 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조선말기 개화 혁명가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봉건제도 아래의 일본만이 자체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개혁파들은 사쓰마 한과 조슈 한을 중심으로 일어나 막부에 대항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 한(번)은 독자적인 군주와 영토, 군대를 가진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의 존왕개혁파는 스스로 무력을 가지고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연합군을 결성, 막부에 대항할 수 있었다. 반면 모든 군사력과 행정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과 청나라의 개혁운동은 앞선 지식과 사상을 지닌 엘리트 개혁세력과 무력에 의존한 하층 계급의 폭동이라는 양 갈래로 분리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개화당이 1890년대에 들어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던 동학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다면 조선에서도 일본식 유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말기 개화당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이상적인 모델이었고 이들은 조선을 일본처럼 개조해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자발적으로 개혁을 이루기엔 모든 면에서 너무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조선과 같은 약소국이 독자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동시에,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성취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서 일본식의 개혁을 추구해 조선을 근대사회로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과 병합하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의 왕족과 수구파는 끊임없이 개혁을 거부하면서 정권을 연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위대한 혁명운동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그들의 종교 집단이라는 특성상 중앙의 엘리트 혁명가들과 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처음부터 실패가 불가피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 혁명이 주요 과제였던 조선말기에는 개혁적인 친일파만이 유일한 애국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과 한일합병 등을 추진했던 친일파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1884년과 1894년, 1904년 이렇게 20년간을 놓고 보면 당시 일본의 국력이 10년마다 일취월장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일본은 청나라에 대항하지 못해 힘들게 성립한 조선의 혁명정부를 포기한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1894년에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개혁이라는 비슷한 문제로 대립했을 때 일본은 청나라와 전면전을 감행, 승리를 거두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 인해 조선에는 다시 한번 자주적인 근대화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갑오경장이다.

그러나 이 갑오경장마저도 일본이 3국 간섭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틈을 타 민비 등이 재빨리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갑오년의 개혁정부를 무너뜨린 조선 왕실은 모든 개혁의 성과를 철폐하고 다시 예전의 왕조 독재체제로 회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에도 일본은 너무나 큰 적 앞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고, 조선 혁명의 좌절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 힘을 기른 일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공한 뒤 만주와 한반도로 기세 좋게 침략해 내려오던 러시아에 맞서 전면전을 감행했고 기적과도 같이 승리를 거두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일본만의 영광이 아니라 당시 백인들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던 전 세계 모든 유색인종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당시 일본은 자신의 힘을 냉철하게 파악하여 힘이 부족할 때는 이를 악물고 물러설 줄 알았고, 다시 힘을 길러 이제는 해볼만하게 되었다고 판단되면 정면 대결을 통해 적을 물리칠 줄 아는 현명한 국가였다.

개항 이후 조선에게 절대절명의 과제로 남아있던 근대화 개혁은 부패한 고종과 민씨 척족들에 의해 무려 30년 동안이나 가로막혀 있었으며, 이들은 번번이 외세를 끌어들여 개혁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의 군사력이 수구외세를 제압할 때마다 조선에는 자주독립과 근대화 개혁이 시도되었으며, 일본이 패퇴하면 조선은 다시 중세 암흑시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 시민정신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도입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중세의 낡은 전제정치에 의존하고 있었던 청나라나 러시아는 결코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를 바라지 않았으며 조선의 반동수구세력을 이용하여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반면 조선과 비슷한 처지에서 신속하게 발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일본은 조선이 하루빨리 개혁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시장경제체제가 정착되기를 원했다. 이 같은 이유로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의 혁명세력을 후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낡고 부패한 조선왕조의 쓰레기들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일본과 다른 외세와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이 같은 일본의 입장에 따라 당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공동운명체였으며, 일본의 진출로 인해 비로소 조선은 제한적이나마 개항과 근대화의 혜택을 맛볼 수 있었다. 1876년의 개항,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갑오개혁, 그리고 1895년의 민비살해 등은 개화기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명백한 공헌이며, 오늘날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이 점에 대해 일본을 전근대적인 왕조시대의 시각으로 예단하고 비난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개항 이후 조선 내부의 개혁세력을 측면 지원함으로써 조선을 스스로 개혁시키려던 노력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직접 전면에 나서 1905년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며, 1910년에는 조선을 흡수합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조선에는 이씨 왕조의 낡은 유산이 완전히 제거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도입되어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개항이후 합병에 이르기까지 34년 간 일본과 조선은 대륙진출과 근대개혁이라는 서로 상이한 목표와 이해관계 속에 조선이 개혁되어야만 일본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고, 일본의 힘이 커져야만 조선이 문명개화를 이룰 수 있었던 절묘한 상생의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가 주변국을 무력으로 침략하는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침략이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은 어두운 가난과 압제의 터널을 벗어나 개명된 근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생의 관계는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의 분단 이후까지 계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3-3] 어두운 죽음의 시대 p317

가렴주구(苛斂誅求) - 가혹하게 거두고 칼로 베서 빼앗는다는 뜻의 이 한자용어는 조선 말기의 사회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용어라 하겠다. 특히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 사회는 경주 김씨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정권을 잡고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다. 이 시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는데 많은 돈을 투자해 지방의 수령직을 산 방백들은 백성을 가혹하게 갈취해 투자원금을 회수하는 한편, 그 돈으로 다시 중앙의 고관과 줄을 대 신변을 보호받는 방식으로 부귀영화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이 시기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주로 3정의 문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3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한다. 먼저 전정(田政)이란 토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인데, 본래 조선의 농민들은 국가 소유의 땅을 경작하면서 토지 1결당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세금을 납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이 전세보다도 토지에 부과되는 각종 잡세와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당시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다고 하는데 본래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에 부과되는 세금이지만 지주들은 이를 소작농에게 전가하였다. 특히 전라, 경상 지방에서 이 같은 불법행위가 많았다. 또한 지방 아전들은 허복, 방결, 도결 등 여러 가지 농간을 부려 농민의 등을 처먹었기 때문에 전정의 문란은 조선후기 사회의 고질병이었다.

군정(軍政)은 조선 왕조가 백성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을 말한다.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물론 15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군인으로 징발했으나, 평화시에는 군에 입대하는 대신 이를 옷감으로 받았다. 영조 때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들이 국가에 바치는 군포는 연간 베 2필에서 1필로 부담이 줄긴 했으나, 점차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층이 늘어나면서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날로 커져만 갔다. 또한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했으므로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 무리한 정책을 펴는 경우가 많아 백성의 고통이 심했다.

환곡(還穀)이란 3월에서 5월 사이 보릿고개에 관에서 양민에게 곡식을 빌려주어 춘궁기를 넘기게 한 다음, 가을에 다시 돌려받는 정책을 말한다. 원래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정책이지만 지방의 관리들은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제공된 환곡의 양을 속인 뒤 가을에 농민으로부터 훨씬 많은 양을 거두어들인 다음 남는 양을 착복하곤 하였다. 이로 인해 추수기에 모든 양식을 빼앗긴 농민들의 생활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세기 초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중앙 정부의 인사권과 정책결정권을 독점한 뒤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해 벼슬자리를 사고팔았으며 이로 인해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호 세력은 마음껏 백성을 착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이에 따라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해 정조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민란은 점차 조직이 갖춰지고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1862년에 이르면 전국에서 37차례에 걸쳐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안동 김씨 정권이 무너지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정권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이라 한다.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1862년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부패와 착취 때문이었다. 민란이 일어나기 전 백낙신은 직위를 이용하여 약 5만 냥의 돈을 착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쌀로 환산하면 1만 5천 석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게다가 당시 백낙신의 지휘를 받는 하급 관료들은 진주목에서 공금과 군포를 횡령해 빼돌린 뒤 농민들에게 이를 부담시켰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석이나 되었다. 1석이란 과거 농업사회에서 성인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고살 수 있는 양의 곡식을 말하는 단위로서, 지금으로 치면 한 가마 정도 되는 분량이다.

자신의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양은 유럽이나 일본의 봉건시대에 지방 군주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비슷한 단위를 사용했다. 즉 천석군이라는 말은 1년에 자신의 영토에서 10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지주라는 뜻인데, 이는 그가 약 1000명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봉건제도가 발달했던 일본에서는 1석이 1 고쿠인데, 지방을 다스리는 왕들은 작게는 10만 고쿠에서 크게는 30만 고쿠까지를 수확할 수 있었다. 즉 30만 고쿠의 영주라는 것은 매년 자신의 영토에서 30만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왕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30만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의미이며, 전시에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1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던 19세기말 진주에서 일개 관료들이 1만5천석, 2만8천석을 횡령했다는 것은 다음해 보릿고개에 1만5천명, 2만8천명의 농민이 굶어죽을 것이라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굶어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어쨌든 이렇게 봉기한 농민군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지만 농민군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못된 아전들을 죽이고 악질 지주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23개 면을 휩쓸면서 10만 냥의 재물 손실을 일으켰다. 당시 진주의 농민군이 백낙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이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비록 탐관오리라고 할지라도 왕의 대리인인 관리를 함부로 처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폭발한 임술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 경기도로 확산되어 무려 37차례의 크고 작은 농민봉기로 이어졌으며 농민들은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들고 일어나 조선왕조의 학정에 대항하였다. 특히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발생한 것으로 농민봉기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여러 가지 사회 모순으로 인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왕실과 소수 특권층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백성을 쥐어짜 자신들의 배를 불릴 궁리에 여념이 없었으며 지방의 관료와 토착 양반계급은 서로 결탁해 힘없는 농민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은 유교의 잔혹한 규범에 묶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야 했는데, 예를 들어 조선 왕조는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남편이 죽게 되면 아내도 스스로 자결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남편을 따라 여자가 자결하면 이를 기리는 열녀문을 세워 귀감으로 삼고 후한 상을 내렸으므로 가문의 중흥을 꾀하던 사대부가에서는 일부러 미망인을 살해한 뒤 자결한 것처럼 꾸미는 일이 허다했다. 양반 계급에서도 적서 차별로 인해 정부인의 자식이 아닌 사람은 아버지를 나으리로 부르도록 하고 천민 대접을 하여 이들은 체제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공직사회의 부패와 조선 체제 내부의 갈등은 개항 이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돈으로 관직을 산 지방 탐관오리들의 부패가 가장 큰 문제였으나 개항 이후에는 아예 왕실과 중앙 정부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부패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제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갖추지 못했던 조선 왕실은 재정이 고갈되자 당오전 당백전 등 고액의 화폐를 마구 찍어내 사용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1883년 민비 일파가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근대적인 화폐제도의 도입 없이 고액권을 찍어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사반대했으나 민비는 고종을 설득해 끝내 이를 결정해버렸다. 이후 정부는 당오전으로 모든 정부 지출을 집행하기 시작했으나 상평통보 5개의 가치를 갖는다고 적혀있는 것과는 달리 당오전은 시중에서 상평통보의 2배 정도의 가치로만 통용되었다. 정부에서 일정한 기준 없이 화폐를 남발하는 것도 심각한데 그것도 고액권을 남발함으로써 조선 경제에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당오전의 실제가치와 액면가치가 다르게 유통되자 지방관리들은 세금을 받을 때에는 상평통보로만 받고, 중앙 정부에는 당오전으로 지급해 그 차액을 챙기는 새로운 횡령수법을 사용했다. 주민으로부터 1만냥(상평통보 1만개)의 세금을 거둔 뒤 이 가운데 4천냥으로 당오전 2천 개를 매입한 뒤 이를 중앙에 납부하고 차액인 6천냥은 자신들이 빼돌리는 방식으로 지방 관리들은 엄청난 공금을 횡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역사상 가장 뇌물을 좋아했던 임금이었던 고종은 모든 정부관직을 매매할 때 직접 돈을 받아 챙겼고 신하들이 인사차 방문할 때마다 가져오는 돈의 액수로 사람을 대했다고 하니, 조선판 전두환 쯤 되는 인물이었다 하겠다. 혹은 전두환을 현대판 고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한국방송공사, 한국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뇌물 편) 고종은 매월 말 8도의 재산가를 불러 모아 참봉, 도사, 감역 등 중앙관직을 일종의 경매 형식으로 팔아치웠고 지방 수령을 임명할 때에는 입찰 방식으로 관직을 매매했다.

고종의 입찰방식이란 지방 수령직을 원하는 여러 후보자들에게 일단 돈을 받은 다음 제출한 액수에 따라 상위 순번을 몇 명 골라 다시 입찰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현감 목사 감사직은 가장 많은 돈을 낸 후보자에게 낙찰되었으나 입찰에 떨어진 사람들도 이미 낸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고종 특유의 잔머리 굴리기 입찰이었다. 가격은 하급직의 경우 1만냥, 요즘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감사직은 50만냥 수준에서 낙찰되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시험의 합격자도 돈으로 결정되어 소과 합격은 3만냥, 대과 합격에는 10만냥이 필요했다. 1893년경이 되자 조선 정부는 수입을 늘이기 위해 1년에 10여 차례나 과거시험을 시행하는 등 매관매직의 인플레이션도 극에 달했다.

또한 개항 이후 상품유통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중앙부처와 지방관청, 지방 토호(유력인사)들이 서로 나서 유통되는 모든 물품에 갖가지 명목의 세금을 붙이기 시작했다. 법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사회에서는 그저 힘 있는 기관마다 필요에 따라 세목을 만들어 돈을 거뒀기 때문에 백성들은 한 가지 물품을 살 때에도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만 했다. 이처럼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전국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해 1893년이 되자 전국에서 한해에만 65건의 농민반란이 발생하는 등 조선사회는 사실상 통제력을 잃고 내부에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1893년의 민란은 임술민란 이후 30년 만에 다시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4] 사람이 곧 하늘이다 p324

1824년 경상북도 경주의 한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최제우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최제우는 한학을 공부한 다음 1844년부터 10년 동안 도를 닦기 위해 나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조선말기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탐욕에 눈먼 관리들이 힘없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생지옥과 같은 현실은 최제우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최제우는 어지럽고 병든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 결심한 뒤 울산의 한 산골짜기에 암자를 짓고 도를 닦기 시작했다.

1856년 천성산에서 도를 닦기 시작한 최제우는 이듬해에는 굴에서 49일간 기도를 하는 등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처럼 도를 닦기 시작한 지 4년 뒤, 최제우는 마침내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고 동학을 창시하기에 이른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합치고 예전부터 우리 민족이 믿어오던 한울님 사상을 합쳐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동학의 중심 사상을 이끌어 내었다.

동학의 '한울님'은 천지만물을 낳고 그 속에 잠재해 있으면서 모든 일을 간섭하고 명령하는 무형의 기운이며 대우주의 정신이자 생명 그 자체이다. 이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포스'와 정확히 같은 개념으로서, 종교로서의 동학은 이미 세계 정신을 한 세기 이상 앞서간 훌륭한 것이었다. 당시 생지옥과 같은 삶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 민중들에게 동학의 가르침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인간존중, 만인평등의 사상은 커다란 호소력을 지니고 다가왔다. 민초들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종교로서 동학은 신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미개한 조선왕조의 눈에 동학은 체제를 위협하는 불순 사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교세가 점차 확장되던 1864년 최제우는 이상한 종교를 만들어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기만함)한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대구에서 처형된다. 그러나 동학은 2세 교주 최시형의 영도로 지하로 잠적한 뒤 계속해서 세를 불려나갔다. 당시 천주학과 동학은 신생종교로서 대원군의 탄압을 받는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천주학이 주로 양반과 부농 등 지배계층의 여인와 서자 등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데 비해 동학은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고통을 함께 하였으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민중 그 자체가 되었다.

최제우가 처형당한 뒤 무려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지하에서 세를 확장한 동학은 1892년이 되자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힘으로 조선왕조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심감이 생긴 것이다. 동학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첫 번째 사업은 교조인 최제우의 신원운동이었다. 신원(伸寃)이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누명을 벗긴다는 용어로서, 교조 최제우는 혹세무민한 역도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도를 설법한 성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동학교도들이 세를 과시하며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고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자, 이에 놀란 관리들은 옥에서 동학교도를 석방하는 등 유화책으로 대응하였다.

지방에서 시작한 교조신원운동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자 이에 고무된 동학의 지도부는 다음해인 1893년 손병희 등 지도부 40명이 상경, 광화문에서 연좌하고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복합상소를 올렸다. 복합상소란 같은 문제에 대해 여러 명이 집단으로 상소를 하는 것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연좌시위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고종은 이들에 대해 '일단 해산하고 생업에 임하면 요구를 들어 주겠다'고 거짓말로 달래 돌려보낸 뒤 복합상소가 끝나자 동학의 활동을 금지도록 명령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 주도하는 농민계층과 조선왕조의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1893년 3월 동학은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수만 명이 모여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동학이 충청도 보은집회에 2만명, 전라도 금구 집회에 1만명의 군중을 동원하면서 세를 과시하자 조선 정부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려 했다. 이에 시위대는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관군과 일대 결전을 준비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학 지도부는 무력항쟁을 포기, 집회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비록 물리적인 충돌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때의 집회 경험은 동학 지도부에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 동학은 1894년 새해가 밝자마자 전북 고부군에서 무장봉기의 횃불을 올릴 수 있었다.

처음에 고부사태는 우발적인 무력충돌로 시작했다. 1893년 당시 동학의 일개 접주에 불과했던 전봉준은 전라도 금구에서 대규모 농민 집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조직력과 정치력, 지도력 등을 축적한 바 있다. 이후 전봉준은 독자적으로 농민전쟁의 필요성과 봉기계획, 강령 등을 만들어 동학조직망을 통해 사발통문으로 유포하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던 중 평소에도 백성을 괴롭히기로 소문난 고부군수 조병갑이 고을의 저수지 아래 만석보라는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물세를 받아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농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성난 농민들은 조병갑 타도를 외치며 죽창과 낫 도끼 등을 들고 봉기해 순식간에 관아를 점령하고 창고를 열어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었으며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고부 농민들은 전봉준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일단 봉기했으나 이후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 그의 지도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농민군 사령관이 된 전봉준은 시급히 인근 고을로 사람을 파견, 봉기를 독촉하고 조직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준비가 갖춰지기 전에 중앙 정부에서 안핵사(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 이용태가 800여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공격을 시작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하였고 이들은 흩어져 따로 고부를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도 고부군을 포기하고 도피했다.

무사히 고부를 빠져나간 전봉준은 두 달 뒤 무장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사전에 뜻을 같이하기로 합의한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과 합류한 뒤 전면 봉기를 결의하고 농민전쟁의 취지와 향후 계획을 담은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 22일, 전라북도 무장군에서 조직된 군대의 모습으로 봉기한 농민군은 이때 4천명이었다. 이어 3월 25일 백산으로 진군한 농민군은 진용을 갖추고 곳곳에서 몰려든 자원병을 받아들여 병력을 8천명으로 증강했다. 농민군은 백산에서 [호남창의군 대장소]를 설치하고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련에 손화중과 김개남 등을 임명해 사령부와 계급체계를 갖추었다. 이들은 여기에서 "안으로 탐획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외적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내용의 격문과 4개조의 행동수칙을 제정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이후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기세가 등등해져 영광, 함평, 무안 등으로 남하, 관아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더욱더 병력이 늘어난 농민군은 4월 24일부터는 진로를 북으로 돌려 북상하던 중 전라남도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만나 격파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정읍, 원평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전주성에 도달하게 된다.

1894년 4월 27일 손쉽게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사령부를 설치한 뒤 성문을 굳게 잠그고 방어태세에 돌입하였다. 이어 도착한 관군은 전주성 주변에 진을 치고 포대를 설치한 뒤 전주성 탈환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전주성을 두고 대치한 농민군과 정부군은 그 뒤 몇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르지 못하였다. 이후 관군과 농민군이 성명전을 벌이며 소강상태에 돌입하자 겁이 많은 고종은 4월 30일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청군 2천명이 5월2일 아산만에 상륙했고, 5월 5일에는 일본군도 인천항에 상륙하였는데,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태였다. 과거 갑신정변 이후 1885년 일본과 청은 천진 조약을 체결, 조선반도에서 함께 군대를 철수하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해 양국 중 한쪽이 군대를 보내게 될 때에는 반드시 사전에 서로 통지하며, 사태가 해결되는 즉시 철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청군은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투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에 통고하였던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혁명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가 투입되면서 서울 시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많은 일본군과 민간인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살해된 일본인들의 원수를 갚고 조선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청나라와 전면전을 감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이 같은 국내의 강경한 분위기를 업고 일본정부는 청나라와 전쟁도 불사한다는 전제 아래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 지배권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힘겨운 상태였다. 따라서 청나라는 조선반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일본은 일단 조선에서 청과 대등한 군사적 지위를 얻게 된 것에 만족하고 선전포고를 훗날로 미루어 둔 것이다.

즉, 조선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청 사이의 전쟁은 이미 갑신정변 당시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당시 일본은 정부 내에서 청과 전면전을 벌이는 문제에 대해 의견조정이 돼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갑신정변의 혁명 정부를 지원하지 못하고 철수했던 것일 뿐, 후일 힘을 길러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뒤, 조선에서 농민군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조선 정부에서 청나라의 군사력 투입을 요청하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미루었던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자연스런 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미 이 때의 일본은 1884년 서울에서 청나라 군대 2천에게 꼬리를 내리며 후퇴해야만 했던 그때의 나라가 아니었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고 이어 일본군까지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정 개혁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시작한 그들의 전쟁이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는 구실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에 다시 외국의 군대가 상륙함으로써 이제 갑오년의 조선은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청군과 일본군의 네 가지 군사력이 병존하면서 복잡한 이합집산을 시작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조선반도에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 확실한 상황이 다가오자 가장 당황한 것은 조선 조정이었다. 여우를 잡기 위해 호랑이와 사자를 불러들인 격이니 이들은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서둘러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전라도 지방의 통치권을 동학군에게 넘겨주고 농민군의 모든 정치적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농민군과 조선 정부는 휴전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청과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군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한판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후 전라도 꼬뮌, 경복궁 쿠데타, 갑오개혁, 청일 전쟁, 동학군의 2차 봉기 등 숨가쁜 사태 전개가 이어지게 되는데, 이 모든 사건이 1894년 단 1년 동안에 일어났다는 점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1894년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였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