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1] 쇼비니즘의 광풍을 뚫고 p27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지속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정부나 민간 차원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양국이 비슷한 기간동안 비슷한 성격의 일본 통치를 거쳤음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까닭을 물어보면, 대체로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가 조선에 비해 15년 더 길었다는 것과 대만에는 일본 이전에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남북한이 보이고 있는 일본에 대한 유별난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북한의 경우 오랫동안 항일 독립운동의 전설로 알려진 조선혁명군 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반일정책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독립 이후 친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남한에서는 왜 이토록 반일감정이 심각한 것인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지닌 반일감정의 기저에는 과거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지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져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에는 먼저 역사학자들에 의한 자의적인 자료 조작과 왜곡이 자리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강력한 반일 교육과 이데올로기 책동이 깔려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라는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과 대만을 통치함에 있어 대체로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본토보다 더 많은 투자와 산업시설을 유치하는 등 유리한 대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일본에 있어 조선과 대만은 옆의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확장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이 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멀리 떨어진 호주나 뉴질랜드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현지에 일정한 돈을 투자해 수익을 발생시킴으로써 그 과실을 따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주지이자 일터인 상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상인이 힘들게 옆에 있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성을 다해 새로 생긴 가게를 단장하고 기존 점포와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대만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처지는 바로 이런 구멍가게 주인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을 두고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혹 장기적인 수탈이나 병참기지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며, 조선에 와서 힘들게 농토를 개량하고 사업을 일으킨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조선에 근대문명을 전파하고 조선을 신속히 개발하여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동화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과거 일본이 조선에 행한 선의의 시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즉 한국인들에게 존재하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또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같은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가 연합하여 조선 왕조 및 수구 반동세력을 무너뜨리고 일본과 연대하여 문명개화라는 조선혁명의 시대적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어용 사이비 단체 정도로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1904년 초 벌어졌던 러일전쟁에서 동학 교도들은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5만여 명의 병력이 참전하여 일본과 함께 싸웠다. 이후 동학 교도와 보부상들은 진보회를 결성하여 첫해에만 전국에서 38만의 조직원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독립협회 계열의 개화인사들과 연합하여 한일 합병과 개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때 100만이 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 외모에서 쉽게 구분이 되었기 때문에 보수 반동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진회는 결성 이후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하였고 그로 인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수많은 일진회원들이 살해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오늘날 한국이 일진회를 친일단체라 하여 비난하고 반동 폭도들을 의병이라 칭송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실수라 할 것이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일진회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혁명 조직이자 군사조직이었으며 조선 총독부조차도 그 힘을 두려워하여 합병 이후 강제 해산하였을 정도로 강력했던 조선의 정치조직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같은 공헌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의 성과물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이 미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유교근본주의가 외세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소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개혁, 그것도 일제에 의한 철저한 청산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시대가 우리에게 행운이었고 축복이었을지언정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불행한 과거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전후 한반도가 두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운 좋게도 분단을 피했다고 생각해왔다. 통일을 말할 때에도 남북한의 통일만을 얘기할 뿐 일본이나 대만과의 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제국이 5개의 지역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지 남북한이 분단된 것은 아니다. 승전국들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이들은 일본제국을 남한과 북한, 대만, 사할린, 일본열도의 5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각각 점령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할린만이 아직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고 나머지 4개 지역은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획득한 영토를 분리한다는 것은 승전국들의 논리였지 우리가 선택했던 것은 아니며, 물론 일본이 원했던 것도 아니므로 이는 분명 강제 분단이라 하겠다.

일본은 조선과의 분단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전후 독립과정에서 사할린과 대만은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한반도와는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 노력하였지만 힘없는 패전국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고 분단은 고정되어 버렸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뒤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대리통치인으로 앉혀 위성국가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반도 분단의 원흉, 더 근원적으로 구일본 분단의 원흉은 멀쩡한 나라를 패전국이라 하여 강제로 갈라놓은 미국 소련인 것이지 분단을 막아보려 애쓴 일본은 아니라 하겠다.

나는 어린 시절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전쟁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영화를 두어 번은 본 것 같다. 그 영화에서 일본은 하와이의 평화스런 미국인들을 기습 공격한 비겁하고 못된 나라였고, 나는 일본군인들을 저주하면서 제2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국이 멋지게 일본군을 때려잡을 것이라던 도라도라 2탄은 몇 년을 손꼽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최근 <진주만>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일본군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60년 전에 엄청난 규모의 항모전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출정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버린 일본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에 나는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일본이었으며 우리 조상들도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고 응원했을 것이 분명한데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현실은 일본제국의 영토였던 남한과 일본이 오늘날까지 미국에 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강요당한 멍에일 뿐, 분명 바람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체계적인 반일교육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반일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남한을 장악한 정치집단은 체제유지를 위해 북한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증오집단을 조작해 내었으며, 북한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오늘날에 와서는 일본에 대한 이데올로기 조작과 반일 책동 작업은 이를 이용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그 필요성이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정작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에 매우 호의적이다. 또한 과거 51년 간 일제시대를 경험한 대만에서도 반일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한국과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의 경우 공식적인 태도는 공산당의 입장일 뿐이며 중국인들에게서 한국에서와 같은 반일감정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실 많은 중국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한국이나 일본을 중국의 일개 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몇해전 동아일보와 아사히 신문은 합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이 좋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양국 간의 이런 이상한 감정관계는 국외자가 보기에 첫째, 일본이 한국에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둘째, 한국인들이 비정상적인 반일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두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두 번째 평가를 내리는 국외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무례하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의 유별난 반일감정은 국제사회에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한일관계, 특히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과거사에 대한 냉철한 평가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여기서 나는 개항 이후 한일합병까지의 시기를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기로 설정하고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의 당면과제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면 일본은 대체로 혁명의 든든한 지원군이었으며 때로는 주도적으로 개입해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 우호적인 외세로 보았다.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3대 세력은 시대에 따라 대결하거나 연합하면서 조선혁명을 이끌어왔으며,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바람직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시각으로 개항기의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혁명은 비록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코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 내부 혁명세력의 자주적인 의지로 진행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선왕실과 그에 빌붙은 수구외세와 대항하면서 30년 동안 끈질기게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문명개화는 이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성과물인 것이다.

몇해전 여름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 방영한 바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오늘날 일본에 자학사관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가지 자랑스런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일본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도 공헌한 바가 많은 나라이다.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일본이 한차례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오늘의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에서 일본의 젊은이들 몇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인들을 만나면 으레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하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한국인들이 때리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언제 때리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국민이 왜 이웃나라에 와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일본 땅이었던 곳에 와서 이처럼 궁색한 처지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도 역사 교사들로부터 수없이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패전기념일마다 묵념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문제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청산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다. 일본은 전후 독립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그 정신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만난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강대국’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에 비하면 땅덩이도 좁고 인구도 적어 여러모로 너무 작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이런 사고방식들은 모두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과 자기비하 작업의 결과 생겨난 것이며, 일본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도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선결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은 잘못된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자는 움직임일 뿐 한국에서 말하는 우익의 준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우익도 아니며 그저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일 뿐이다. 최근의 교과서 파동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트집 잡아 분별없는 처신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정부당국자들과 한국민 사이에 팽배해 있는 저열한 역사인식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연유한 것이며, 한국은 일본이 이 같은 무례한 언동에 정면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스스로 옳다고 믿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의 유연한 대응은 정면에서 상대를 적대하지 못하는 일본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오랜 세월동안 굳어져버린 패전국으로서의 자기비하 습성의 결과일 뿐이다. 일본의 의사표현 방식이 차라리 서양식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쯤 한일관계의 갈등은 그 실체라도 드러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같은 시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관료 체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 국민은 오히려 프랑스 혁명군의 편에서 구체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의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일 것인데 오늘날 세계의 역사가들은 헤겔을 입장에 서서 나폴레옹을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로 보고 그의 정복전쟁을 세계정신의 활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해 마지않았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가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에 찬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복전쟁이 무엇이나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헤겔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의 활동인 것이며, 이들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침략과 정복의 역사를 보는 데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은 악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폐기되어 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니 민족단위의 자주적인 존립이 정당하다는 논리도 최근 들어 유행하게 된 민족국가의 자기합리화 논리일 뿐 그것이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같은 면에서 볼 때 19세기말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복에서는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겠으나 일본의 아시아 진출에는 분명 세계정신의 자기 구현이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겠다. 혁명을 통해 비유럽 지역 최초로 근대적인 사회제도를 구축하고 자율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한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세계 역사에서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달리 착취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은 조선과 대만에서 민중을 억누르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법의 통치를 구현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통치 지역의 주민들은 문명의 세례를 받아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싱가포르와 일본 사이에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일본 총리는 <확대 동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두 가지 모두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며,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협력과 공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뉴스라 할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멋진 영상으로 치장된 명성황후 뮤직비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극우 쇼비니즘의 광풍을 실감하게 해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같은 파렴치한 역사왜곡과 반일 책동은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의 외톨이 국가로 만들어갈 수 있으며,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 역사의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그러한 깨달음의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2년 2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1-2] 상처뿐인 해방-일본의 패전과 한국 p39

1945년 8월 15일 정오, 대일본제국의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다. 이 항복선언은 이미 8월14일 오전 11시에 녹음되었다가 하루가 지난 뒤 라디오를 통해 발표된 것이다. 이미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항전을 준비하고 있던 수많은 군인들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그 날 천황의 항복선언을 자신의 불충 탓으로 여긴 수많은 일본인들이 혹은 배를 가르거나 혹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그 수는 5천여 명에 달했다.

일본열도와 전 세계의 일본인들이 이처럼 망국의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과 일본군 점령지에서는 일제히 환호의 축포가 울려 퍼졌다. 조선반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감추어둔 태극기를 꺼내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그 날의 표정을 전후 세대들은 잘 알기 힘들지만, 그것은 아마도 지난 6월 25일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팀이 승리하고 난 뒤의 분위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실로 믿기지 않은 사건에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으며, 그 날의 축제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10일 뒤인 1945년 7월 26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은 독일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만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포츠담 선언에서는 소련의 신속한 대일 개전을 촉구하고 제8항에서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영토는 4대 섬과 부속도서로 제한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의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동하여 독일의 전후처리와 소련의 대일 개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을 촉구하였고 결국 소련은 몽골의 현상유지, 사할린과 쿠릴열도, 여순의 소련 귀속, 대련의 자유항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운영,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보장 등의 조건에 합의하고 대일 개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 대해 미중소 3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동의 하지만 기간은 더 짧아야 하며 외국군대의 주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조선에 대한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의 신탁통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반도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조직되었다. 초기 반탁시위는 좌우익 합작으로 진행되었으나 좌익은 곧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이때부터 좌우익, 찬탁파와 반탁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선에서 좌우익의 대립은 미소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조선의 신탁통치 문제는 냉전 대결이 격화되면서 결국 1947년 9월 폐기되고 말았다.

이후 유엔총회는 조선에 대해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의를 했는데, 이에 따라 선거를 감시할 위원회가 파견되었으나 38도선 이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미군정의 대리인 이승만은 ‘정읍선언’을 통해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김구 등 통합 우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어쨌든 이 선언 이후 남북은 각각 분단상태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절차를 시작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되었다.

이 같은 논의들은 별 중요성을 가진다 할 수 없다. 전후 조선의 처리 문제에서 중요한 점은 연합국들이 1868년 이후 취득된 일본의 영토를 몰수한다는 합의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전후 국경설정에서 독일은 물론 다른 국가들도 전쟁 직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 것과 비교해보면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차별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80년 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다는 결정은 아무리 패전국이라지만 국제적인 전후처리 관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먼저 북해도를 점령했고 이후 오키나와 등 일본열도 남단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대만, 사할린과 쿠릴열도, 조선반도, 만주 등을 통합하여 일본의 영토는 점차 확대되어 왔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패전 이후 괌, 사이판과 같은 미국령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미국은 1976년 오키나와를 반환하였으며 북해도는 처음부터 분단시키지 않았다.

1931년 이후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된 만주에 대해서는 이미 국제연합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패전 이후 일본은 만주를 비롯해 1930년대 이후 취득한 해외 영토를 포기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일본 영토에 통합된 오키나와를 비롯해 대만과 사할린, 조선, 쿠릴열도, 남양군도(마이크로네시아) 등의 영토에 대해서는 패전을 이유로 이들을 일본으로부터 분단시킨다는 발상은 정당성이 결여된 조치로서, 약자를 무시하는 승전국들의 또 다른 침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연합국과의 합의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소 불가침조약을 스스로 폐기하였다. 유럽에서 극동지역으로 이동한 소련군은 1945년 8월9일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우세한 소련군의 화력 앞에서 일본의 극동군은 차례로 궤멸하였으며, 소련군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계속 진격하여 8월26일에는 조선반도 북부의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8월 10일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했으며 9일에는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점령하였고 곧이어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시작했다.

인민은 약하므로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인으로 살아왔던 조선인들은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마치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추세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곧 모든 사람들이 숨겨진 항일투사로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곧이어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작하자 조선인들은 소련국기와 성조기(미국의 국기)를 들고 나와 이들을 환영하였으나, 이들 승전국의 군대는 총알세례와 약탈, 강간으로 화답하였다.

열도에 진주한 미군과는 달리 조선반도를 점령한 소련군과 미군은 대륙에 붙어있는 일본 영토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으므로, 대단히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수 없었으며, 이곳이 조선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그들에게 조선반도는 단지 일본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곧 복수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고 부녀자를 강간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이 빈번했던 탓에 여자들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거리에 여자가 사라지자 소련군은 가택수색을 하여 강간을 하였다. 이때 조선인들은 고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자들에게 입히게 되었는데, 이는 치마 안쪽에 입는 짧은 바지로서 요즘의 거들과 같은 의복이다. 하지만 고쟁이도 집안까지 쳐들어와 어린 여자들을 겁탈하는 점령군의 강간을 막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한반도는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에 의해 체제경쟁의 전시장으로 변해갔다. 남한과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미,소의 대리인들은 정권을 유지하고 그들의 종주국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적개심을 갖도록 인민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50년 이후 3년간 참혹한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전쟁이 있기 이전에도 남한은 사실상 좌우익의 전쟁터였다. 이념대립으로 인해 수많은 대량 학살사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수십만명의 선량한 주민들이 죽어갔다.


[ 반일 세력의 정권 장악 ]
전후 한반도는 독일과 함께 이데올로기 대립의 상징으로 육성되었지만 남북 모두 반일세력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반공이 가장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는데, 동시에 반일도 그에 못지 않은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종전 이전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주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업으로 삼아 생활했던 일종의 ‘독립업자’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 중에는 일부 독립이 조선민족에게 지고의 선이라고 믿고 헌신한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삼아 일하지 않고 살아가거나 인민의 재산을 노략질했던 룸펜, 혹은 도적떼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쫓기거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만 하면 모두 독립운동가로 행세할 수 있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도적떼와 독립군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남조선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이 독립운동 룸펜 집단이 귀국해 정권을 장악한 뒤 친일파를 탄압했다. 이 때문에 남조선에서는 누구나 일제시대에 총독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가 점차 강화되면서 반일은 한국의 중요한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통치 시대의 모든 제도적 인적 유산을 청산해버린 북조선과 달리 한국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통치의 유산을 활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부수립 이후에도 친일파들은 반공운동에 적극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일본통치 기간 중 일본은 대륙과 가까운 북조선 지역을 주요 산업기지로 육성했다. 이 때문에 북조선은 종전 이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여 30년 동안 남한에 대한 국력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일본통치의 유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고 또한 1965년 뒤늦게나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서 많은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탓에 1970년대 이후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 ]
그러나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됨으로써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것은 현재의 일본인들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던 조선민족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오늘날 전제적인 독재체제 아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조선은 조선 민족 가운데서도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하겠다. 종전 당시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주요 5개의 그룹으로 구분되는데, 남조선주민, 북조선주민, 재일 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소련의 까레이스키(Corean의 러시아어 발음) 등이다.

종전 이후의 삶을 돌이켜보면 이 가운데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가장 사정이 나았고, 그 다음으로는 남조선 주민,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까레이스키, 북조선 주민의 순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했다. 이는 오늘날 역사를 돌이켜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거나 혹은 패전 이후에라도 조선이 일본과 분단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전후 한국인들은 일본통치 시대 모든 조선인들이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우리는 전쟁을 통해 스스로 독립을 이루었다고 조작된 역사를 학습했다.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에게 일본통치 시대는 그저 잠시 강대한 침략자에게 눌려있던 기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분단된 것이 민족의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는지, 혹은 아직 남북한이 일본의 일부였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발전된 나라가 되었을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2002년 초 개봉된 한일합작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조명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금년 초 어느 모임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20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 영화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같은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복거일이라는 한국인 소설가의 1987년작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시대 설정이 다소 참신할 뿐 소설 자체의 스토리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느 일본인이 조선북부에서 과거로 여행할 수 있는 유물을 발견한 뒤 그것을 이용해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의 암살을 저지함으로써 역사가 바뀌게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승전국이 되고 2009년 서울은 일본의 제3대 도시로서 찬란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군 不令鮮人들이 이 보물을 되찾아 다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한국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는 스토리다. 이 영화는 올해 초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아직 우리가 일본이라면..’ 이라는 다소 획기적인 발상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2002년 초, 당시 한국의 경제 부총리인 진념씨는 수십년동안 혼란 속에 있는 교육제도에 관해 언급하면서, “한국의 교육제도는 아직 일제시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 이를 두고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일제시대가 지옥과도 같았고 해방 후에는 힘들긴 했지만 최소한 일제시대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 전전세대인 진념씨의 발언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교육제도 뿐 아니라 관료시스템 전체가 아직 일제시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최근 이루어진 합병 초기 조선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당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총독부의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8년 동안 실시된 방대한 조사사업 기간동안 농촌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연구자들은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고 총독부 관료들의 청렴과 봉사정신을 극찬하고 있다. 관료들의 이같은 공무집행의 자세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눈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힘든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이권이 결부된 작업을 소수의 공무원들에게 맡겨 놓는다면 시비와 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고 아마도 8년이 아니라 80년이 지나도 마무리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지난 1993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시작하면서, 건설비 5조원으로 2001년까지 완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 조사해본 결과 5년 동안 공사는 거의 진행된 것이 없고 사업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업은 다시 총 사업비 19조원으로 2010년 완공하는 것으로 수정되었으나, 그나마 이마저도 절반의 노선은 기존 철로를 보수해 사용하는 등 원래의 계획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수정된 계획도 그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동안의 계획은 정부 관료들이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하기 위해 거짓으로 계획을 작성해 국회의 승인을 받은 뒤, 엄청난 뇌물을 받고 부실한 업체들에 시공을 맡겨 낭비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부패한 관료제도는 국가운영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낭비와 비능률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연구기관들에 따르면 한국의 관료제도는 제3세계 국가치고는 놀라울만큼 부패가 적고 그것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니, 저개발국이 스스로의 관료 시스템에 의존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이처럼 아직 교육제도와 관료시스템 등에서는 일제시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나, 경제구조 등에 있어서는 이미 일본통치시대 전성기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산업구조 면에서 보면 1940년대 초반 조선 지역은 농업생산 43%, 광공업생산 25%, 기타 32%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의존도는 69% 였다. 이 당시 조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국으로 변모해 있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의존도를 가진 ‘수출지향 경제발전’ 전략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같은 산업구조와 무역의존도에 기초해 고찰해볼 때, 남한 경제가 1940년대 초반의 수준을 회복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 문제는 차후 보다 더 깊은 조사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그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이미 1940년대 초반의 경제력을 회복한 일본과 비교해볼 때, 이는 2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구일본제국의 외지 가운데 대만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우등생인 남한이 무슨 이유로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일제시대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니 전쟁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종전당시 조선에는 약 7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합병 이후 일본에서 이주한 공무원, 교사, 경찰, 사업가, 농민, 노동자, 기술자로서 대부분 우수한 인력이었다. 즉 낙후된 조선은 40년 동안 이들의 힘에 의해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수출형 공업국으로 발전하였으나, 패전 이후 이들이 한꺼번에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해외에서 귀국한 소위 ‘독립운동가’ 룸펜 집단이 차지하는 지배층의 교체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선은 다시 수십년 전의 사회로 후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1940년대 초 국내 총생산의 69%라는 경이적인 무역의존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물론 대부분 내지(일본)와의 무역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수립 이후 청구권 문제로 20년 동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출시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한해 3500억 달러의 교역을 하는 한국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교역액이 350억 달러로 줄어든다면 파멸상태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모국을 잃어버린 남한 경제는 이처럼 비참한 파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 해방인가 ]
이같은 고찰에 기초해 볼 때, 한국인들이 종전을 ‘해방’이라고 말하고 8월 15일을 빛을 다시 찾은 날이라는 뜻의 ‘광복절’로 경축하는 것은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해방’으로 인해 우리는 과연 자유를 찾고 행복했는가? 그 날 이후 조선인들에게는 분단과 좌우대립, 끝없는 학살과 전쟁, 배고픔과 눈물만이 있었을 뿐이다. 부유하고 헌신적인 부모의 보호 아래 행복하게 자라던 어린이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고아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 전후 한국의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그 기나긴 지옥 같은 세월을 견디고 오늘을 이루어낸 한국인들이 경이로운 존재로 여겨질 정도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국이 얻은 것은 분단과 고통, 기아와 죽음뿐이었다. 잃은 것은 70만의 일본인과 수출시장, 그리고 무엇보다 고귀한 자유와 존엄이었다. 오늘날 한국에는 18,0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1-3] 반일의 광기 p52

[ 1. 센세, 와타시와 도요타데수 ]
대한민국은 1993년 2월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0년 간에 걸친 오랜 군사독재를 마감하고 서구식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각각 5년 간의 임기를 가지고 대한민국을 통치한 김영삼과 김대중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위해 노력한 정치인들이지만, 또한 일제시대에 성장해 교육을 받고 사업을 영위했던 세대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각각 일본을 방문해 과거 일제시대에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찾아 인사를 하고 그 은혜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졌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인사하고 싶은 스승이 있다는 것은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 채 40이 되지 않은 필자의 경우만 해도 초등학교와 중고교의 교사들 가운데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는데, 이는 한국의 교사들 가운데 존경할만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학생들은 교사를 “꼰대”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우수한 교사들은 학교를 떠나 사설학원에서 유명 강사로 성공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즉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 학교의 실정이라고 하겠다.

필자도 어린 시절 노 교사들로부터 일제시대 자신이 존경하던 일본인 스승들의 가르침에 대해 자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과거 일본통치 기간 중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교사들이 대단히 높은 자질과 교양을 지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대통령들의 이같은 자발적인 보은에 대해서마저 이를 트집잡아 일본에 가서 옛 스승에게 인사를 한 것은 친일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야당은 지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옛 은사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선생님 저 도요타(豊田)입니다”라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사실을 들어 아직까지도 정치공세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지역이다. 과거 일본과 전쟁을 통해 피해를 입은 일도 없고 오히려 세계의 한국학계에서는 일본통치로 인해 한국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인 점을 볼 때 한국에 반일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통치를 경험한 대만에 오히려 친일감정이 많은 것과 비교하면 일본통치로 인해 대만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입은 한국의 강한 반일감정은 더더욱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나의 경우만 해도 지난 1995년도 일본에 고베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쓴 글들을 보면, 일본에 그러한 재앙이 닥친 것을 기뻐하면서 이는 우리나라에 하늘이 내려준 기회이니 이를 발판으로 삼아 일본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당시 나는 한 일본인이 “고베에 사는 나의 친척들이 많이 죽어 우리 가족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이를 기뻐하는 한국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항의하는 글에 대해 “예전에 너희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해 아무런 반성과 사죄가 없으니 우리는 일본에 재앙이 닥친 일을 기뻐하는 것이다” 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강한 반일감정이 존재했다. 나는 일본이 싫어서 일본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고, 간혹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쾌한 기분에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괜히 기분 나쁘니까‘ 일본을 한번도 여행하지 않았으며 간혹 일본을 자주 왕복하면서 일본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경멸하는 감정이 생겨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시기의 나는 실로 “반일감정의 화신”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는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일본을 옹호하는 글을 쓰게 되었는가. 그동안 일본인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친한 일본인이 생겼던 것도 아닌데 나의 생각은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이는 아마도 독서와 사색을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보다 성숙해지고 외국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에 대해 보다 국제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한국에서 반일감정은 하나의 열렬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존재하고 있다. 2002년 3.1절을 맞이하여 한국의 국회의원 100여명은 700명에 이르는 친일파 명단을 새로이 발표하고 이들에 대한 처단을 요구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일제시대의 모든 조선귀족과 일본귀족, 중추원 의원, 작가와 예술가, 학자, 주요 사업가, 여성운동가, 검사와 판사, 형사, 조선총독부 공무원의 명단이 망라되어 있다. 즉 일제시대 조선사회의 모든 주류계층을 친일파로 분류하면서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국회의원은 사실상 그 시대에 조선인이 한반도에서 생존한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반일감정은 지난해 교과서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진 파동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계기로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연일 반일 시위가 잇따랐고, 종전기념일인 8월15일에는 일단의 깡패들이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를 항의하며 집단으로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이들은 31운동의 발상지인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모여 비가 내리는 도중 작은 작두를 죽 늘어놓은 뒤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그런 뒤 손을 붕대로 감고 잘린 손가락들을 모아 태극기로 묶어 다른 곳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떠났다. 이는 과거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행동을 따라 한 것이다. 한국에는 아직도 자동차의 뒤편 유리에 안중근의 손바닥 모양과 “대한국인”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많다. 이 손바닥에는 물론 새끼손가락이 없으며 대한국인은 안중근의 친필이다.

지난해 교과서 파동 당시 한국의 분위기는 어린 학생들이 등산로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욕을 하면서 돌을 던질 정도였다고 하니,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의 단체관광객은 한국 여행을 모두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의 TV에는 충청도의 한 도시에 사는 일본인 아내들이 모두 나와 일본의 잘못을 사죄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절을 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분위기라면 당시 주한 일본인들이 얼마나 큰 신변의 위험을 느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업고 문화계에서는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명성황후 신드롬인데, 명성황후란 조선말 개혁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다가 조선-일본의 혁명세력에게 살해당한 민비를 요즘들어 새로이 부르는 이름이다. 민비에 대해서는 지난 100년 간 조선인들이 여자를 비난할 때 “민비 같은 년”이라고 하면 가장 치욕스런 말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조선을 망친 왕비로서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물이 왜 오늘날 남한에서 갑자기 애국과 충절의 상징처럼 추모되고 있는가.

민비를 구국의 순교자로 미화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간헐적으로 존재해 왔다. 일찍이 극우 성향의 한국 작가 이문열은 <여우사냥>이라는 연극 대본을 쓰고 이를 한국의 극단이 <명성황후 The Last Emperess>라는 이름의 뮤지컬로 만들어 브로드웨이에 소개하여 서구 언론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이 최근 들어 교과서 분쟁으로 빚어진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TV의 사극, 연극공연, 소설, 음반, 영화와 뮤직비디오 등으로 확대되면서 반일감정의 상업화 현상이 나타난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를 "명성황후 신드롬"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신드롬은 1년이 넘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계속되고 있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 이어 지난해 말부터는 성악가 조수미가 참여한 명성황후 OST와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면서 그야말로 한국사회에 국수주의의 광풍을 몰고 오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악독한 일본공사(미우라 고로)가 일본의 무사들을 사주하여 조선의 궁궐에 침입, 구국의 희망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다는 스토리가 잘 절제된 화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뮤직비디오와 OST 음반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되기도 전 이미 30만개가 예약 판매되었으며, 출시 이후 단 3개월만에 수백만장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발달된 인터넷망을 통해 이 뮤직비디오가 거의 모든 웹사이트에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인이라면 접속하는 사이트마다 올라와 있는 이 뮤직비디오를 싫더라도 수십번씩 보고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X-Japan이 등장한 이래 한국의 신인류들에게는 일본 음악과 하루키의 소설, 재패니메이션을 알지 못하면 그 집단의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일본문화의 신드롬이 불어닥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전후 신세대들에게는 반일감정은커녕 오히려 친일감정이 더 보편적이라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호의와 동경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는데, 명성황후 OST는 모든 인터넷 사회의 주류이자 감각세대인 이들을 친일에서 반일로 획기적인 전환을 경험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번 한국의 명성황후 신드롬은 문화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되고 있으나 그 실제 효과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그릇된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젊은이들에게 더욱 고립된 국수주의인 시각을 갖게 하는 악영향을 불러오고 있으며, 이같은 풍조는 명성황후 신드롬의 상업적인 성공에 힘입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5월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 행사는 당초 이를 통해 한일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한국 내 반일감정의 상업적 성공과 이로 인한 국수주의의 광풍이 날로 확대되는 한 월드컵 행사를 통한 한일 우호의 새시대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반일감정을 치유하는 정공법으로서는 역시 일본 정부와 학계, 그리고 한국 내 양심세력의 연대를 통해 역사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하나하나 개선해가는 근본적인 치유법만이 최선의 방법이라 하겠다. 서로 오해와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제 아무리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잡고 돌아다닌다 한들 진정한 우정이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 이같은 근본적인 개선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역사 해석에 편승하여 반일책동을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며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는 한 한일관계의 오해와 앙금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한국 사회의 반일감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사회가 하루빨리 미국과 주변국들에 의해 강요된 자학사관과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반성은 어느 국가에서나 필요한 것이겠으나 일본의 경우는 전쟁에 패한 이후 전범국이라는 낙인이 찍혀서인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자기멸시가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일본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보다 강화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주체성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같은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이를 기반으로 한국과 중국 정부의 역사왜곡과 무리한 주장들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태도는 정부각료나 국회에서 간헐적으로 일본인의 주체적인 역사인식을 표명하는 발언이 나왔을 때, 이를 한국 정부에서 항의하면 신속하게 각료가 사죄하고 공직에서 물러나는 등의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해왔다. 일본 정부 자체가 주변국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니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중국 정부의 반일책동은 날로 심해지고 이를 정치적,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연초 한국의 동아일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지난해에 비해 급격히 악화된 반면 일본인의 반한감정은 개선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일본인 가운데에는 한국이 싫다는 응답을 한 사람보다 한국이 좋다는 응답을 한 사람이 더 많았으나, 한국인의 경우 일본이 좋다는 사람보다 싫다는 사람의 비율이 3배나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숫자로 보면 한국인 가운데 일본이 싫다는 비율은 과반수가 넘어 무려 56%에 달했으니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세계화가 진행된 덕분에 한국이라는 이웃나라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고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대단히 중요한 국가이므로 일본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은 예전부터 중국과 일본이라는 양대 문화권의 사이에서 지리적으로나 정치외교적으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즉 조선이 일본 블록에 속하게 되면 중국은 해양세력에 포위되는 배치가 형성되고, 조선이 중국 블록에 속하게 되는 경우 일본은 대륙세력에 의해 고립되는 양상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면에서 일본에게 한국을 포함한 조선반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지역이다.

만일 한국의 반일감정과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해소되어 훗날 일본과 한국이 재통일을 이룩하거나 한국-대만-일본을 잇는 정치-경제-군사 블록이 성립할 수 있다면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떨어버리고 그 국력에 맞는 강대국의 지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은 한국의 역사왜곡과 그에 기인한 반일감정을 해소하는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 2. 한국의 반일 교육 ]
일전에 나는 타쿠쇼쿠 대학의 아라키 교수를 서울에서 만나 반일감정의 원인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그는 한국에 반일감정이 강한 이유는 과거 일본과 동화의 정도가 깊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것은 처음 들어보는 해석으로서, 나로서는 이 같은 답변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의 역사학자 신복룡 교수 등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국가의 소멸과 이민족의 통치과정에서 조선민족처럼 저항이 적었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한국사 새로 보기, 풀빛) 동화의 정도가 깊었기 때문에 독립한 뒤 반일감정이 강하다는 것은 기묘한 논리인데, 아마도 이는 조선 특유의 소중화 의식에서 비롯된 자존심의 상처, 정절의 논리 등과 연관시켜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닐 것이다.

이같은 심리학적인 분석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강한 반일감정의 이유를 피상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낮은 수준의 국민의식,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반일 교육,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 조선왕조에 대한 향수, 독립 이데올로기 등등 여러 가지를 언급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반일 교육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고교과정 “국사”(한국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상에 다시없는 악마이자 평화롭게 살아가던 조선을 침략해 정복하고 괴롭힌 못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 말기 국가의 재정이 파탄 상태로 내몰리고 군인은 물론 공무원의 월급조차 지불하지 못하게 된 것은 국고를 물쓰듯이 탕진한 민비의 사치와 정권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의 탐욕과 부패때문인데도 ‘국사’는 이같은 조선말기 지배계층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채 망국의 책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전가하고 있다.

또한 조선말기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시행된 조선사회의 근대화개혁에 대해서도 이것은 시종일관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의 쿠데타와 그에 따른 강제에 힘입어 가능했던 혁명적인 사회변화로서 개항기 일본이 조선에 끼친 중요한 공헌이라 할 수 있는데, ‘국사’는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 이것이 조선정부의 자발적인 조치였던 것처럼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한 민비살해 사건에 대해서만 부당하게 일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로 조선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합병 이후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도 척박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개척자들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조선에 대한 그들의 애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 일본이 36년간 조선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많은 조작된 통계수치가 동원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정규 국정교과서가 이처럼 역사에 대한 왜곡과 조작에 근거해 근현대사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이 싹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대해 “과거 조선왕조의 학정과 청나라,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었고 많은 희생과 투자를 통해 우리 민족을 문명개화로 이끌어준 부모와 같은 나라”의 이미지 대신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착취한 원수의 나라”로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과거사에 대해 이 같은 천편일률적인 반일사상 이외에 다른 해석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차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고의적인 세뇌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주요 사례에 대해 한국의 학생들이 한일관계의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 2-1. 갑오개혁과 민비 시해 사건 ]
개항이후 쌓여온 여러 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높아진 가운데, 농민들의 개혁요구가 거세어지자 정부에서는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으며...... 이때 실시된 개혁을 갑오개혁이라 한다. (국사, p336)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 정부는 청국과 조선정부에 시정개혁과 조선의 독립을 함께 추진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청국과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부득이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무력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시정개혁 조치를 강행한 것인데, 이 갑오개혁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이식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근대정신을 전파하는 혁명의 기지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가 된다.

물론 당시 일본에게는 청나라를 축출하고 조선반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나 조선의 자주독립과 시정개혁은 당시 조선 사회에도 꼭 필요한 조치였으므로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건을 ‘국사’에서는 마치 조선정부가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는데도 일본이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가 농민군과 협상을 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약속했지만 휴전 이후 전혀 실천하지 않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침략 공세를 펴던 일제는 갑오개혁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제를 배후로 한 개혁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으로 대륙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정책의 장애물인 명성황후와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 낭인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한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국사, p337)

“국사”의 기술에서 일본이 등장하는 문장에는 이처럼 항상 침략, 야심, 야욕, 만행 등의 용어가 따라붙고 있다. 실제의 민비는 단지 정권을 유지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야욕이외에는 다른 동기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기적이고 극악한 인물이었으나 “국사”에서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다 살해당한 자주적이고 애국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당시 민비를 제거하고자 했던 세력은 조선의 혁명세력과 대원군, 일본 등이 있었지만, 당시 조선에게는 민비와 친러 수구파를 제거하지 않고는 모든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므로 민비시해는 어느모로보나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의 역할은 조선의 혁명가들과 대원군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약간의 무력을 동원해준 데 불과했으므로 그 책임이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인데도 마치 민비살해가 미우라 공사와 일본 정부의 소행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부분이다.

한말의 대학자 黃炫은 <梅泉野錄>에서 이 사건이 발생하기 몇 달 전, 조선 정계의 실권자인 박영효가 민비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유길준이 그 사실을 고종에게 밀고함으로써 거사가 탄로나고 이후 일본에 망명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朴泳孝의 음모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 일본의 경제를 받고 안으로는 우리 정부가 독주하여 무슨 일을 처리하려 할 때 한 건도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궁(민비를 말함)은 이를 매우 분통히 여기고 점차 고종의 복권을 꾀하여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중궁의 행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는 중국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중궁을 살해하지 않으면 그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병력을 요청했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한 사이여서 자기의 뜻을 내통하였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자기의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일병에게 호위를 요청하여 용산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申應熙, 李圭完 등도 그와 함께 도주하였다.(매천야록 고종 32년 을미년 5월의 기록)

이때 일본으로 도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영효는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까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것은 갑신정변에 이어 그의 두 번째 망명생활이다. 이처럼 민비 암살은 일본의 개입 없이도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자체에서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되었던 과업이다. 이 해 5월 박영효의 민비살해 기도가 실패한 이후, 민비는 8월 20일에 이르러 대원군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등이 주도한 거사에 의해 처단되었다. 또한 황현은 민비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인지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이같은 역사를 외면한 채 민비를 일본의 침략에 맞서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애국자로 묘사하고 있다. 황현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로서 한일합병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자신의 불충을 탓하며 그 해 자결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 충성을 바쳤던 인물이니 그 기술의 객관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한반도에서 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이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민족적 저항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 의병투쟁이었다. 최초의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을미의병은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농민들과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국사, p337-337)

이 부분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기술이다. 첫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일본의 조선진출과 그 영향력이 여러 면에서 향상된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은 이후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어 세계에 선포하도록 하는 한편 군국기무처를 통해 강력한 근대화 개혁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조선의 여론은 대단히 호의적이었으며 일본을 칭송하고 따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다시 황현 선생의 글을 인용하자면,

..... 만일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정국을 뒤바꾸어 놓으면 우리나라 관료와 백성들은 일본을 섬기듯 러시아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자, 러시아 공사는 매우 기뻐하여 그의 청을 수락하고 병력을 파견하여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진주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아관파천 이전 조야를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섬겼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청일 전쟁 이후 일본에 반대하는 저항이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얼마나 역사를 조작 왜곡하여 학생들에게 반일감정을 세뇌하는 데 진력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 왜곡은 을미의병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한 부분이다. 을미의병은 민비 시해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단발령에 저항해 일어난 폭동으로 보아야 한다.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신속하게 민비를 폐서인하였으며, 1895년 8월 22일 조서를 통해 민비로 인해 그동안 자신을 비롯한 왕실과 정부가 얼마나 두려워하며 큰 고통을 당했는가를 대내외에 밝혔다.

“짐이 임어한지 32년이 지나도록 치화가 미흡한 것은 왕후 민씨가 친척을 끌어들여 그들을 좌우에 두어 짐의 이목을 옹폐하고 인명을 박해하였으며, 정령을 탁란케 하고 관직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민비의 학대는 하늘까지 치솟아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고 종사는 위태롭게 기울어 조석을 보존할 수 없었다. 짐이 민비의 극악무도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짐이 불명한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의 일당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다..... 민비의 죄악은 실로 천지에 가득하여 다시는 종묘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왕가의 고사에 의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하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황현은 “이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 사람들은 실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즉 비록 고종의 이 폐서인 조서가 고종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내용은 진실을 말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민비 살해에 대해 모든 조선인들이 기뻐하는 분위기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을미의병”이라고 불리는 1895년의 잦은 반란들은 일본이나 민비살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단지 당시 김홍집 정부에 의해 강제로 실시되었던 단발령에 항거하기 위한 무장봉기였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국정부는 마치 을미의병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고 민비시해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일항거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와 친러파를 제거한 조선의 혁명세력은 좌절되었던 개혁조치를 다시 진행하는데 이를 을미개혁이라 한다. 그 과정에서 김홍집 정부는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강제로 추진하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머리를 잘리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큰 저항이 있었다. 그 가르침이란 소학 효행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 효지시야 (몸의 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이 단발령 소동에서 유생들은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어도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고 저항하다가 강제로 상투를 잘린 뒤에는 목놓아 통곡을 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사죄하며 자결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 단발령에 저항하며 시작된 폭동을 국사에서는 을미의병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들을 반동 폭도라고 칭할 수는 있어도 의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호칭으로 생각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민비와 민씨들을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민비 살해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는데, 단발령에 저항하는 폭동을 두고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발생한 “항일의병”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 2-2. 31운동과 유관순 ]
31 만세운동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남미 지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발생한 사건이다. 이 운동은 최초의 조선독립운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 합병이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투자와 근대화의 시혜를 입으면서 굉장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는 독립이란 백해무익한 일이었으며 시기상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국제정세와 민족의 이해관계를 무시한 채 몇몇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인을 선동하여 시작된 것이 이 만세운동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해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들을 교회에 집합시킨 뒤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또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투옥당하였고, 일본 경찰에게 비인도적인 악형을 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0여 명, 부상자는 1만 6,000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7,000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20여호, 교회가 50여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국사, p344)

200만 명이라면 당시 인구 1700만 가운데 12%가 넘는 숫자이니 이 글을 보면 마치 대부분의 조선인이 시위에 참가했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사살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교과서에서 이 같은 글을 학습한 학생들은 1919년에 일어났던 일을 머리에 그려보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통치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독립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했고, 악독한 일본 군경은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죽였으며, 사람들이 숨어있는 건물에 대고 기관총과 대포를 쏘아 학살하는 장면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1919년 3월의 한반도는 말 그대로 생지옥을 방불케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나, 이같은 묘사는 엄청난 사실의 왜곡이다. 숫자도 마음대로 갖다 붙인 듯한 정황이 보인다.

죽음은커녕 체형을 받을 정도도 아니었던 3.1운동의 비폭력 항쟁에서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은 전체 인구 중 2.7%인 46만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申福龍, 한국사 새로 보기, 2001)

권위 있는 역사학자가 시위에 참가한 인원을 46만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국정교과서는 이를 200만명으로 부풀리고 있으니 다른 숫자나 문장들이 얼마나 과장되었을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모든 조선인은 합병조약에 의해 자동으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인에게도 일본의 모든 법체계와 재판제도가 적용되고 있었다. 이 당시 일본은 군사독재체제도 아니었으며 시위나 언론 출판 등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였다. 따라서 단지 시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경찰이 조선인들을 잡아 가두지는 않았을 것이며, 심한 경우 체포되어도 주동자나 폭동을 일으킨 경우가 아니면 훈방으로 풀려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경찰이 한국의 교과서에 묘사된 것처럼 잔혹하게 진압했다면 만세운동이 3개월 동안이나 지속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3개월이 지나도 소요가 가라앉지 않자 본토에서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렇게 되면 큰 인명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판단한 이완용 자작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을 간곡하게 설득했고 그로 인해 31운동은 평화스럽게 막을 내렸던 것이다.

시위대를 교회에 가둬놓고 일제사격을 가해 학살했다는 제암리 사건이나 3.1운동의 과정에서 일본군경에게 7,500명이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왜곡되거나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30년 정도로서 1700만 인구 가운데 해마다 60만 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이고, 3.1운동의 지속된 3개월 동안에만도 15만 명이 사망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근거로 7,500명이 일본군경에게 피살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건물이 불탄 것이나 소요 중 사람이 죽은 일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본 군경이 아니라 무정부상태를 틈타 활약한 폭도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31운동 기간동안에는 독립운동과 관련 없는 조선인에 의한 약탈과 방화, 파괴 행위들이 전국에서 발생해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전국적인 소란 상태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를 모두 일본경찰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는 부당한 일이다.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3.1절이 되면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를 배워 부른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이처럼 유관순은 각급 학교에서 31운동의 상징처럼 교육되고 신격화되는 인물이다. 유관순은 1904년 생으로서 3.1운동 당시 15세에 불과했다. 이화학당의 학생으로 있던 중 31운동이 발발해 학교가 휴업하자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가 아오내 장터에서 벌어진 시위를 주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백과사전에서 유관순에 관한 항목을 찾아보면 이때 체포되는 과정에서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 경찰에게 피살되었고 집마저도 불탔다고 되어 있는데, 이 또한 믿기 힘든 얘기다. 사형도 아니고 겨우 3년형에 해당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왜 아무 이유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인지.

이후 유관순은 폭력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항소심 재판 도중 검사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는 등 소란을 피워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도합 7년형을 선고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법정에서도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난동을 부린 것을 보면 유관순은 상당히 폭력적인 여학생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주도한 시위라는 것도 결코 평화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관순이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한 경과는 이렇게 평범한 폭력시위 주동자에 대한 정상적인 법집행이었을 뿐인데, 한국의 교사들은 마치 그가 어린 나이에 일제통치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살해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위의 노래에서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재판 받고 복역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망한 여자 깡패를 한국에서는 구국운동의 순교자, 조선의 쟌다르크로 묘사해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굉장히’ 어린 소녀가 유관순에 대해서 쓴 글이다.

유관순을 읽고 (1999.8)
유관순 할머니, 안녕하세요? 엄마나 아빠는 어릴 때 할머니를 유관순 언니나 누나라고 불렀다지요. 그러나 저는 할머니의 일생이 적힌 책을 읽고 할머니가 1904년에 태어나셨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올해 95세이죠. 그래서 저는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옛날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나 책, 기사 등을 통해서 많이 알고 있어요. 1919년, 할머니가 고향에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던 때, 할머니의 나이가 16살이었다니 저는 무척 놀라웠어요. 저는 16살이 되었을 때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아요.

다른 평범한 소녀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재미난 책도 읽으며 공부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일본군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을 받으며 돌아가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제 스스로 몸이 떨릴 지경이예요.

지금 독립 기념관에 가면 일본 군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고문하던 광경을 인형으로 재현시켜놓은 장면이 있다고 해요. 그 장면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 해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무엇이 할머니로 하여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꿋꿋이 지키게 했을까 생각했어요.

할머니, 사실 저는 조금 부끄러워요. 할머니나 다른 분들의 값진 희생으로 제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거든요. 저는 지금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인가 생각해 보아요.

공부 열심히 하는 거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거요? 거리에 떨어진 휴지 줍는 거요? 질서를 잘 지키는 거요?...... 왠지 시시하게 생각되네요. 그러나 부모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하찮게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다음에 어른이 되었을 때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요. 그렇다면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신 할머니, 고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는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야무지게 해 내는 멋진 아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송 하림 드림

이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은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교사들로부터 악독한 일본 헌병들(경찰을 한국의 학교에서는 굳이 헌병이라고 묘사한다)이 유관순을 어떻게 괴롭혔으며 그가 일본 경찰의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자세히 듣게 된다. 체포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오빠도 체포되었으며, 집도 불타 없어졌다고 배운다. 그런 뒤에 유관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쓰기를 하고, 유관순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교사가 제대로 가르쳤다면, 대개 아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울먹이게 될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해마다 유관순의 노래를 부르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예전에 한국에서 공산당을 짐승으로 묘사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세뇌했을 때, 학생들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공산당을 얼굴은 늑대로, 피부는 빨간색으로 그렸던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때 공산당의 자리를 오늘날에는 일본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이나 유관순 기념관, 혹은 3.1운동의 발상지인 파고다 공원 등에 있는 조각이나 그림에는 예외없이 일본군이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을 칼로 찔러죽이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이런 유적지뿐 아니라 일반 교과서나 신문 등에서도 그와 같은 사진을 통해 과거사를 가르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혹은 TV와 책을 통해 일본을 비하하는 세뇌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것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들이 자라서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


[ 2-3. 헤이그 밀사 사건 ]
유관순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되었던 이준 일행에 관한 ‘신화’가 있다. 나는 어린 시절 교사로부터 이준 열사가 제2차 만국평화회담이 열리고 있는 헤이그까지 가서 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하자 뿌리치고 들어가 회의장 안에서 칼로 자신의 배를 갈라 내장을 뿌리고 죽었다고 배웠다.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면 요즘에도 교사들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준을 열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준 일행은 고종으로부터 15만원이라는 막대한 돈과 신임장을 가지고 러시아를 통해 유럽까지 갔지만 회의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회의 참석을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어를 잘하는 일행 한 사람이 현지에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자신들의 신분과 파견 목적 등을 알림으로써 이 사건은 세계에 알려졌고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는 계기가 되긴 했으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준은 자결한 것이 아니라 병을 얻어 죽었다는 것이고 일행 가운데 헐버트와 이상설, 이위종 등은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들은 고종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돈으로 신세계를 유람하면서 행복하게 살다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이 명확한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교사들이 왜곡 과장해서 가르치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 가르쳐야만 학생들이 일본을 더욱 증오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갖도록 학생들을 세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애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3. 반일교육에 대한 일본의 대처 ]
지면의 한계 때문에 몇 가지 사례만을 선정해 고찰해보았지만, 일본과 관련해 한국에서 사실과 다르게 교육되고 있는 사례는 수백 가지를 쉽게 열거할 수 있을 정도로 많다. 거의 전부가 왜곡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더 힘들 정도이다.

한국의 반일 교육은 과거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교과서의 지나치게 감정적인 문장, 그리고 의도적인 수치와 자료의 조작 등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국사”에서 임의로 고른 한 페이지만을 살펴보아도 “일제는...한일 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국권마저 강탈하였다.... 강탈한 일제는... 자유를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말살하려 하였다... 관리는 거의 일본인이 차지하였고.. 회유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무단 식민통치를 자행.. 독립운동가를 색출하여 처단....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방식.... 일제가 축출될 때까지.. 민족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강화.. 완전히 말살하려는.. 자원의 수탈에 광분하였다..”(국사, p342) 불과 한 페이지만을 보아도 이처럼 일본에 대해 감정에 격앙된 거의 욕설 수준의 표현들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이 과연 역사책인지 아니면 화장실 낙서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남한의 반일 교육은 종전 이후 6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오면서 다양한 신화와 왜곡, 잘못된 해석, 오해와 거짓말 등이 추가되어 오늘날에는 매우 정교한 체계를 지닌 세뇌 시스템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같은 남한 내부의 반일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두고 한일관계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집안에 썩은 웅덩이를 그대로 둔 채 시간이 흐르면 모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학계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응 방법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한국에서 공세적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일본이 그와 같은 자세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

한국 역사교과서의 왜곡과 수치조작은 일본의 교과서에 비해 매우 심각하므로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차치하고 명백한 것들부터라도 일본정부에서 조사해 하나하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같은 잘못된 세뇌교육이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렇게 생각하며 항의한다”는 정도만 한국 사회에 알려져도 반일감정의 해소에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1-4] 일본군의 휴머니즘 - 군대위안부 p75

종군 위안부. 대동아 전쟁기 일본군을 따라다니던 매춘부를 칭하는 용어인데, 요즘 한국에서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 정신 빠진 구세대라는 지탄을 면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최신 교정된 정확한(?) 용어로는 ‘성노예’라고 불러야 한다. 일본군 성노예 - 이것이 여성단체들의 끈질긴 주장으로 최근 한국에 정착된 공식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누가 보나 일본의 국가적 이미지를 실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일단 객관성을 잃은 것일 뿐 아니라, 용어가 특정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일을 용인한다 해도 그 가치판단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종군 위안부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뒤따랐던 제도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실시된 제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일본에서 정착된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일제시대에 정신대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학교 선생이나 책, 만화, TV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후 최근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정신대에 관한 지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제시대 말기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젊은 여자들을 잡아다 군대에 가두어놓고 창부로 부려먹었다. 그 숫자는 수십만이었으며, 정신대에 잡혀가지 않기 위해 부모들은 10대 초반의 여자애들을 아무하고나 결혼시켜야 할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나이든 남자들이 어린 아내를 얻어 횡재하는 일이 많았다. 잡혀간 여자들은 대부분 순결을 잃은 뒤 자살하거나 일본군에게 반항하다 맞아죽거나 혹은 병들어 죽었다. 살아 돌아온 여자들은 극소수이다. >

지금까지도 종군위안부에 관한 한국 사회의 정설은 대부분 위의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한 예로, 한국의 고등학교 국정교과서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 이라는 제목으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2년 무렵부터 침략 전쟁을 확대해가면서, 점령 지구에서 “군인들의 강간 행위를 방지하고 성병 감염을 예방하며 군사 기밀의 누설을 막기 위한다.”는 구실로 우리나라와 타이완 및 점령 지역의 10만명에서 20만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속임수와 폭력을 통해 연행하였다. 이들은 만주, 중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과 일본 한국 등에 있는 점령지에서 성노예로 혹사당했다. 열한살 어린 소녀로부터 서른이 넘는 성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은 ‘위안소’에 머물며 일본 군인들을 상대로 성적 행위를 강요당했다. 이들은 군대와 함께 옮겨다니거나 트럭에 실려 군대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들의 인권은 완전히 박탈되어 군수품, 소비품 취급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지 않은 피해자들 중에는 현지에 버려지거나,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학살당한 경우도 있다. 운 좋게 생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사회적인 소외와 수치심, 가난,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평생을 신음하며 살아가야 했다. (국사, p343)“

그런데 최근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위와 같은 기술은 사실과 다르며, 사건의 실체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왜곡’이라는 표현도 완곡한 것이며,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완전히 어긋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이 기술은 ‘조작되었다’는 표현이 합당할 것이다.


[ 독창적인 발상 ]
군대위안부는 대동아전쟁기 해외에 파병된 일본군의 강간을 예방하고 성병의 피해를 방지하며, 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시작된 제도이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 일본은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백군을 결성해 미군과 함께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시베리아에 출병한 적이 있다. 이 때 시베리아 원정군 7만2천명 가운데 1만명이 넘는 군인이 성병에 감염되었는데,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사망했기 때문에 전사한 군인보다 성병에 걸려 사망한 군인이 더 많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에서는 해외 원정군의 성병피해를 감소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이후 대규모의 일본군이 해외원정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잊혀졌다가, 1931년 만주사변으로 중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군 내에서 군위안부가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한 뒤 일본 해군은 중국군의 저항을 견제하기 위해 제1파견함대를 화중, 화남에, 제2파견함대를 화북에 배치했는데, 1932년 1월 상해주둔 해군 특별육전대(해병대)와 중국군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를 상해사변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일본정부는 1932년 2월 육군 제9사단과 제12사단에서 차출한 혼성 1개 여단을 상해로 파견하였고, 이후 일본은 육군과 해군의 정규부대를 상해에 주둔시키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이다. 이 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岡村寧次) 중장은 나가사키현 지사에게 군위안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공식적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일본군은 시베리아 원정군의 비극을 잊지 않고 있었고, 그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 독창적이며 효율 높은 제도를 창안한 것이다. 이후 오카무라 중장은 위안부가 도착한 이후 강간 사건이 사라져 매우 흡족하게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대라는 집단은 현대 국가의 무력이며, 전시의 군인은 본질적으로 살인을 목적으로 훈련된 인간이다. 현대 국가의 군대는 20대 초반의 남성을 중심으로 편성된다. 이 시기는 남성에게 체력과 정신력, 지적인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기간으로서 살인기계로 훈련시키기에 적합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는 20대 초반의 남성을 살인기계로 희생시켜 국가의 번영과 존립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그 대가로 성욕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군인들에게 최소한의 욕구해소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특히 전시 해외에 파병된 군인은 가장 불행한 인간이며, 이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될 운명이다. 그러한 이유로 평소에는 온순한 사람일지라도 전장의 군인은 잔인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의 젊은이들을 살인기계로 만들어 전장에 내보내면서 그 성욕을 최소한이나마 해결해주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제외하고는 체계적인 군대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나라가 아직까지 없었다. 위안부가 없는 군대는 전쟁 시 언제나 살인과 강간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해외에 나가는 군대의 경우엔 이런 경향이 심하여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승리한 군대가 패전국의 여자들을 강간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 왔다. 위안부가 없는 군대에게 패전국의 여자는 가장 중요한 전리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행 중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으면 굶주리게 되어 결국 남의 음식을 빼앗아먹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에서도 패전 이후 남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서 수많은 강간이 발생한 사례가 있다.

특히 북한 지역에서는 아무도 소련군의 강간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의 외출이 통제되고 모든 여자들이 고쟁이를 입는 등 강간의 폐해가 극심했다.

이처럼 군대 위안부는 제도상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특히 군부대마다 공창 부대를 둔다는 것은 현대의 국가에서도 대단히 바람직한 아이디어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패전이래 미군에 점령당한 상태인 한국과 일본에서는 전시가 아닌데도 미군에 의한 살인과 강간 사건이 끊일 날이 없다. 그러나 미군은 점령군이므로 한국과 일본 정부는 강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알게 되어도 처벌할 능력이 없으며,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미군에 의한 강간과 살인이 더욱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패전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미군의 강간과 살인은 알려진 것만 해도 200여건에 달하며, 알려지지 않은 숫자를 훨씬 더 많은 여성이 강간당하고 죽어갔지만 단 한 명의 주한미군도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 이같은 미군범죄로 인해 한국의 반미감정은 독립이래 최고조에 달해 있으며 주한미군은 언제나 한국인의 테러를 걱정하며 긴장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만약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본국에서 체계적으로 모집된 군대위안부를 부대마다 운영한다면 이 같은 강간, 혹은 강간살인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군대위안부 제도를 운영할 수 없는데, 매춘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종교의 색채가 강한 사회는 가부장적인 힘의 원리가 통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 순결과 정조 사상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이는 미개한 서구 기독교가 초래한 가부장 문화의 유산으로서, 이같은 사회는 매춘에 대해 적대적이다. 즉 본질적으로 군대위안부는 훌륭한 제도이나 그러한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매춘에 대한 사회적 용인과 공창 제도 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진보적인 국가는 오늘날에도 매우 드물다. 21세기가 시작된 지금에도 네덜란드와 일본, 독일 정도만이 군대위안부 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하물며 이미 60년 전에 이처럼 획기적인 제도를 시행했다는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선진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지언정 허물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군대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의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증거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일본군은 해외원정군에게 위안부를 딸려보냄으로서 군인과 현지 주민을 배려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발상으로서 일본의 군대가 침략군이 아니라 해방군에 더 가까웠다는 증거가 된다.

이같은 군대 위안부 제도는 현대의 군대에도 꼭 필요한 제도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징병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에서는 여성의 병역의무가 면제되는 것과 관련해 형평성의 논란이 많다. 여성에 대해서는 현역복무, 위안부 복무, 현금납부 가운데 선택해 병역을 치를 수 있게 하고 위안부 복무에 대해 적절한 인센티브를 가한다면 여러모로 바람직한 제도가 될 것이다.


[순결사상과 위안부 ]
1930년대 일본이 만주에 진출한 뒤 일본 정부에서는 滿蒙開拓團을 조직하여 많은 일본인들을 만주로 이주시켰다. 패전 후 만주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곳곳에서 일본인을 학살하였으므로, 이들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하순 어느 개척단의 부단장은 세는 나이로 14세부터 21세까지의 여자들을 단 본부 뒤뜰로 불러내어 낮은 목소리로 “여자 挺身隊로서 소련군 宿舍에 가주기 바란다”고 했다. 처녀들 속에서 정신대의 의미를 묻는 소리가 나왔다. 50대의 부단장은 ‘군대의 위안’이라고 대답하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挺身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에 있던 20명 정도의 소녀들은 이에 따랐다. (鈴木裕子, 근대일본과 식민지, 岩波書店, 1992, p242)“

정신의 사전적인 의미는 “솔선하여 앞장선다”는 것인데, 전쟁기 일본에서는 전쟁 수행 자원봉사단을 이렇게 불렀다. 사회 각계에서 자발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징병이나 징용의 대상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 농촌정신대 등으로 조직되어 후방에서 총력전의 수행을 도왔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 말기 조선 지역에서는 위안부를 모집하면서 ‘여자근로정신대’로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위안부를 모집한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한국에서는 종군위안부와 정신대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1990년대 들어서야 종군위안부, 혹은 일본군 성노예 등으로 구분해 부르기 시작했다.

위에 인용한 사례를 보면 당시 순결사상이 상대적으로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약했던 일본의 사회특성이 종군위안부 제도의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위의 개척단이 만약 조선인이었다면 소녀 본인이나 가족들이 ‘우리 모두가 죽을지언정 그렇게는 못한다’고 저항했을 것이 확실하다. 포악하고 살기등등한 소련군에게 소녀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집단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하는 사고는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실용적이며 합리적이다. 반면 소녀들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남자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조선이나 서구 사회의 문화는 일본에 비해 보다 이데올로기 지향적이다. 어쨌거나 이 만몽개척단의 경우에는 일본적 사고방식의 장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사례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리 소녀들을 바치지 않았더라도 이미 유럽 전선에서 마구잡이 강간으로 이름을 날린 소련군들에게 강제로 당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군위안부 문제는 그 제도를 시행하는 데 있어서나 훗날 평가하는 데 있어서나 순결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한국 사회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순결사상을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열의를 보이는 집단은 대체로 순결사상을 맹종하는 가짜 여성운동가들, 즉 여성운동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가부장제도 수호운동을 하고 있는 집단이다.

여자는 결혼하기 이전에는 순결해야 한다는 미개한 사상, 여자는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켜야한다는 식의 낡은 생각들을 빼고 본다면 종군위안부 문제는 피해자의 숫자나 사안의 중대성 등에서 한참 후순위로 밀려난다. 즉 이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안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전쟁시의 인권유린이라는 범주에서 처리하면 될 것이다. 종군 위안부 가운데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했던 일본 여성들 가운데 아직까지 한 사람도 종군위안부 시절의 인권유린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사례가 없는 데 비해, 일본 여성의 절반도 안 되는 조선출신 위안부는 지금까지 33명이나 커밍아웃(Coming-out, 정체를 밝힘)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문제가 인권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선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종군위안부 사건이 반일 선동의 주요 메뉴로 사용되어왔다. 때문에 누구나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종군위안부로 일했던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는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성혁명으로 순결 이데올로기가 약해진 현상과 관련이 있다.

종군위안부들은 임신과 성병, 힘든 노동조건, 포주의 임금착취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나, 조선 출신 위안부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고통이 가장 심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조선 사회에서는 失節을 부녀자의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겼고, 뼈대있는 집안의 여자들은 외간 남자와 피부가 스치거나 팔다리의 맨살을 노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결하는 일이 많았다. 순결을 잃은 여자가 자결하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당연한 일로 여겨졌으며 국가에서는 이런 경우 열녀비를 세워 가문에 큰 상을 내렸다. 따라서 미혼의 여성이 수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과거는 조선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출신의 위안부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치심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성생활이 문란한 여자를 욕하면서 ‘화냥년’이라고 하는데, 이는 還鄕女로서 고향에 돌아온 여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17세기 초 두차례에 걸쳐 조선을 정벌한 만주족은 인질로 수십만의 조선인을 잡아갔는데, 조선에서는 오랜 시일동안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이들을 데려와야만 했다. 특히 여자의 몸값은 더 비쌌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돌아온 여성들은 실절한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들의 처리를 놓고 죽여야 한다는 의견과 용서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소란이 일었다.

결국 조선의 국왕은 환향녀들을 모두 모아 서울의 홍제천에서 몸을 씻게 하고 그것으로 정절을 되찾았다고 선언하였으나, 이들은 이후에도 세인들의 멸시 속에 혹은 자결하거나 혹은 치욕 속에 평생을 보내야만 했다. 종군위안부들도 고향에 돌아가면 이같은 화냥년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으므로 대부분은 귀국을 거부하고 현지에 정착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조선인 위안부의 고통은 일본 출신에 비해 훨씬 더 큰 것이었다.


[ 종군 위안부 제도의 실태 ]
앞에서 언급했듯이, 종군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공창제도의 연장선에 있다. 메이지 혁명 이후 일본 정부는 문란한 유곽을 정리하고 모든 매춘부와 포주를 국가에 등록하여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등록된 공창에는 예기와 창기, 작부, 여급 등 여러 분류가 있었지만 매춘에 종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당시 현대문명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도 순결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대단히 발전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메이지 시대 정착된 공창제도는 이후 기독교 등 서양 종교의 영향으로 폐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꾸준히 존속 발전되어 왔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매춘을 허가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창기들은 전세계로 진출해 막대한 외화를 송금했고, 이는 후발 공업국인 일본의 산업혁명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일본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공창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 파병된 일본군부대에 유곽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종군위안부는 따라서 군부대를 따라다니는 공창에 대해 그 공익성을 보다 강화,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해외에 파견된 종군위안부는 경쟁자가 없었으므로 수입이 좋았을 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도 뒷받침되어 위안부들은 힘든 노동을 묵묵히 견뎌내며 자발적으로 일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과 대만도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던 상태였으므로,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조선 출신인지 일본 출신인지를 따지는 일도 부질없어 보인다.

단지 일부 대좌부(포주)들이 급히 공창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를 속이거나 임금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부작용들이 있었을 것이나, 이는 모든 직업에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대좌부 개인들의 부정행위일 뿐 일본정부나 일본군이 책임질 성격의 사안이 아니다. 한국인 종군위안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강제로 끌려갔으며 임금에 대해서도 군표를 받아 포주에게 주었을 뿐 돈은 만져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조선인 위안부를 대표하는 증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위안부로 일해 단기간에 막대한 재산을 모았거나, 혹은 좋은 군인을 만나 결혼한 위안부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는 통계학에서 말하는 표본 모집단의 오류로서,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위안부들만이 커밍아웃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진실에 접근하기 힘들다.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증언하는 위안부들의 경우에도, 당사자들의 증언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가족과 대좌부의 입장은 사뭇 다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좌부는 위안부의 부모를 만나 사실을 설명한 뒤 막대한 선금을 주었을 것이고 부모는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숨긴 채 근로정신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했을 것이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1차 자료들에는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한 대좌부들이 적게는 300엔에서 많게는 2000엔까지의 거금을 부모나 가족에게 지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우 대좌부는 투자액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 기간동안 위안부에게 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위안부 당사자는 강제로 끌려와서 돈 한푼 받지 못하고 혹사당하다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종군위안소의 규모와 운영 실태는 어떠했는가. 전장이 확대되어가자 군에서는 후방에 보다 많은 종군위안부를 요청했고,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한 숫자의 위안부를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중일전쟁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현역군인 100명당 위안부 1명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1941년 전선이 동남아와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일본군의 규모는 급격히 늘어났고 따라서 위안부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일본 내에서 위안부를 구하기 힘들어진 포주들은 조선이나 대만, 중국 등지에서 부모에게 선금을 주거나 근로정신대로 가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이거나 혹은 거리에서 납치하는 방식으로 위안부를 조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는 한국의 국정교과서에서 주장하는 10만에서 20만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 육군사는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8년동안 동원된 일본군의 수를 720만에서 최대 800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군과 공군을 합친다 해도 1937년 이후 동원된 일본군의 숫자는 900만을 넘지 않았다. 패전 당시 1945년 8월 15일 현재 생존 일본군의 총수는 550만이며, 8년 간의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은 약 170만이다. (圖說 육군사, 1993, p179)

따라서 모든 부대에 대해 쿼터를 채웠다 해도 위안부의 가능한 최대 숫자는 9만명이다. 종군위안부는 평균 2년 정도 일했으므로 연인원으로 계산해도 숫자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위안부가 전쟁말기의 1-2년 동안 집중적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대에서는 위안부가 절대 부족이었다. 2만명 규모의 사단 위안소가 단 15명의 위안부로 운영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이 경우 쿼터를 채웠다면 200명 이상의 위안부가 필요하다. 따라서 실제 종군위안부의 수는 이론적 최대인원의 10분의 1 내지 2분의 1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종군위안부의 수가 최소 9천명에서 최대 4만5천명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일본과 조선, 만주 지역의 주둔군은 거의 위안소를 운영하지 않았으므로 이 지역의 군대 350만을 제외하고 200명당 1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설정하면 실제 위안부는 약 3만명이었다는 숫자가 나온다. 이는 위의 추정 범위 내에 들어가는 합리적인 숫자이다. 어떤 계산이나 추정으로도 한국에서 주장하는 10만에서 20만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는 동원된 모든 종군위안부의 총수이기 때문에 “조선과 타이완 및 점령 지역의 10만명에서 20만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속임수와 폭력을 통해 연행하였다” 라는 한국 교과서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조작인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위안소에서 위안부는 일본 여성이 조선여성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따라서 타민족에서 동원한 위안부의 숫자는 3천명에서 최대 1만5천명에 불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 교과서는 종군위안부의 숫자를 20배 이상 부풀리고 있으며 그 실태도 대단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위안소의 이용은 각 부대의 내부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필리핀 주둔군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남지구 사영내 특종위안소 이용 규칙
계급 시간 요금(조선인, 일본인) 요금(중국인)
병 1시간 2엔 1엔50전
30분 1.5엔 1엔
하사관 1시간 2.5엔 2엔
30분 1.5엔 1엔
장교 및 준사관 1시간 3엔 2엔50전
철야이용(24시부터) 10엔 7엔
철야이용(22시부터) 15엔 10엔

이용시간 병사 10시부터 16시까지
하사관 16시 10분부터 18시 40분까지
장교 및 준사관 18시 50분 이후

비고: 1. 군속은 각각의 신분에 따라 소정요금을 지불한다.
2. 이용객은 상기요금을 초과하는 금액을 위안소 경영자 또는 위안부에게 지불해서는 안된다.
각부대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일요일 연대본부, 연대직할부대
월요일 제1대대, 제4야전병원
수요일 연대본부, 연대직할부대, 제3대대
목요일 제1대대 (단 오전 중은 건강검진 후로 한다)
금요일 제2대대, 제4야전병원
토요일 제3대대

그 이외에도 성병 예방 및 섹스 보조기구, 건강검진, 요금 분배 등에 대해 세세한 규정들이 마련되어 있으나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같은 자료로 추정해보건대, 알려진 바와 달리 특종위안소(창기위안소)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위안부의 인권과 임금지불에 있어서도 상당한 보호조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안부들에게는 거칠거나 술에 취한 이용객을 거절할 권리가 있었으며, 예쁜 위안부의 경우는 이용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노동이 더 힘들었지만 후견인들을 이용해 많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 평가 ]
마지막으로, 종군위안부 문제를 평가함에 있어 그 형평성의 측면을 고려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일본인 위안부와 비교해 타민족의 위안부에게 더 혹독한 고통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형평성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측면에서는 대체로 형평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종군위안부는 대부분 일본인과 조선인,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인종 구성에 대한 신뢰할만한 연구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몇몇 지역의 위안소에 대해 인종구성을 추정할만한 자료가 있는데, 대체로 일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조선인과 중국인은 일부에 불과하다. 대만 출신은 위안소에 따라 일본인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고 중국인으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는데, 대체로 일본인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만의 인구는 일본의 15분의 1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조선의 인구는 일본의 3분지 1 수준이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동화되어 있던 조선과 대만 지역에서 인구비례보다 더 많은 종군위안부가 동원되었다고 생각할만한 증거는 없다. 아마 실제로도 인구비례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단지 조선 여성의 경우에는 사회발전 정도에서 일본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는 상황에서 강한 순결사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종군위안부로 일했다는 전력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이 더 심했으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측에서는 조선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 정도 수준의 문제제기에 그쳐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약간 미묘한 사안인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여자들에게도 군복무 의무가 있으며 특히 전시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성들의 군복무는 위안부 형태로 치르도록 권장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여성들의 전투능력은 상대적으로 남자군인들에 비해 떨어지므로 군의 사기나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여군은 간호나 사무, 위안소 종사 등의 전투지원 역할을 맡는 것이 좋다. 최근 미국에서는 여성들도 일부 전투부대에 참가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위안부 형태의 군복무에는 거부감이 클 수 있으므로 거부감을 상쇄할 수 있는 정도의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특종위안부에 대해서는 복무기간의 감면, 고소득 보장, 제대 후 각종 특혜를 부여하는 등의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국 정부도 월남전 참전군인들을 위해 변형된 군대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적이 있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위문 공연단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연예인들로 구성된 군대위안부들을 월남에 파병했다. 연예인 위문공연단은 한 부대에서 장기간 머무르면서 모든 장교들에게 섹스 접대를 했으며 운이 좋으면 사병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가수든 탤런트든 남한의 여성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월남 위문공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규모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최근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에도 한국군에 종군위안부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사히 신문 2002. 2. 24일자, 한국전쟁중 한국군에도 위안부 제도)

그러나 이 제도는 일본말고는 어느 나라에서도 공식적으로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이므로 좀더 연구와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대동아 전쟁시에 남자들은 징병 징용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했고, 여성은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로 봉사했다. 따라서 군대위안부는 국가 입장에서 여성에게 공평한 조치였으나 단지 포주에 의한 무리한 모집과 운영상의 인권유린, 임금 탈취 같은 부작용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특히 정조관념이 투철했던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정신적인 피해가 심각했던 점도 인정된다. 하지만 이는 사소한 문제이며, 큰 틀에서 볼 때 종군위안부는 총력전을 수행하는 국가를 위해 여성들의 당연한 봉사였으며 남성들의 희생에 비추어볼 때 그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없는 정도였다.

이상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한국을 중심으로 한 종군위안부 단체에서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개인배상과 전쟁범죄 사죄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협정을 통해 세계 각국에 전쟁배상을 마쳤으며, 이후 조약 당사국에서 제외된 한국, 중화민국,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과도 개별 조약에 의해 전후배상을 마무리지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에 의거해 한국측에 8억달러를 지불하고 정부, 민간차원의 모든 배상을 마무리지었으므로 한국의 전쟁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 이들이 소송을 하려면 당사국 정부에 하는 것이 국제법상 올바른 행위인 것이다. 또한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이미 전범재판이 열려 처리가 완료되었으므로 굳이 군대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따로 실효성도 없는 국제법정을 개설해 전범재판의 흉내를 내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일 시 : 1014524276 1014524276
제 목 : "한국전쟁중 한국군에 위안부 제도"<아사히>
(도쿄=연합뉴스) 고승일특파원=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에 위안부 제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아사히(조일)신문이 2002년2월 24일 보도했다. 한국의 경남대 객원교수인 김귀옥(김귀옥.40)씨는 23일 교토(경도)의 리쓰메이칸(립명관) 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 일본군의 위안부제도를 흉내낸 위안부제도가 한국군에도 있었다고 발표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김 교수는 지난 1996년 이후 5년간 인터뷰 등을 통해 "직접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있다", "군에 납치돼 위안부가 됐다"는 등 남녀 8명의 증언을 청취했다고 말했다. 또 김 교수는 한국 육군본부가 1956년 편찬한 공문서 `후방전사(후방전사)'에 `고정식(고정식) 위안소-특수위안대'라고 적힌 부분을 발견했고, 여기에는 4곳에서 89명의 위안부가 52년 한해에만 20만4천560회의 위안활동을 했다는 통계자료가 첨부돼 있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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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