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4]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p198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몰락한 선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마치고 동몽선습을 익혔다고 한다. 7살에는 효경, 8살에는 소학을 완성해 마을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데다 글 읽기를 좋아해 밤을 새워 고전을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곧 우봉 이씨 가문에서 영특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런 덕에 이완용은 10살 되던 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어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으로 발탁되었다. 이호준은 당시 우봉 이씨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서 고종과 민비 등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완용을 양자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려 한 것이다. 이호준의 후광과 타고난 재주를 바탕으로 이완용은 한말 난세에도 별다른 불행 없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기념해 실시된 특별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시강원 사서 등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했다. 1886년에는 정부에서 설립한 신식 귀족학교인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익혔다. 1886년은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한 역사적인 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학교인 이화학당을 비롯해 배재학당, 육영공원 등 3개의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등 민간인들이 설립해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처음부터 고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 아래 정부에서 설립 운영했던 교육기관으로서, 미국에서 초빙한 정식 교사와 학교시설을 갖추고 출발하는 등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했는데, 좌원은 현직관리, 우원은 고관들의 자제나 친척 가운데 선발된 영재들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제 1기 학생은 좌원 14명 우원 21명 등 모두 35명이었으며 강의는 미국에서 초빙된 교사 3명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즉 이완용은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교육을 받고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된 관리였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익힌 덕에 이완용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을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미국 현지에 교민도 없고 미국과 교역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외교관들은 아무 할 일도 없이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씻지 않아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말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상한 복장을 고집하던 당시 조선 외교관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미국의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은 이들이 왜 미국 땅에 머무르면서 비싼 국고를 탕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혁명가 서재필과 서광범 등 2명의 조선인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인물들이어서 공사관측과는 아무런 접촉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1890년 미국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형조,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1895년에는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의 경복궁 탈출을 도운 공으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고, 이후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되었으나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1905년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905년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하여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이완용에게 통고하게 된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 이재명으로부터 습격당해 허파를 칼에 찔리고 온몸이 난자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천황에 의해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후작의 반열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 동양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27년 69세에 이르러 이재명으로부터 얻은 상처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였다.

당시 이완용의 왼쪽 허파는 습격 때 입은 자상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오른쪽 허파마저 폐렴으로 인해 기능을 하지 못하자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이완용 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인격은 뭇 사람들로부터 흠모할 바가 많았으니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라고 추모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래 최대의 추모인파가 몰린 행사였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항상 이름 앞에 '매국노'라는 호칭을 붙여 대개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거짓말들이 국사학자들에 의해 당당히 언급되는가 하면, 그의 묘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의 일생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면 그가 이처럼 큰 모욕과 비난을 받을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동양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 천황은 몸소 그의 글씨를 청하고 답례를 했다고 한다.(윤덕한, 이완용 평전) 또한 이완용은 고매한 학식과 인품으로 조선과 일본의 정치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 통치에 협력한 것은 무능한 조선 왕실이 끝내 거부한 문명개화의 과제를 일본의 힘을 빌어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들을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관직에 입문한 이후 이완용은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정동파는 주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 조선 정치가 등으로 구성된 클럽으로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조선 정치에는 그리 큰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그룹이었다. 이완용은 1896년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독립협회의 이완용 대신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 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이다. 독립협회는 고종 환궁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는 정부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문부대신과 외부대신이 이완용에서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완용이 신념과 용기를 갖춘 애국자임은 서재필이 독립신문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였다.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는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하였다. 정부에서 이같이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리완용 씨는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필경 일은 그의 뜻대로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1897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무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3국 간섭에 굴복한 일본은 조선에서 힘을 잃었고 대신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는 외국 공사는 바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지칭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관리가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실제로 생명을 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러시아만이 조선 영토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었고 다만 여러 가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열강이 조선에서 차지하고자 했던 이권은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 크게 세 가지였다. 고종은 이 같은 여러 이권들을 서양에 넘겨주면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종이 군주라 할지라도 담당 대신(지금의 장관)의 결재 없이는 이권을 쉽게 넘겨줄 수 없었으니, 학부대신이자 외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20년 동안 압록강 및 두만강과 울릉도의 삼림을 베어갈 수 있는 권리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이었던 이 사업은 러시아에게 넘어갔지만, 제국주의 강대국의 부당한 압력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던 일은 이완용의 강직한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처럼 아관파천 기간과 고종이 환궁한 이후에 줄곧 러시아에 맞서 국익을 수호하던 이완용은 1897년 말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1898년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잠시 서울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중앙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수도 서울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다. 그 뒤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으로 임무를 수행함으로서 독립협회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고쳐 부름으로써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는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조선의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이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폭발하였다.

러시아의 영도 점유는 침략의 첫 단계라고 판단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영도조차(租借, 빌려줌)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국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이완용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그 성과로 1898년 11월 2일에 이르러 대한제국에는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하는 중추원신관제가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수구파들은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던 것이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이후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인물로서, 후세에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매국노라고 부르기는 힘든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1898년과 1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투쟁은 결국 고종과 수구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추진했던 혁명세력은 모두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북관찰사로 일하던 이완용도 입헌군주제 투쟁이 실패로 끝난 뒤 황국협회 및 황성신문 등 수구파들의 모략을 받아 결국 관찰사에서 면직 당하게 된다. 이후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완용은 고종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직을 고사한 채 고향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다시 조선의 개혁이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왕실의 일을 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 직을 받아들여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과 독립협회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혁명 세력은 일진회를 결성하여 수구파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문명개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혁명세력의 노선은 궁극적으로 일본과 합병함으로써 신속하게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이 같은 새로운 정세에 따라 기존의 자주독립 노선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합병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이완용은 이후 을사보호조약, 고종의 양위, 한일합병 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재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수구파들의 첫 번째 테러대상이 되었다. 이는 이완용이 당시 조선 정계에서 고종과 일본, 일진회 등 3대 세력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중심 역할은 이완용의 고매한 인품과 정치역량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는 선선히 자신의 소임을 받아들여 행동에 옮겼다.

당시 조선 반도의 통치자를 낡은 이씨 왕조에서 일본으로 교체하는 역사적인 작업은 악역을 자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조를 유지하고 전통관습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완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통감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서 이 땅에는 비로소 문명개화를 위한 작업들이 속속 추진되기 시작되었다. 개항이래 개화당의 선구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의 유신이 일본과의 합작을 이룬 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삼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었으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일본 정규군의 투입이 목전에 다가오자 이완용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을 중지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완용은 마지막으로 발표한 3차 경고문에서 조선 민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하는 것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다. 오늘날과 같이 국제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요. 병합 이해 근 십년 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 문제 등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급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완용은 당시 세계 정세로 보아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보다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실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이완용은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이완용의 호소로 인해 1919년 3.1운동은 6월초 군대에 의한 유혈진압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이완용의 사상은 이후 이광수 최남선 등 젊은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이완용은 새로이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설득하여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멸시와 차별을 없애도록 하고 각 도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문화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문예부흥이 시작되어 수많은 시인, 작가, 예술인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1927년 고종의 국장 이래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이완용의 장례식에서는 위대한 개화혁명가 박영효가 장례부위원장을 맡아 생전에 이룩한 업적과 활동을 추모하는 조사를 낭독했으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추모객이 참석해 위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운구 행렬은 서울의 옥이동에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10리에 걸쳐 이어졌으며, 장지인 전북 익산군에 운구가 도착한 뒤에는 현지의 추모객들에 의해 10리가 넘는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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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