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 [이영훈 서울대교수]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이영훈
이영훈 서울대교수-----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은.
“1910년 이후는 근대적 통계 자료가 있으나 그 이전은 직접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마지기 당 소작료 자료, 쌀값 상승을 보여주는 간접적 자료 등을 통해 대체적 윤곽을 그릴 수는 있다. 큰 추세로는 18세기를 거치며 1인당 소득이 서서히 떨어지다가 19세기 후반 급격히 감소했다. 1750년을 정점으로 농촌의 장시(場市) 숫자, 인구, 쌀 생산성 등이 일제히 떨어졌고,쌀값이 오르고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등 경제침체의 강한 추세를 발견할 수있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의 경제적 변화는.
“침체 일로의 조선 경제가 1900년을 전후해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 근대적 시장제도의 정착, 소유권 제도의 정비, 근대적 기업제도와 상법, 거래 안전성을 보장하는 신탁, 통신, 운수의 발달 등이 뚜렷하다. 식민지 시대를 걸쳐 총 80억 달러의 자본이 유입됐고, 일본인들의 농장과 공장이 생기면서 한반도 지역 단위의 GDP가 상승하고 1인당 GDP와 생활물자 소비량 등이 크게 늘었다. 1920ㆍ30년대 GDP는 연 평균 4% 정도 상승했다.”

-----식민지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나.
“그렇다. 무엇보다 인구가 늘었다. 19세기 내내 인구가 감소하다가 20세기 들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인구는 위생이나 전염병 등과도 관련이 있어직접적 경제 자료는 아니나 당시의 경제상황을 추정하게 하는 자료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 인구는 그 이전의 1,700만명에서 3,000만명(해외 이주300만명 제외)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경제력이 성장한 것이다.”
원문 : [한국일보 2004.04.22] 일제, 조선 근대화에 주력

“조선 왕조는 19세기에 이미 사실상 해체됐어요.” [이영훈 서울대 교수]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이영훈

구한말 서울 근교.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구한말 서울 근교.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국사학계에선 조선 왕조가 망한 것은 ‘강포한 도적’(일본) 때문이지 ‘선량한 주인’의 잘못은 아니라고 합니다.
“조선 왕조는 19세기에 이미 사실상 해체됐어요. 인구 증가로 화전민이 늘면서 산림이 황폐해집니다.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논밭으로 흘러 들어가 농업생산이 줄었어요. 18세기 중엽에 비해 19세기 말이면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쌀값이 폭등하고,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져요. 왕조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구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수탈하고, 식량을 강제로 뺏어간 것은 사실 아닙니까?
“1982년 김해군청에서 토지조사사업 당시 작성된 문서가 대량 발견됐어요. 이 자료를 활용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총독부는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을 다루면서 공정했어요. 전국 484만 정보의 국유지 가운데 12만7000정보만 국유지로 남았는데, 그것도 대부분 조선인 농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했습니다. 식량도 시장에서 사들인 것이지 그냥 강탈해간 것이 아닙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그런데도 왜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전 국토의 대부분을 강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까?
“우리 학계에는 엄격한 심판관이 없어요. 선진 사회에선 학계를 지배하는 엄격한 심판자 그룹이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해 판정을 내립니다. 후진 사회는 이런 심판자 그룹이 없기 때문에 뭐가 옳고 그른지를 대중은 물론 연구자도 알 수 없어요.”

―――일제시대를 다룬 소설 ‘아리랑’을 분노와 광기로 가득한 작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35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를 지나치게 깎아내린 것 아닌가요?
토지와 식량 수탈, 학살 등 이 작품이 그리는 내용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학생들이 곳곳에 메모를 남겼더군요. 일본인 순사가 토지조사사업을 방해했다며 농민을 즉결 처분하는 대목에서 ‘아, 이럴 수가’ 하고 분노하는 거예요. 상업화된 민족주의가 판치면서 피해의식만 커지는 거지요. 노년보다 젊은 세대가 반일감정이 더 강한 이유는 상업화된 민족주의와 잘못된 근현대사 교과서에 따른 공(公)교육 때문입니다.”
출전 :“정치 지도자의 잘못된 역사관이 나라 망치고있다”

명성황후는 명례궁 수입의 88%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출은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이었다. 식료비는 354만 량 이며 총지출의 79%에 달하였다.

1855년부터 조선왕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農業生産(농업생산)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物價(물가)가 지속적으로 치솟고, 市場(시장)이 분열하였다(李榮薰 2007). 이 위기의 기간에 명례궁의 수입은 <표1>에서 보듯이 1853-1854년 32,954량에서 1892-1893년 2,916,290량으로 무려 88배나 팽창하였다. 동기간 물가도 급하게 치솟았다. 예컨대 米(쌀) 1석의 가격은 6량에서 138량으로 23배나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동기간 3.8배 증가하였다.

위기의 시대를 반영하여 宮房田(궁방전)으로부터의 실질 수입은 감소하였다. 액면으로는 8,742량에서 184,824량으로 21배 증가하였지만, 물가가 23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상도 액면으로 8.5배 증가하였지만 물가의 상승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위기의 시대에 정부재정의 형편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다.(*5) 그런 가운데 명례궁의 실질 수입을 3.8배나 끌어올린 것은 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였다. 내하가 1892-1893년에 연평균 257만 량을 초과한 가운데 총수입의 88.2%를 차지하였다.

명례궁에 대한 왕실의 내하는 이전에도 있긴 했지만 비정기적이었다. 대개 銀(은)으로 내려졌는데, 때때로 다른 현물일 수도 있었다. 받자책에 의하면 錢(전)의 형태로 내하가 매년 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1882년부터이다. 이후 1894년까지 內下(내하)의 추이를 제시하면 [그림2]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내하는 1882년 38,100량에 불과하였는데 1887-1888년에 연간 50만 량을 넘었으며, 1891년 이후 급증하여 1894년에는 270만 량 이상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림2] 明禮宮(명례궁)으로의 內下(내하)의 추이: 1882-1894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2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1, 21, 20, 19, 18, 17, 16, 7, 43, 42, 6, 5, 4)

이 내하금이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그 해부터 錢(전) 형태의 내하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오전의 발행은 閔妃(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閔氏(민씨) 政權(정권)의 유력한 재정수단이자 민씨 일족의 致富(치부) 方策이었다. 당오전의 발행은 물가를 급하게 끌어올리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당오전은 1885년부터 한동안 발행이 자제되다가 1889년부터 1894년 폐지되기까지 품목에 못 미치는 惡貨(악화)의 형태로 대량 발행되었다(吳斗煥 1991: 61-81). 그러한 당오전의 역사와 [그림2]의 추이는 연도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일치하고 있다. 이 역시 내하의 수단이 다름 아닌 당오전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민비(명성황후)는 1892-1893년 명례궁 수입의 88.2%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간 명례궁의 지출은 <표2>에서 보듯이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에 달하였다. 이 시기 명례궁 재정은 거대한 적자 구조였다. 동시기 명례궁의 會計冊(회계책)은 이 적자가 ‘加用(가용)’, 곧 借入(차입)으로 매워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3]은 1855-1892년의 회계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米와 錢(전)의 연말 시재의 추이이다.

[그림3] 명례궁의 年末 時在의 추이: 1853-1892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3

자료 : 『明禮宮會計冊 (명례궁회계책)』
(奎章閣圖書 19004-12, 42, 13, 53, 14, 28, 15, 54, 19077-2)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863년 高宗(고종)의 시대가 열리면서 차입 구조로 들어섰다. 1873년에는 일시 차입 구조를 벗어났다가 1883년까지 조금씩 累積借入(누적차입)을 늘려갔다. 그러다가 그림에서 보듯이 1884년 이후 가파르게 누적 차입이 증대하기 시작하여 1892년에는 66만 량의 거액에 달하였다. 동기간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 일족의 집권은 확고하였다. 借入先(차입선)이 어딘지, 정부재정인지 市中(시중)의 商人(상인)인지는 회계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정부재정이 매우 困乏(곤핍)했음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명례궁은 1884년 이후 급속하게 지출규모를 팽창시키면서 당오전의 내하로 그 상당 부분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래도 부족한 수입을 시중 상인들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6)

그 위기의 시대에 민비(명성황후)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나 過濫(과람)하게 명례궁의 재정을 확장하였던가. <표2>에 보듯이 1893년 명례궁은 354만 량 이상의 食料費(식료비)를 지출하였다. 총지출에서 식료비의 비중이 79.6%에 달하였다. 식료비가 그렇게 크게 늘어난 것은 무척 잦아진 告祀(고사)ㆍ茶禮(차례)와 宴會(연회) 때문이었다. 차하책에 의하면 1893년 한 해에 모두 29회의 고사와 다례가 행해졌다. 민비(명성황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중에 神堂(신당)을 짓고 巫堂(무당)과 중을 불러들여 고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모두 성리학의 나라가 오랫동안 祖宗之法(조종지법)으로 금지해 온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893년 한 해에 도합 37회의 연회를 베풀었다. 왕의 誕日(탄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궁중의 後苑(후원)에서 임시로 내외의 賓客(빈객)을 맞아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해 베푼 연회들이었다. 1894년 2월의 받자책의 한 구절은 220만 량의 거액을 내하하면서 ‘誕日熟設條(탄일숙설조)’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풍족하게 열 용도라는 뜻이다. 연회가 끝나면 빈객들을 대상으로 한 ‘賜饌(사찬)’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수입한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褓(보)에 싸서 지게꾼에 지워 빈객들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소주방, 생물방, 생과방에 소속된 熟手(숙수)들에게 工錢(공전)이 풍성하게 베풀어졌다. <표2>에서 보듯이 식료비만이 아니라 공업비와 임료가 크게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893년의 차하책에서 고사ㆍ다례와 연회에 관련된 식재료, 공업비, 임료를 모두 합하니 당년의 총지출 444만 량의 절반을 넘는 247만 량이나 되었다.

민비(명성황후) 이전의 宮主(궁주)들이 이렇게 풍성한 연회를 베푼 적은 없었다. 大院君(대원군)의 통치와 개항 이후 몇 차례의 政變(정변)을 겪는 과정에서 왕실의 살림살이를 유교적 公의 명분으로 규제하던 정치세력들이 모두 소거되고 말았다. 그 나머지 왕실은 1884년 이후 千年王國(천년왕국)의 宴樂(연락)을 누렸다. 지극히 공적으로 취급되어 온 銅錢(동전)을 남발하여 연회로 낭비하는 일은 18세기의 근엄했던 朝廷(조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7) 그 좋았던 시절이 1894년의 淸日戰爭(청일전쟁)으로 끝이 났다. 왕실을 비호하던 淸帝國(청제국)이 조선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지원으로 성립한 內閣(내각)은 왕실을 立憲君主制(립헌군주제)의 굴레로 묶으려는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시련의 계절이 왕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2.구래의 궁방재정 (2)1855-1894년

명례궁 재정은 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절정기였다. 명성황후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식료비가 77% 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1895년의 甲午更張(갑오경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우선 無土(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갑오경장은 宮房田(궁방전)과 衙門屯土(아문둔토)에 부여해 온 免稅(면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甲午陞總/갑오승총). 그에 따라 民有地(민유지)로서 해당 結稅(결세)를 궁방에 상납하던 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또한 무토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有土(유토)의 일부도 함께 폐지되었다. 유토 가운데는 무토와의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있었다. 사실상의 민유지로서 아주 낮은 수준의 賭地(도지)를 궁방에 바쳐 온 유토였다. 이런 부류의 유토를 갑오경장 당시에 第2種有土(제2종유토)라 하였다(李榮薰 1988: 135-6). 실은 갑오경장 이전에 이미 12처의 제2종유토가 명례궁의 수취 대상에서 이탈하였다. 18세기말 이래의 일이었다. 그 같은 추세의 연장에서 갑오경장으로 무토가 폐지되자 13처의 제2종유토가 더불어 폐지되었다. 전술하였듯이 18세기말 명례궁의 유토는 전국적으로 41처에 분포하였다. 그러했던 유토가 갑오경장 이후는 22처에 불과하게 되었다.(*8) 궁방전의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감소하였다.

갑오경장이 명례궁 재정에 가한 가장 심각한 타격은 當五錢(당오전)의 폐지였다. 그에 따라 1892 -1893년 총수입의 88.2%나 차지했던 王室(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895년에는 궁주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乙未事變/을미사변). 명례궁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였다.

갑오경장으로 성립한 내각은 日本貨幣(일본화폐)와 동일 稱量(칭량)의 新式貨幣(신식화폐)를 발행하였다. 신식화폐 1元은 舊 常平通寶(구 상평통보) 5兩(양)에 해당하였다. 명례궁의 차하책은 1895년 정월부터 지출 수단을 구 상평통보에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제반 물가가 일률적으로 1/5로 切下(절하)되었다. 그런데 화폐의 단위만큼은 이후에도 여전히 구래의 兩(양)을 고집하고 있었다. 명례궁의 받자책은 1895년 8월까지 구 상평통보로 수입을 기재하다가 이후 신식화폐로 바꾸었다. 여기서도 화폐의 단위는 여전히 구래의 兩(양)으로 표기되었다.

[그림4] 1894-1904년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의 추이이다. 1894년의 수입과 지출은 구 화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1/5로 절하하였다. 동기간 화폐의 단위는 받자책과 차하책에서 여전히 兩(양)이었지만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元으로 표기하였다.

[그림4]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4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3-4, 41, 40, 39, 38, 37, 36, 35, 34, 33, 32)
(奎章閣圖書 19001-68, 73, 67, 57, 6, 64, 16, 61, 63, 9, 74)

명례궁의 수입은 갑오경장의 충격을 받아 1894년 69만여 元에서 1896년까지 10만여 원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1897년 大韓帝國(대한제국)의 성립을 맞아 1899년까지 48만여 원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수준에서 1902년까지 정체하였다. 연후 1903-1904년에 148만여 원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 같은 각 연도의 수입에 있어서 80% 또는 90% 이상은 內下(내하)였다. 1903년에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은 내하가 전년의 33만여 원에서 127만여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받자책은 그 중의 100만 원에 대해 ‘未下條(미하조)’라고 용도를 밝혔다. 즉 각종 재화를 구입하고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들을 상환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림에서 보듯이 1894년 이후 지출은 언제나 수입을 초과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변함없이 借入(차입)에 의해 꾸려졌다. 그것을 상환하기 위해 1903, 1904년에 대량의 내하가 이루어져 흑자재정으로 돌아섰지만, 누적되어 온 차입이 얼마나 상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1903년의 흑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1904년에는 지출이 증가하여 거의 收支(수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표3>명례궁의 수입 내역과 지출 용도: 1903-1904  (단위: 元)

황실재정_표3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33, 32),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1-9)

1903-1904년의 수지 상황을 보다 자세히 제시하면 <표3>과 같다. 兩(양)年의 평균 수입 151만여 원은 거의 대부분 내하로 이루어졌다. 내하의 비중이 무려 96.3%나 되었다. 2.0%의 供上은 宮內府(궁내부)로부터의 지급을 말하는데, 갑오승총으로 폐지된 무토의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1897년부터 행해진 지급과 역대 국왕의 肖像(초상)을 모신 眞殿(진전)에서의 享需(향수)를 충당하기 위한 지급 등을 말한다. 宮房田(궁방전)은 전술한대로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를 잃어 그 비중이 1.6%에 불과하였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食料費(식료비)가 77.7%의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 점에서 1893년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 원인을 살피면 景孝殿(경효전)에서 행해진 78회의 上食(상식)과 茶禮(차례)가 가장 중요하였다. 경효전은 1895년에 시해된 閔妃(민비/명성황후)의 魂殿(혼전)이다. 민비(명성황후)는 1893년에는 살아 있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그 외에 1903년 한 해에 황제에게 進御床(진어상)이 28회나 바쳐졌다. 그 중의 9회에는 賜饌床(사찬상)까지 베풀어졌다. 1902년 나이 50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 노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황제는 尊體(존체)를 보전하기 위해 수시로 그의 내탕으로 하여금 珍羞盛饌(진수성찬)의 床(상)을 올리게 하였다. 게다가 1903년은 그의 즉위 40주년이었다. 정부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으며, 명례궁도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식재료에 이어 인건비가 16.6%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명례궁에 속한 궁속들이 110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5] 명례궁의 실질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5

자료: [그림4]와 동일.

주지하듯이 대한제국기에 典圜局(전환국)이 다량의 백동화를 발행하여 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차하책이 전하는 각종 재화의 가격은 1894-1904년에 평균 3.4배나 상승하였다. 동기간의 연도별 物價指數(물가지수)를 작성하여(*9) 각 연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을 제시하면 [그림5]와 같다. 여기서 보듯이 1904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명례궁 재정은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絶頂期(절정기)였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으로 명례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도 왕실의 내하가 이루어졌고 그 금액이 1903 -1904년에는 145만여 원의 거액에 달했지만 재정의 실질규모는 절정기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그 사이 公的規範(공적규범)에서 이탈한 황실의 살림살이가 虛禮(허례)와 浪費(낭비)의 극을 달렸다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當五錢(당오전)에 이어 그 허례와 낭비를 지탱한 내하의 출처는 어디였던가.
출처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3.갑오경장의 충격과 회복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