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나는 88세입니다. 이제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기호 가야대학 객원교수]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조선말기
최기호 가야대학 객원교수나는 1923년생입니다. 이제 한국을 위해도, 일본을 위해도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위험도 각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사명인 것입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평양이나 토쿄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인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입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의 전에 전쟁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뉴기니에서 일본이 이긴 영상이 흐르자, 박수와 만세의 폭풍우입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해, 토쿄에서도 갔습니다만, 일본인은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원이 미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해, 선조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이라고 하는 인상을, 필사적으로 지우기 위해 반일을 지도자는 꼬드김은 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육을 비교하면, 일본이 10%왜곡이라고 하면, 한국은 90%왜곡입니다. 조선말기의 비정상인 정치 부패를 가르치지 않고, 일본이 관여하지 않으면 독립을 할 수 있던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의해 ‘교육’ ‘의료’ ‘공업’ ‘사회 인프라’가 정비되었습니다.근대국가의 기초가 쌓아 올려진 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실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의 산물이다!’라고 규탄하는 한국에는 기가 막힙니다. 더욱 ‘일제가 민족 산업을 정체시켰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코멘트하는 기분도 없어집니다.

민족 산업을 죽인 것은, 조선왕조입니다. 근대화를 주장하는 선진적인 사상가는 반역자로서 친족까지도 처형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제의 학대! 성 노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말기는 지옥이었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시대가 되어도 같았습니다. 1904년 , 일본은 조선의 참상을 구하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결단합니다. 예를 들면 1907년도 , 조선왕조의 세입은 748만엔이었지만 , 세출은 3000만엔 이상이었습니다. 그 차액은 일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1908년에는 더욱 증가해 , 3100만엔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88세의 노인의 절규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중요한 점은 상당수 한인 자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하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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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서울대 교수

전상인 서울대 교수

한국은 일제시기에 근대 자본주의를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하여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 수취관계를 대신하여 자본주의 논리가 새로운 수취관계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금융제도 및 교통·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근대적 제도의 정비가 일단락 된 이후부터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경제는 1930년을 전후한 공황기를 제외하고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다. 이는 매우 장기지속적인 경제성장이었다. 또한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산액(農産額)의 경우 80%에서 43%로 하락하였으나 공산액(工産額)의 경우에는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국내총생산에 있어 광공업의 비중은 1911년의 4.5%에서 1938년의 18.7%로 증가하였으며, 공장수에 있어서는 같은 기간 동안에 110개에서 6,590개로 늘어났다. 또한 공장노동자의 숫자는 1931년부터 1943년 사이 86,000여 명에서 36만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전체 노동자 숫자는 1943년까지 17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1940년대 초에 이르면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 경제성장의 동력은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 및 일본과의 수출입이었다. 따라서 공업화의 전형적인 패턴은 일본인 자본과 한국인 노동력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공장수를 보면 1918년에는 965개였다가 1939년까지 4,185개로 증가하였음에 반해, 일본인 공장수는 같은 기간 동안 929개에서 2,768개로 늘어났을 따름이다. 한국인 자본가의 대부분이 비교적 큰 규모의 일본인·조선인 합작회사에 투자·참여하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상당수 한인 자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하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원문 :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

"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 [이영훈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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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서울대교수-----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은.
“1910년 이후는 근대적 통계 자료가 있으나 그 이전은 직접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마지기 당 소작료 자료, 쌀값 상승을 보여주는 간접적 자료 등을 통해 대체적 윤곽을 그릴 수는 있다. 큰 추세로는 18세기를 거치며 1인당 소득이 서서히 떨어지다가 19세기 후반 급격히 감소했다. 1750년을 정점으로 농촌의 장시(場市) 숫자, 인구, 쌀 생산성 등이 일제히 떨어졌고,쌀값이 오르고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등 경제침체의 강한 추세를 발견할 수있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의 경제적 변화는.
“침체 일로의 조선 경제가 1900년을 전후해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 근대적 시장제도의 정착, 소유권 제도의 정비, 근대적 기업제도와 상법, 거래 안전성을 보장하는 신탁, 통신, 운수의 발달 등이 뚜렷하다. 식민지 시대를 걸쳐 총 80억 달러의 자본이 유입됐고, 일본인들의 농장과 공장이 생기면서 한반도 지역 단위의 GDP가 상승하고 1인당 GDP와 생활물자 소비량 등이 크게 늘었다. 1920ㆍ30년대 GDP는 연 평균 4% 정도 상승했다.”

-----식민지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나.
“그렇다. 무엇보다 인구가 늘었다. 19세기 내내 인구가 감소하다가 20세기 들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인구는 위생이나 전염병 등과도 관련이 있어직접적 경제 자료는 아니나 당시의 경제상황을 추정하게 하는 자료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 인구는 그 이전의 1,700만명에서 3,000만명(해외 이주300만명 제외)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경제력이 성장한 것이다.”
원문 : [한국일보 2004.04.22] 일제, 조선 근대화에 주력

일제시대는 사실 행복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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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우리집의 사진 앨범을 보면 ,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일본인과 찍은 사진이 많아서 처음 보았을 때는 당황스럽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 할아버지는 일본인과 친하게 지냈을까... 혹시 사람들이 욕하는 친일파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전 어린시절에 할아버지에게 용기를 내어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일본의 순사(경찰) 공무원 군인 등, 한국인을 탄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과 웃으며 사진 찍으시고 그런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셨냐고... (혼날 각오를 하고 진지하게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웃으시며 사실 일제시대는 조선왕조가 통치하던 때보다 훨씬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가지 말씀해 주셨는데.. 우선 의료기술이 발달되어서 사람들이 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오래 살수 있게 되었고 교육의 기회가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부유해 질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외도 많지만 잘 기억이 안나네요 ^^;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것과 너무 달라서, 어린 마음에 저는 또 물어봤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강제로 징용하고 혹사 시켰다고... 위안부도 만들었다고... 독도도 우긴다고...
할아버지 께서는 한국인 강제 징용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마음대로 강제로 끌고가 징용한 것이 아니라, 사형수나 강력범죄자 그외의 범죄자들을 징용터에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강력 범죄자들의 인권도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 다만 그당시와 지금의 인권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정확히 모르신다고 하셨고, 독도는 분명히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이던 한국이던 외교는 자국 이익이 최선이기 때문에 억지를 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제시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마지막으로 제가 할아버지에게 우리집은 일본인과 친하게 지냈으니 친일파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친일파와 매국노는 다른 것이라고 하셨고 친일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당시에 한국민족을 위하는 최선의 길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현실과 자신의 위치를 인정해 일본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배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당시에는 대부분이 친일이었고 TV에 나오는것처럼 대다수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또 쓸대없는 자존심으로 자신의 위치와 현실을 부정해 일제 사회로 부터 이탈하여 교육의 기회와 근대사회로의 융화를 거부하며 독립만세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 chuo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셨고 여러 사정으로 원하시던 일본의 변호사는 되지 못하셨지만 해방후 정무직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때는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친일이 무조건 나쁜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 일제시대가 언론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흉악했던 것은 아니라고 추정되네요;;
출처 : 일제시대는 사실 행복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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