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2 제1차 세계대전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2 제1차 세계대전
[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 ]
일노전쟁 후,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의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유럽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유럽의 정세는 긴박해졌다. 독일은 이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삼국동맹(三國同盟)을 맺고 있었지만 강력한 해군력을 확대하여 해외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를 우려한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에 접근해 1907년 삼국협상(三國協商)을 성립하고 독일을 포위하였다. 유럽의 각국이 양 진영의 어느 한쪽과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 당시 발칸반도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지향하는 운동이 고조되었다. 이 지역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열강은 독립운동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며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세르비 아 등의 슬라브 민족을 지원하고 오스트리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친러적인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된 사건(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삼국협상 측과 삼국동맹 측이 연이어 참전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 일본의 참전과 21개조 요구 ]
일영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 삼국협상(三國協商) 쪽에 붙어서 참전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와 태평양의 적도 이북의 섬들을 점령했다. 또한 독일 잠수함이 적국의 협상측 상선을 사전 경고 없이 무제한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개시하자, 일본은 구축함대를 지중해에 파견했다.

한편 중국은 일본군이 칭다오에서 철퇴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에 대해 일본은 1915년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둥성 권익의 인계, 관동주(關東州)의 조차 기한 연장 등을 중국에 요구했다. 중국측은 열강의 개입을 기대하며, 일본인 고문 수용 등 비밀이었던 요구 사항(희망 조항) 내용을 국내외에 알리고, 「21개조 요구」라고 명명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항의했지만, 일본은 최후 통고를 하고 희망 조항을 제외하고 받아들이게 했기 때문에 중국 국내의 반일 여론은 고조되었다.

<21개조 요구(일부 요약)>
1 중국 정부는 독일이 산둥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체의 권리를 일본에 양도할 것.
1 일본의 뤼순(旅順), 다롄(大連) 조차 기한, 남만주철도 조차 기한을 99년 연장할 것.
1 중국 정부는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의 광산 채굴권을 일본에 줄 것.

63 러시아혁명과 대전의 종결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3 러시아혁명과 대전의 종결
[ 러시아혁명 ]
길어지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식량난으로 고통받던 도시 시민의 폭동에 군인이 합류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마르크스주의(*1) 이론에 기반하여 국외로 망명해 혁명의 기회를 기다리던 레닌은 이러한 정세를 바로 이용하였다. 무장봉기(武裝蜂起)한 레닌 일파는 노동자와 군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표자회의(소비에트)를 거점으로 하는 정부를 만들었다. 그후 다른 당파를 무력으로 배제하고 자신이 이끄는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중지하고 혁명에 반대하는 국내세력과의 내전에 몰두하였다. 이 때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일족과 공산당이 적으로 간주하는 귀족, 지주, 자본가, 성직자, 지식인 등이 다수 처형되었다.

(*1) 독일의 사상가 마르크스가 주창한 주의(主義). 혁명에 의하여 근로자가 자본가를 쓰러 뜨리고 과도기인 사회주의 사회를 거쳐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려는 사상. 단 사 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시베리아 출병 ]
오랜 세월 남하하는 러시아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일본은 공산주의 혁명세력에 대해서도 미국 이상으로 강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유럽 나라들은 군(軍)을 보내 혁명 저지를 위한 간섭 전쟁을 행하였다.
1918년, 일본은 러시아 영내에 고립된 체코슬로바키아 부대의 구출과 시베 리아에의 영향력 확대를 목적으로, 미국 등과 함께 시베리아로 공동 출병하였다. (*2) 얼마 안있어 미국은 철병하였지만 일본은 1922년까지 공산군과 싸우고 병(兵)을 철수하지 않았다.

(*2) 시베리아 출병에는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확정된 만주의 이권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 총력전 ]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등을 거치면서 전쟁은 4 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과거의 전쟁 (*3)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각국은 가질 수 있는 힘의 전부를 끌어내어 국민 생활 전체가 전쟁에 말려들었다. 이런 전쟁을 총력전이라고 한다. 과학병기가 발달함에 따라 비행기, 비행선, 전차, 잠수함, 심지어는 독가스 등의 신병기가 이용되고, 참전국의 국민들은 공습에 노출되었다. 국민은 군수공장에 동원되었고 생활필수품이 부족해지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3) 그때까지의 전쟁은 나라들 사이의 외교상 수단의 연장이기도 해서, 패배하면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빼앗길 뿐, 정부나 국민이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은 없었다. 전쟁은 군인이 싸우는 것으로 반드시 모든 국민이 말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 대전의 종결 ]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 등 삼국동맹 측의 패배로 끝났다. 최대의 전장이 되었던 유럽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총력전의 비참한 현실을 경험하였다. 다수의 국민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 서로를 살육한 것은 후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참전했던 일본은 결과적으로 적은 희생으로 전승국이 되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에 있어서도 이 전쟁은 국력의 전부를 기울인 전쟁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분기점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일본과 미국 두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발언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64 베르사유조약과 대전 후의 세계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4 베르사유조약과 대전 후의 세계
[ 베르사유조약과 국제연맹 ]
1919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려, 일본은 5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의 하나로서 출석하였다. 강화회의 결과,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은 전쟁의 책임을 추궁받아 모든 식민지와 영토의 일부를 잃고 가혹한 배상금의 변제에 시달리게 되었 다. 이것은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강화를 위한 14개조의 원칙을 제창하여, 국가의 이해(利害)를 초월한 세계평화와 국제협조를 위한 기관으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프랑스 등의 다른 전승국 중에는 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공론이라 하여 반대하는 나라가 있었다. 하지만 전승국은 미국의 참전으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20년 국제연맹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참가하지 못해, 국제연맹은 제한된 힘 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요약발췌)>
3. 보호무역의 폐지
4. 군비의 축소
5. 민족자결에 기반한 식민지 문제의 공평한 해결
14.모든 국가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목적으로 한 연맹의 설립.

[ 아시아의 독립 운동 ]
대전 후 민족 자결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도 민족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는 비폭력주의 지도자인 간디와 네루가 약속받았던 인도의 자치를 영국에 요구했다. 영국은 이를 탄압했지만, 민족 독립의 움직임은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구(舊)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데모 행진을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3·1독립운동) 이 때 조선총독부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했지만, 이후에는 무력으로 억누르는 통치 방법을 변경했다.
중국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중국의 옛 독일 권익을 이어받게 되자, 1919년 5월 4일 베이징(北京)의 학생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 이 운동은 그 후 중국 각지로 확산되어 갔다.

사진: 3·1독립운동

[ 일본의 대전 경기 ]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는 군수품의 수출이 급증하였다. 아시아지역에 대한 수출도 큰 증가를 보이고 중공업도 급속히 발전하여, 일본은 대전경기(大戰景氣)라 불리는 공전의 호경기를 맞이하였다.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스미토모(住友) 등의 재벌(財閥)은 금융과 무역, 조선과 같은 다각 경영으로 급속히 힘을 키웠다.
이렇게해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일청∙일노에 이은 제 3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한편으로, 큰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 성과를 얻었기 때문에 향후의 전쟁이 총력전이 된다고 하는 세계의 동향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65 정당 정치의 전개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5 정당 정치의 전개
[ 정당 내각의 탄생 ]
일노전쟁 후 일본의 정치에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라는 정당과 번벌세력(藩閥勢力)이 번갈아 내각을 조직하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메이지천황이 죽고 다이쇼시대가 시작된 1912년경부터 번벌정치를 비판하고 헌법의 정신에 기반하여 국민의 의사를 반영 한 정치를 요구하는 운동(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데모크라시라는 말을 「민본주의」라고 번역하여, 보통선거에 의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1918년, 시베리아출병을 기대한 일부 상인들에 의한 쌀 매점 소문이 발단이 되어 쌀 가격이 올라가자, 이에 분노한 군중이 쌀 상인을 습격하는 소동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쌀소동) 같은 해 내각이 총사직하자 입헌정우회의 총재인 하라 다카시(原敬)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조직하였다. 하라(原)는 육, 해, 외무의 3대신 이외의 모든 대신을 중의 원의 제1당인 입헌정우회의 의원 중에서 임명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정당내각을 조직하였다.

[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와 사회운동 ]
다이쇼시대,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대일본제국헌법 하에 의회에 기초를 둔 정당정치가 정착되고 보통선거운동과 같은 사회운동도 활발해져, 민주주의(데모크라시) 사상과 국제 협조의 여론이 고양되었다. 이것을 다이쇼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다수 조직되고 농촌에서는 소작쟁의도 일어났다. 1920년에는 일본 최초의 메이데이(May Day)가 행해져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1922년에 전국스이헤이샤(全國水平社)가 조직되어 부락차별 철폐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부인운동도 시작되어, 히라쓰카 라이초 등의 활약에 의해 부인 참정권이 주장되었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확산된 것도 이 시기였다.

[ 헌정(憲政)의 상도(常道) ]
하라 다카시(原敬)는 1921년 폭한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당세력은 유력한 지도자를 잃고 그후 비정당 내각이 계속되었지만, 1924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수상으로 한 호헌 삼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8 년간 중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의 총재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이를 「헌정(憲政)의 상도(常道)」라고 한다. 가토내각은 1925년 보통선거법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납세액에 관계없이 25 세 이상의 남자 전원이 선거권을 획득하였다. 1928년에는 제1회 보통선거가 행해져 정우회(政友會)가 제1당이 되었다.

사진: 최초의 보통선거 (1928년 2월)
유권자의 수는 인구의 약 20%로 4배 가까이에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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