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7 청일전쟁 (日淸戰爭)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7 일청전쟁(日淸戰爭)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1851-94년) 갑신사변 후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암살되었다.

[ 조선을 둘러싼 일청의 항쟁 ]
일본은 조선이 개국한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대 제도의 개혁을 지원했다. 그러나 1882년 개혁에서 밀려나 냉대받는 데 불만을 품은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즉각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한 김옥균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이를 진압했다 (갑신정변). 조선에서의 청과의 싸움에 두 번 패배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여 마침내 거의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 일청전쟁(日淸戰爭)과 일본 승리의 원인 ]
1894(메이지 27)년 조선 남부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는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며, 한때는 조선반도의 일부를 제압할 정도였다. 미미한 병력밖에 갖추지 못한 조선 왕조는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청했는데, 일본도 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1)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터는 조선 외에 만주(중국 동북부) 남부 등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은 육상 전투에서도, 해상 전투에서도 청을 제압하여 승리했다. 일본의 승리 원인으로는 신병기의 장비와 더불어 군대가 훈련과 규율에서 우세했던 점을 들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일본인 전체의 의식이 한 국민으로 뭉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1) 1885(메이지 18)년, 일청 양국이 조선에 출병할 때에는 사전에 서로 통지한다는 조약이 양국간에 체결되어 있었다.

사진: 붙잡힌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중앙)

[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과 삼국간섭(三國干涉) ]
1895(메이지 28)년, 일청 양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 정부의 재정 수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배상금 3억 엔(2억 냥[兩, 역주: 중국의 구식 은화 단위])을 지불하고,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대만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잠자는 사자」라 불리며 그 저력으로 주위를 두렵게 했던 청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신흥 국가 일본에 맥없이 패함으로써, 고대로부터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의 질서는 붕괴되었다. 중국은 순식간에 열강 제국의 분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간단히 구미 열강과 대등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 야심을 품은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움직여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이것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은 물리쳤지만, 혼자 힘으로 삼국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일정액의 환부금과 교환하여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어야만 했다. 일본은 중국 고사에 있는 「와신상담」(*2)을 모토로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국력의 충실에 힘쓰게 되었다. (*3)

(*2) 장작 위에서 잠으로써 몸을 고통스럽게 하고,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잊지 않으려는 중국의 고사성어.
(*3) 그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는 정부와 정당이 협력하게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헌정당(憲政黨)을 창립하고, 1898(메이지 31)년 처음으로 정당원이 총리대신이 된 오쿠마 내각이 탄생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스스로 총재가 되어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결성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헌상 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제4조 청국은 일본 제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3-7] 청일전쟁 p347

일본은 조선보다 22년 앞서 미국에 의해 강제개항을 경험하였다. 그 뒤 일본에 들어온 서양세력과 일본 내부의 지방 세력들은 이합집산하면서 오랜 내전을 겪었으며 그 결과 1868년에 이르러 300년 동안 유지되었던 강호(江戶, 에도) 막부정권이 붕괴하고 덴노(천황)를 중심으로 한 영국식 입헌군주제도 아래 단일 국가로 통일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유럽의 근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를 일본사회에 도입하는 시민 혁명에 성공하였으며 이 과정을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유신 이후 일본 사회의 근대화는 더욱 가속되어 1881년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설립되었고 1885년에는 내각제가 도입되었으며 1889년에는 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리로 1890년에는 일본 최초의 직접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일본의 이 같은 변화는 당시 열강의 침략과 전제 군주제 아래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놀랍도록 신속한 것이었는데, 이는 일본이 서유럽 이외에 유일하게 봉건제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봉건 사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작은 왕들의 연합체로 국가를 이루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서유럽과 일본의 봉건영주들은 군주로부터 받은 봉토를 기반으로 하여 독자적인 세금제도와 법률, 그리고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왕과 같은 존재였다.

봉건 사회의 경험이 왜 자본주의 발전과 그토록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큰 국가체제 아래 작은 번국들이 교류 경쟁하는 과정에서 시장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생산력 발달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 정도이다. 일본의 경우 오랜 막부 봉건시대를 겪으면서 활발한 생산력의 증대와 화폐 및 시장 경제의 발달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중세의 유럽과 같이 두터운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였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근대화 혁명을 마무리 짓고 1880년대부터 본격적인 산업혁명기에 돌입한 일본의 국력은 신기술의 도입과 활발한 무역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그 결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경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청일전쟁은 개항 이래 40년 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놀라운 변신을 경험한 일본이 그 성장한 국력을 세계무대에 선보이는 첫 번째 기회였던 것이다.

1894년 5월 초 청일 양국이 거의 동시에 조선반도에 군대를 파병하면서부터 사실상 청국과 일본은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양측 사이에 뚜렷한 교전이 발생하지는 않고 긴장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6월 23일 서해 아산만 해상에서 최초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는데, 이를 풍도해전이라 한다. 이 날 쓰보이 소장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아산만의 풍도 근처에서 정찰을 하던 중 청국 군함 2척을 발견하고 맹포격을 시작했다. 1시간 20분간 지속된 이 전투에서 청나라 해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주하였다. 이 두 척의 군함은 아산만에 청국의 추가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한 함대의 호위함이었는데 이들이 격파됨으로 인해 청군 1200명을 싣고 뒤따라오던 수송선이 격침되어 막대한 군수물자와 병력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풍도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아산만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고 청군의 보급로와 추가 병력이 차단되어 5월 초 선발대로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은 고립되었다. 아산만 일대에 고립된 청나라의 육군 2500명은 서울에서 남하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상, 방어에 유리한 성환 지역에서 방어진을 펴고 대기하였다. 6월 26일 남하한 일본군 혼성여단 5000명은 성환에서 청군과 조우,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위치가 불리한 일본군은 여기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병력 수, 화력, 전술 등 모든 면에서 앞선 일본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청군은 1000명의 전사자를 남겨둔 채 다시 아산으로 철수했고 이어 공주와 청주를 거쳐 평양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한반도의 평양이남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육지와 바다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남한 지역에서 청의 군대를 물리친 일본은 즉각 서울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 정부를 전복한 뒤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개화파들을 입각시켜 조선의 근대화 개혁에 착수했다. 당초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내정개혁에 대해 청일의 공동작업을 제안했지만 청국이 이를 거절하자 단독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게다가 고종과 민씨 정부마저 일본의 시정개혁 요구를 거절하자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야만 했던 일본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관군의 군사력은 일본군의 상대가 못되었으므로 일본 입장에서 이는 쿠데타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무력행사에 불과했다.

7월 1일, 청국과 일본은 형식적인 선전포고를 했으나 별다른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청군은 평양성을 지키면서 남진하지 않았고, 그 동안 시간을 번 일본은 속속 병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7월말이 되자 일본군은 두 가지 루트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일본군은 8월초 황해도를 거쳐 8월 중순 평양성에 도착했고, 본토에서 출발한 일본군 제3사단은 7월말 원산에 상륙한 다음 평양성을 향해 서진해 나갔다. 이들은 8월 중순 평양 근교에서 합류한 뒤 8월 16일부터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에 대해 전면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평양성을 수비하고 있던 청군 병력은 15,000여명으로 일본군의 공격부대와 비슷한 숫자였다. 게다가 청군은 이홍장이 이끄는 최정예 부대였다. 하지만 일단 무기와 사격술, 기동력과 전술 등 모든 면에서 청군을 압도하고 있던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전투는 예상외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오전 8시가 되자 일본군은 모란봉을 점령할 수 있었고 오후 5시가 되자 청군은 모든 저항을 멈추고 투항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청군은 전사 2천명, 부상 5천 명 등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600명에 불과했다. 청국의 최정예 부대를 상대로 한 평양성 전투는 당시 일본군이 보유한 전투력의 질적인 우수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평양성이 함락된 다음날 청나라 해군은 일본 해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황해 요동반도 근처의 해양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는 이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연합함대 12척이 동원되었고, 청나라에서는 정여창 제독이 이끄는 전함 12척과 수뢰정 6척이 참가했다. 전투 초기 청나라 해군은 일본 군함 2척을 포위 공격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 사이 청나라 함대의 뒤쪽으로 돌아간 일본 해군의 주력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전세는 이내 역전되었다.

곧 지휘함이 파괴되면서 청나라 함대가 하나둘씩 흩어져 일본 함대에게 사냥 당하자 청의 해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하나둘씩 도주해버렸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 해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결과는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후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요동반도를 점령하고 점차 북경 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자 청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막강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개항 이후 수많은 내전을 겪으면서 실전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막부 시대 일본은 수십 개의 번(藩, 일본어로는 한이라고 읽는다)이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정권을 사이에 놓고 많은 나라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여러 차례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또한 개항에 반대하던 몇몇 번에서는 독자적으로 서양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863년 개항을 거부한 사쓰마는 독자적으로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조슈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식 무기를 갖춘 서양 군대와 맞서다 잇따라 패배하자 일본의 한국(번국)들은 이후 열심히 서양의 무기체계와 전술을 도입해 신속하게 무력을 증강하는 한편, 서양의 정치제도와 문물, 교육 시스템을 배워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이처럼 강력해진 각 한들이 청나라와의 전쟁에 병력을 파견, 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청국의 정예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미 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조선은 일본의 연합군으로 청나라와 싸웠다.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일본군 주력부대는 만주로 진격, 11월6일 금주성을 점령하고 11월 22일에는 요동반도의 핵심 군사항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순(뤼쑨)항을 공격, 단 하루 만에 점령해 버렸다. 요동반도를 점령한 일본군 주력부대는 다시 산동 반도에 상륙, 위해위를 점령하였고 동시에 일본해군의 주력부대는 남아있던 청나라 북양 함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 모든 전함을 전멸시켜버렸다.

또한 남쪽의 일본 해군은 펑후 제도에 상륙하여 대만 점령전을 시작했다. 만주 방면의 일본군은 서진을 계속하여 1894년 연말이 되자 요하의 동쪽 지역 모두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본군이 만주와 산동 반도에서 북경을 압박해오자 청나라는 일본정부에 강화회담을 요청했다. 이는 사실상 청국의 항복 선언이었다. 청일 양국은 1895년 3월 30일 휴전상태에 돌입하였고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강회회담이 시작되었다. 4월 17일 양국은 회담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국의 전권대사 이홍장과 일본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합의하였다.

1. 조선에서 청국의 종주권을 포기한다.
2.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내준다.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4. 중국 영토에서 일본에게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타이완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를 거부하는 폭동이 일어났으나 일본은 고전 끝에 1895년 11월에 이르러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은 300년 전 임진왜란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에게 패퇴한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으며, 대국 청을 격파함으로써 일약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 서양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분루를 삼켜야만 했던 일본으로서는 이 청일전쟁의 승리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만주와 조선반도, 대만을 영향력아래 둠으로써 오랜 숙원이던 대륙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를 물리친 환호와 영광도 잠시뿐, 일본의 앞에는 더 큰 적 러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2차 봉기

한편, 국내에서는 전라도 지방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자치 행정을 펴고 있던 농민군 사이에 일본에 저항하는 2차 봉기를 감행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2차 봉기를 일으켜 조선 전체를 장악하자는 주장은 7월초부터 김개남 등 동학과격파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김개남은 주로 천민 계층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농민봉기로 인해 전라도 지역이 동학의 세상으로 바뀌자 주로 노략질에 치중하고 있었다. 특히 김개남의 부대에는 노비, 백정, 승려 등 천민들이 많이 몰려들어 그동안 조선 계급사회에서 당한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양반과 지주들의 재산을 빼앗고 행패를 일삼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신중한 동학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비적떼와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봉준은 그동안 전라도 지역에서 관민 화해 정책을 통해 부드러운 통치를 펼쳐왔는데, 김개남은 이 같은 노선에 불만을 지닌 세력을 규합하여 농민군 과격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김개남은 전봉준의 정치적인 라이벌로 등장했는데, 그는 아마도 농민군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왕이 되려는 야심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제압하고 전선이 만주와 대륙 본토로 옮겨짐에 따라 김개남 등 과격파의 봉기요구는 날이 갈수록 거세어져 갔다.

이에 결국 전봉준 등 온건파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고 2차 봉기를 기정사실화한 채 준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지역에 대한 농민군의 통치가 5개월 이상 계속되면서 농민군의 세력은 놀랍게 성장해 이미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이는 이들이 일본군과 조선 관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한 무력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무모한 시도였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경복궁 쿠데타로 인해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혁명적인 유신의 과업이 진행되고 있던 터라 이들의 봉기는 아무런 명분도 실익도 없는 것이었다. 김홍집 내각에 의해 실시된 갑오개혁은 당초 농민군이 주장했던 폐정개혁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훨씬 더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1차 봉기의 농민군은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촉발하는 혁명군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2차 봉기를 일으킨 농민군은 반혁명세력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있었다.

이들은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단순히 세상을 뒤집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천민 계층의 원초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다시 군대를 일으킨 것이니 이미 혁명군이 아니라 힘이 커진 도적떼에 불과했던 것이다. 1894년 10월 초, 동학은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2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일본 연합군과 대적했으나 두 달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궤멸되고 말았다.

57 청일전쟁 (日淸戰爭)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7 일청전쟁(日淸戰爭)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1851-94년) 갑신사변 후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후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암살되었다.

[ 조선을 둘러싼 일청의 항쟁 ]
일본은 조선이 개국한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대 제도의 개혁을 지원했다. 그러나 1882년 개혁에서 밀려나 냉대받는 데 불만을 품은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즉각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한 김옥균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이를 진압했다 (갑신정변). 조선에서의 청과의 싸움에 두 번 패배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여 마침내 거의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 일청전쟁(日淸戰爭)과 일본 승리의 원인 ]
1894(메이지 27)년 조선 남부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는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며, 한때는 조선반도의 일부를 제압할 정도였다. 미미한 병력밖에 갖추지 못한 조선 왕조는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청했는데, 일본도 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1)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터는 조선 외에 만주(중국 동북부) 남부 등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은 육상 전투에서도, 해상 전투에서도 청을 제압하여 승리했다. 일본의 승리 원인으로는 신병기의 장비와 더불어 군대가 훈련과 규율에서 우세했던 점을 들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일본인 전체의 의식이 한 국민으로 뭉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1) 1885(메이지 18)년, 일청 양국이 조선에 출병할 때에는 사전에 서로 통지한다는 조약이 양국간에 체결되어 있었다.

사진: 붙잡힌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중앙)

[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과 삼국간섭(三國干涉) ]
1895(메이지 28)년, 일청 양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 정부의 재정 수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배상금 3억 엔(2억 냥[兩, 역주: 중국의 구식 은화 단위])을 지불하고,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대만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잠자는 사자」라 불리며 그 저력으로 주위를 두렵게 했던 청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신흥 국가 일본에 맥없이 패함으로써, 고대로부터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의 질서는 붕괴되었다. 중국은 순식간에 열강 제국의 분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간단히 구미 열강과 대등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 야심을 품은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움직여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랴오둥 반도를 청에게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이것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은 물리쳤지만, 혼자 힘으로 삼국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일정액의 환부금과 교환하여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어야만 했다. 일본은 중국 고사에 있는 「와신상담」(*2)을 모토로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국력의 충실에 힘쓰게 되었다. (*3)

(*2) 장작 위에서 잠으로써 몸을 고통스럽게 하고,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잊지 않으려는 중국의 고사성어.
(*3) 그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는 정부와 정당이 협력하게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헌정당(憲政黨)을 창립하고, 1898(메이지 31)년 처음으로 정당원이 총리대신이 된 오쿠마 내각이 탄생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스스로 총재가 되어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결성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인정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헌상 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제4조 청국은 일본 제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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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