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3] 어두운 죽음의 시대 p317

가렴주구(苛斂誅求) - 가혹하게 거두고 칼로 베서 빼앗는다는 뜻의 이 한자용어는 조선 말기의 사회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용어라 하겠다. 특히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 사회는 경주 김씨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정권을 잡고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다. 이 시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는데 많은 돈을 투자해 지방의 수령직을 산 방백들은 백성을 가혹하게 갈취해 투자원금을 회수하는 한편, 그 돈으로 다시 중앙의 고관과 줄을 대 신변을 보호받는 방식으로 부귀영화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이 시기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주로 3정의 문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3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한다. 먼저 전정(田政)이란 토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인데, 본래 조선의 농민들은 국가 소유의 땅을 경작하면서 토지 1결당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세금을 납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이 전세보다도 토지에 부과되는 각종 잡세와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당시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다고 하는데 본래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에 부과되는 세금이지만 지주들은 이를 소작농에게 전가하였다. 특히 전라, 경상 지방에서 이 같은 불법행위가 많았다. 또한 지방 아전들은 허복, 방결, 도결 등 여러 가지 농간을 부려 농민의 등을 처먹었기 때문에 전정의 문란은 조선후기 사회의 고질병이었다.

군정(軍政)은 조선 왕조가 백성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을 말한다.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물론 15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군인으로 징발했으나, 평화시에는 군에 입대하는 대신 이를 옷감으로 받았다. 영조 때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들이 국가에 바치는 군포는 연간 베 2필에서 1필로 부담이 줄긴 했으나, 점차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층이 늘어나면서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날로 커져만 갔다. 또한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했으므로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 무리한 정책을 펴는 경우가 많아 백성의 고통이 심했다.

환곡(還穀)이란 3월에서 5월 사이 보릿고개에 관에서 양민에게 곡식을 빌려주어 춘궁기를 넘기게 한 다음, 가을에 다시 돌려받는 정책을 말한다. 원래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정책이지만 지방의 관리들은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제공된 환곡의 양을 속인 뒤 가을에 농민으로부터 훨씬 많은 양을 거두어들인 다음 남는 양을 착복하곤 하였다. 이로 인해 추수기에 모든 양식을 빼앗긴 농민들의 생활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세기 초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중앙 정부의 인사권과 정책결정권을 독점한 뒤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해 벼슬자리를 사고팔았으며 이로 인해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호 세력은 마음껏 백성을 착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이에 따라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해 정조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민란은 점차 조직이 갖춰지고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1862년에 이르면 전국에서 37차례에 걸쳐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안동 김씨 정권이 무너지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정권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이라 한다.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1862년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부패와 착취 때문이었다. 민란이 일어나기 전 백낙신은 직위를 이용하여 약 5만 냥의 돈을 착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쌀로 환산하면 1만 5천 석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게다가 당시 백낙신의 지휘를 받는 하급 관료들은 진주목에서 공금과 군포를 횡령해 빼돌린 뒤 농민들에게 이를 부담시켰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석이나 되었다. 1석이란 과거 농업사회에서 성인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고살 수 있는 양의 곡식을 말하는 단위로서, 지금으로 치면 한 가마 정도 되는 분량이다.

자신의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양은 유럽이나 일본의 봉건시대에 지방 군주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비슷한 단위를 사용했다. 즉 천석군이라는 말은 1년에 자신의 영토에서 10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지주라는 뜻인데, 이는 그가 약 1000명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봉건제도가 발달했던 일본에서는 1석이 1 고쿠인데, 지방을 다스리는 왕들은 작게는 10만 고쿠에서 크게는 30만 고쿠까지를 수확할 수 있었다. 즉 30만 고쿠의 영주라는 것은 매년 자신의 영토에서 30만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왕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30만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의미이며, 전시에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1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던 19세기말 진주에서 일개 관료들이 1만5천석, 2만8천석을 횡령했다는 것은 다음해 보릿고개에 1만5천명, 2만8천명의 농민이 굶어죽을 것이라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굶어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 결과였다. 어쨌든 이렇게 봉기한 농민군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지만 농민군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못된 아전들을 죽이고 악질 지주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23개 면을 휩쓸면서 10만 냥의 재물 손실을 일으켰다. 당시 진주의 농민군이 백낙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이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비록 탐관오리라고 할지라도 왕의 대리인인 관리를 함부로 처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폭발한 임술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 경기도로 확산되어 무려 37차례의 크고 작은 농민봉기로 이어졌으며 농민들은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들고 일어나 조선왕조의 학정에 대항하였다. 특히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발생한 것으로 농민봉기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여러 가지 사회 모순으로 인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왕실과 소수 특권층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백성을 쥐어짜 자신들의 배를 불릴 궁리에 여념이 없었으며 지방의 관료와 토착 양반계급은 서로 결탁해 힘없는 농민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은 유교의 잔혹한 규범에 묶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야 했는데, 예를 들어 조선 왕조는 사대부가의 여인들에게 남편이 죽게 되면 아내도 스스로 자결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남편을 따라 여자가 자결하면 이를 기리는 열녀문을 세워 귀감으로 삼고 후한 상을 내렸으므로 가문의 중흥을 꾀하던 사대부가에서는 일부러 미망인을 살해한 뒤 자결한 것처럼 꾸미는 일이 허다했다. 양반 계급에서도 적서 차별로 인해 정부인의 자식이 아닌 사람은 아버지를 나으리로 부르도록 하고 천민 대접을 하여 이들은 체제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공직사회의 부패와 조선 체제 내부의 갈등은 개항 이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돈으로 관직을 산 지방 탐관오리들의 부패가 가장 큰 문제였으나 개항 이후에는 아예 왕실과 중앙 정부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부패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제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갖추지 못했던 조선 왕실은 재정이 고갈되자 당오전 당백전 등 고액의 화폐를 마구 찍어내 사용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1883년 민비 일파가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근대적인 화폐제도의 도입 없이 고액권을 찍어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결사반대했으나 민비는 고종을 설득해 끝내 이를 결정해버렸다. 이후 정부는 당오전으로 모든 정부 지출을 집행하기 시작했으나 상평통보 5개의 가치를 갖는다고 적혀있는 것과는 달리 당오전은 시중에서 상평통보의 2배 정도의 가치로만 통용되었다. 정부에서 일정한 기준 없이 화폐를 남발하는 것도 심각한데 그것도 고액권을 남발함으로써 조선 경제에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당오전의 실제가치와 액면가치가 다르게 유통되자 지방관리들은 세금을 받을 때에는 상평통보로만 받고, 중앙 정부에는 당오전으로 지급해 그 차액을 챙기는 새로운 횡령수법을 사용했다. 주민으로부터 1만냥(상평통보 1만개)의 세금을 거둔 뒤 이 가운데 4천냥으로 당오전 2천 개를 매입한 뒤 이를 중앙에 납부하고 차액인 6천냥은 자신들이 빼돌리는 방식으로 지방 관리들은 엄청난 공금을 횡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역사상 가장 뇌물을 좋아했던 임금이었던 고종은 모든 정부관직을 매매할 때 직접 돈을 받아 챙겼고 신하들이 인사차 방문할 때마다 가져오는 돈의 액수로 사람을 대했다고 하니, 조선판 전두환 쯤 되는 인물이었다 하겠다. 혹은 전두환을 현대판 고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한국방송공사, 한국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뇌물 편) 고종은 매월 말 8도의 재산가를 불러 모아 참봉, 도사, 감역 등 중앙관직을 일종의 경매 형식으로 팔아치웠고 지방 수령을 임명할 때에는 입찰 방식으로 관직을 매매했다.

고종의 입찰방식이란 지방 수령직을 원하는 여러 후보자들에게 일단 돈을 받은 다음 제출한 액수에 따라 상위 순번을 몇 명 골라 다시 입찰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현감 목사 감사직은 가장 많은 돈을 낸 후보자에게 낙찰되었으나 입찰에 떨어진 사람들도 이미 낸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고종 특유의 잔머리 굴리기 입찰이었다. 가격은 하급직의 경우 1만냥, 요즘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감사직은 50만냥 수준에서 낙찰되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시험의 합격자도 돈으로 결정되어 소과 합격은 3만냥, 대과 합격에는 10만냥이 필요했다. 1893년경이 되자 조선 정부는 수입을 늘이기 위해 1년에 10여 차례나 과거시험을 시행하는 등 매관매직의 인플레이션도 극에 달했다.

또한 개항 이후 상품유통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중앙부처와 지방관청, 지방 토호(유력인사)들이 서로 나서 유통되는 모든 물품에 갖가지 명목의 세금을 붙이기 시작했다. 법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사회에서는 그저 힘 있는 기관마다 필요에 따라 세목을 만들어 돈을 거뒀기 때문에 백성들은 한 가지 물품을 살 때에도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만 했다. 이처럼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전국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해 1893년이 되자 전국에서 한해에만 65건의 농민반란이 발생하는 등 조선사회는 사실상 통제력을 잃고 내부에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1893년의 민란은 임술민란 이후 30년 만에 다시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6] 리엔지니어링조선 p339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농성에 들어가자 4월 30일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즉시 5월2일 북양 함대 소속 군함 2척을 인천항에 파견하는 한편, 5월7일에는 정규군 2천명을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청나라는 천진 조약에 따라 5월 2일 일본에 대해 '조선 정부의 청원에 따라 비적 토벌을 위해 육군 일부를 조선에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일본정부는 외무상을 통해 '지리상 무역상 중요성에 비추어 조선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는 매우 긴요하므로 이와 같은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즉시 대응 출병을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5월12일 일본육군 제9여단 병력 9천여 명이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초기 투입부대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열강에 의해 사실상 분할점령된 청나라는 일본에 비해 군사력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개항 이후 외국과 벌인 모든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더 이상 서양열강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었다. 즉 청나라는 1884년 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것처럼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도 일본과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이미 군사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의 선발대는 아산만에 상륙해 농민군의 수도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반면, 일본군 9여단은 인천항에 상륙해 곧장 서울로 입성하였다. 이로 인해 5월초 이미 일본군은 숫자에서나 주둔 지역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반도에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한 것으로, 그 의의가 작지 않은 일이다.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첫 번째 조치는 1884년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즉 1894년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 9여단은 혁명군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은 청에 대해 공동으로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으나 청은 이를 거절하였다.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공사 오오토리가 이끄는 일본군 3천여 명은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과 민비를 감금하고 신속하게 서울의 4대문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궁궐호위병과 관군의 저항을 받아 대포와 총을 난사하면서 치열한 시가전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곧 고종의 항복 명령이 내려졌고 관군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민씨 정권의 주요 대신들은 모두 지방으로 도망갔고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장해제한 뒤 궁궐과 정부요인들의 집을 포위, 가택에 연금하였다.

이로써 조선에는 10년 전에 실패했던 혁명을 다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이미 민씨 정권에 의해 모두 죽거나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고, 혁명세력의 중심이었던 김옥균마저도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김옥균이 두 달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이 때 귀국하여 조선의 혁명내각을 이끌었을 것이므로 그의 죽음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일의 하나이다. 갑신정변 이후 해외로 망명한 박영효 서재필 등도 민씨 정권에 의해 3족이 몰살당하는 참화를 겪은 뒤였다.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박영효 만이 일본군에 의한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해 서서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개항 이후 20년 만에 본격적인 조선의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은 1894년 6월 25일, 개혁을 집행할 임시 최고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창설하였다. 이 기관은 일체의 국정을 관할하고 심의 결정하는 초정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혁명평의회와 같은 기구였다. 일본은 군국기무처의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기존 민씨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인사는 철저히 배제하고 김홍집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인사들을 포진시켰다.

김홍집은 과거 갑신정변 시절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김옥균 등 개화당과는 달리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하자고 주장했던 온건개혁파였다. 김홍집은 갑신정변 당시에는 미처 유교적인 국가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을 취했으나 이후 10년이 흐르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신사상을 습득하면서 보다 개혁적인 인물로 변해 있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에서는 개화당의 씨가 마른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김홍집을 내세워 혁명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경복궁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내건 대의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 개혁이었다. 조선은 개국 이래 단 한번도 자주독립국으로서 국제 사회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었으며,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천자에게 충성하는 명, 청의 일개 제후국일 뿐이었다. 조선은 해마다 중국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왕과 왕후, 세자를 책봉할 때마다 중국에 책봉사절단을 보내 관리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천자의 책봉첩을 받아오기도 했다.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도착하면 조선의 국왕 휘하 주요 대신들은 모두 영은문(寧殷門, 은혜를 맞이하는 문)까지 나와 엎드려 사신을 맞았다. 이처럼 명청조 시대 조선은 중국의 일개 성에 불과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은 사실상 천자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을 통상교역의 대상이자 군사적인 완충지대로 여기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을 독립시키고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였다. 당시 나라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뒤늦게 일본의 힘을 얻어 시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가 아닌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김홍집은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이 되었고, 박정양은 부총재관, 위원으로는 김종한, 안경수, 유길준 등 16명이 임명되었다. 일단 조직 구성이 완료되고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자 혁명 정부는 신속하게 조선의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권력체계를 궁내부와 의정부로 분할하였다. 이는 왕실과 정부가 정식으로 분리되어 궁내부에서는 왕실 관련 문제를 전담하고 모든 정치 행정 재정 등의 업무는 의정부에서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근대적인 내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뜻에서 모든 공문서에 청의 연호를 사용하던 관례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개국기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즉 조선이 창건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여 1894년은 개국 503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기존 6조가 폐지되고 8아문이 설치되었다. 8아문은 내무, 외무, 탁지, 군무, 법무, 학무, 공무, 농상무 등의 부서로 재편되어 각각 담당분야의 국가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영의정은 총리대신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각 부서의 수장을 부르는 호칭도 판서에서 대신으로 바뀌었다. 또한 좌우포도청을 통합하여 독립 경찰기구인 경무청을 신설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전제 왕조 사회의 틀을 벗고 서구식 내각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회분야에서는 낡은 신분계급제도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양반 중인 평민 노비 등 신분제도가 완전히 사라졌고 과부의 재혼이 허용되었으며,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일가친척을 모두 처벌하는 연좌제도 폐지되었다. 특히 신분제의 혁파는 조선 사회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양반에게만 허용되던 관직등용의 기회가 노비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에게 주어짐으로써 조선은 미개한 계급 사회의 틀을 벗고 만인평등의 시민사회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노비문서에 의해 사람을 사고팔던 노예제가 불법화되었으며 적자와 서자에 대한 재산상 신분상의 모든 차별이 금지되었다. 또한 양반들이 병역과 조세를 면제받는 특권도 사라지게 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모든 재정관련 업무가 탁지부로 일원화되었고 시급하던 화폐제도 개선이 이루어져 모든 조세는 금으로 받고 화폐는 은본위제를 시행함으로써 화폐가치를 통일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은본위제에 기반한 새로운 화폐를 제정 통용하기 시작하면서 과거 현물과 돈을 병용해서 납부하던 세금도 새로운 화폐로 징수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방 관료들의 세금 횡령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왕실재정과 정부재정을 분리하여 민비가 나랏돈을 물 쓰듯 하여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었던 것과 같은 일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무려 200건이 넘는 개혁안을 일사천리로 의결 공포하였는데, 이는 다소 급작스러운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개항 이후 조선의 근대화 작업이 20년간이나 미뤄졌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갑오개혁은 대체로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제기되었던 시대적 과제를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단지 토지제도에 있어 농민들이 요구하던 무상분배는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갑오개혁이 조선에 근대자본주의를 싹틔우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향후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지주 자본에 따른 기업농의 출현과 이에 따른 원시 자본의 축적 과정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을 당시 김홍집 내각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주 제도를 혁파하고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하는 조치는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채 자치정부를 운영하고 있던 전라도의 농민들은 갑오개혁 정부에 의해 농민전쟁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자 처음에는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점차 토지소유권에 욕심을 부리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헛소문으로 반일감정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해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부르주아 혁명에 반기를 들고 혁명 세력에 맞서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체제의 변혁을 위해 일어섰던 농민군이 이제는 공짜로 땅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강도떼로 돌변하여 모든 개혁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갑오개혁은 일본이 1868년에 실시했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그대로 이식한 근대화 혁명이었으며, 변형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변형되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 시민혁명을 이끌만한 어떠한 계급 계층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당시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을 원했던 유일한 외세인 일본의 개입과 일부 선각 지식인들의 협조로 시행되었다는 의미이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제 개혁은 그 본질상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독일의 강제 개혁과 같은 것으로서, 이웃나라에 시민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기 위한 정당한 무력행사였다.

이후 1894년 말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가 내각에 참여함으로서 김홍집-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성립하게 되었고, 1895년 고종은 홍범 14조를 선포하고 머리를 자르는 등 솔선수범하여 조선의 문명개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써 그동안 군국기무처에서 담당하던 개혁 작업이 내각으로 이전되어 조선은 안팎으로 근대국가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와 내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거제도를 갖춘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국가로 변모해 신속하게 국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웃나라인 조선에 혁명을 전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것은 값진 희생이었으며, 갑오년에 일본군에 맞서 저항했던 동학 세력도 10년 후 결국 진보회와 일진회를 통해 일본의 개혁에 협력하는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든든한 동맹군이 되었다.

[3]-2 환경 파괴와 경제 위기

[3]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  [3]-2 환경 파괴와 경제 위기


구한말 서울 근교.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구한말 서울 근교.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과연 조선왕조의 문화는 우수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조선왕조 시대에 이룩된 문명의 성과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현대문명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가족, 촌락, 단체, 관료제, 시장, 사유재산 등의 여러 문명의 요소에서 조선왕조는 세계적으로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었지요. 저는 그런 생각으로 지난 세월에 적잖은 논문을 써왔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한 것으로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2004)라는 논문이 있으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명의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국가라는 형태로 통합했던 또 다른 차원의 문명 수준에서 조선왕조는 오늘날의 근대국가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큰 단절이 있지요. 그렇게 연속은 연속대로, 단절은 단절대로 종합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한쪽만 보는 것은 부당합니다. 양편을 골고루 공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 차분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몇 백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사건입니다. 정치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그래야, 한 나라가 망하는 법이지요. 여기서 그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그럴 장소도 아닙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추상 수준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두 가지만 지적한 다음, 그것에 내포된 역사적 의미를 성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 전공과 관련하여 지난 몇 년간 경제사 연구자들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부터 소개하겠습니다. 18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의 환경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산이 헐벗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인구가 늘어나 식량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나무를 베어내고 산지를 개간하였습니다. 또 온돌 난방에 필요한 연료인 장작의 수요도 증가하여 나무를 베었지요. 그렇게 산림이 점점 황폐해져 19세기 말이 되면 북부 고원지대와 강원도의 깊은 산속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가 발갛게 헐벗고 말았습니다. 19세기가 되면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거의 사라집니다. 그것도 산림이 황폐해져서 그랬지요. 산림이 황폐하자 조금의 비에도 홍수가 생겨 토사가 논밭으로 흘려내렸습니다. 그 결과 농업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도합 열셋 정도의 사례가 발굴되었는데요, 18세기 중엽에 비해 19세기 말이면 거의 1/3 수준으로 토지생산성이 감소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농업생산이 감소하자 분배를 둘러싸고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였습니다. 특히 조선왕조의 각종 조세가 감면되지 않아 농가의 큰 부담이었습니다. 1840년대부터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민란의 물결은 1860년대부터 더욱 거세게 일어 1894년 동학농민봉기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해졌지요. 저는 동학농민봉기의 1894년을 전후하여 조선왕조는 사실상 해체되고만 형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거세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초부터 그러한 방향의 변화가 진행되어 왔던 것이지요. 이 같은 19세기의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혼란은 조선왕조의 일만도 아니었습니다. 19세기의 중국도 그러하였습니다. 화북지방의 중국에서도 산림의 황폐에 따라 운하와 수로가 막히고 그에 따라 시장이 축소되고 생산이 감소하여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였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이렇게 어느 문명이 어느 발전단계에서 자연자원의 고갈로 쇠퇴의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도 크게 보면 이 같은 인류사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서글프지만 대범하게 그 점을 전제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3]-3 성리학의 정치원리

[3]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  [3]-3 성리학의 정치원리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문명개화파의 선구자

그런데 어느 문명이 해체되는 것은, 아주 예외적으로 홀로 고사(枯死)하는 예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미 쇠약해진 단계에서 다른 강대한 문명의 충격을 받아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20세기의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문명과 문명의 접촉과정을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강대한 문명으로부터 도전이 주어졌을 때 성공적으로 응전한 문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문명은 소멸합니다. 성공적인 응전에는 창조적 소수의 지도적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전의 성격을 이해하고 올바른 대응을 강구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지성이지요. 그리고 대중이 창조적 소수의 지도를 신뢰하고 따라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좋은 순환의 신뢰관계가 성립해 있는 문명은 응전에 성공하여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창조적 소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또한 대중이 그에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 문명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메이지유신의 일본이 전자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왕조는 후자에 속하지요. 김옥균을 위시한 이른바 개화파라는 창조적 소수가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의 세력은 너무나 미약하였고 또 대중이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제국주의의 침입에 성공적으로 응전하지 못한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체제의 혼한이 있어 온 데다 인간, 사회, 국가, 세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질서 감각이 낡은 문명의 원리에 너무 깊숙이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조선의 전통문명은 견고한 자기완결성을 특징으로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을 살펴봅시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정치원리에 기초하여 백성을 통치하였습니다. 거기서 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누렸습니다. 하늘은 무엇입니까. 삼라만상을 만들어 낸 지극한 이치로서 앞서 잠시 언급한 태극이지요. 태극의 지극한 이치는 인간사회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덕을 의미하였습니다. 왕은 하늘을 대신해서 이 도덕을 대변하고 수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백성이 그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자식이 그 부모에 효도를 다하고 아내가 그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면, 하늘도 부응하여 세상만사가 평화롭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 성리학의 정치원리였습니다. 이 성리학의 정치에서 백성은 왕의 발가벗은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왕은 어린 백성을 자애롭게 보살펴야 했고, 백성은 부모를 섬기듯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지요. 이렇게 가족제적 혈연 원리에 기초한 정치에서 백성은 정치적으로 무권리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 나라[國]라 하면 어디까지나 왕과 양반관료들의 나라로서 곧 조정(朝廷)을 의미하였지요. 오늘날과 같은 민권사상이나 대의제적 정치에 입각한 국가관은 조선왕조와 무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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