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五十餘(오십여)處女(처녀)를 誘引(유인). 수양녀를 한다고 백지위임장을 받아서 범죄감행. [동아일보 1939년 3월 28일 제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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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_1939년3월28일五十餘(오십여)處女(처녀)를 誘引(유인) 北支(북시),滿洲(만주)에 大部隊(대부대)를 賣喫(매끽)
 收養女(수양녀)를 한다고 白紙委任狀(백지위임장)을 받아서 犯罪敢行(범죄감행)
  第二(제이) 河允明(하윤명) 事件(사건) 擴大(확대)

얼마 전 부내 서대문서에서 유괴마부부 하윤명(河允明)사건 이상의 히유 대규모의 유괴마단(誘拐魔團)일당 5명을 일망타진하여다가 엄조를 게속중이라함은 누보한바와 같거니와 그후 동서의 게속 취조의 결과 정작 일당의 두목 천순동(千順童)(35)과 천억만(千億萬)(24)의 형제가 이미 검거선을 탈출하엿다는 의외의 사실이 탈로되어 26일 동서 김(金) 민(閔) 석부(石部)형사등은 천가형제(千家兄弟)가 탈주 잠복하엿다는 인천(仁川)모여관을 습격하여 무난히 체포하여 엄중 취조한 결과 다음과 같은 신인공노의 무진죄상(無盡罪狀)이 속속 판명되어 취조 경관을 경악케 하엿다 한다.
즉 천순동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의 사촌 아우 천억만외 원척의 친척형제들을 경향각지로 보내어 가난에 울고 혹은 허영에 날뛰는 시골처녀들의 부형을 찾어다니며 수양녀(收養女)로 다려다가 호의호식에 공부까지 시켯다가 후일 혼령(婚齡)에 달하면 서울부호의 메누리를 시켜주겟다는둥 혹은 조흔 곳에 취직을 시켜주겟다는등 별별 감언리설로 그럴법하게 꼬이는 동시에 수양녀로 한다는 백지위임장(白紙委任狀)과 또한 호적초본(戶籍抄本)인감증명등을 맡어 가지고 와서는 녀급 혹은 기생작부(酌婦)등에 매긱하고 아즉 년영이 어린 소녀는 하녀(下女)로 학대하다가 크면은 역시 매소부(賣笑婦)로 인육시장(人肉市場)에 넘기엇다는데 이상과 같은 교묘한 수단의 형제의 독수(毒手)에 히생된 소녀 혹은 유부녀는 현재 동서에 구출(救出)하엿다는 배금순(裴錦順)(19) 이옥희(李玉姬)(16)등 15명의 처녀외에 이미 북지(北支)와 만주(滿洲) 혹은 경성시내에 매소부로 넘긴부녀자는 지금까지 판명된 수만 35명으로 앞으로도 얼마나 판명될지 모르겟다 한다.

團長(단장)은 千家兄弟(천가형제) 西署(서서)에서 殘黨掃蕩(잔당소탕)
별항과 같은 일당의 두목 천순동은 전기와 같이 그의 친척형제외에 다수부하를 유괴편의대(誘拐便衣隊)처럼 경항각지에 파견하야 천순동이 아측 체포된지도 모르고 처녀유괴에 활약하고잇는 잔당이 적어도 10여명에 달할 것이므로 불원동서 형사대는 천순동의 자백을 조차 경향각지에 흐터진 유괴편의대의 대대적 소탕전(掃蕩戰)을 전개하야 포로(捕虜)할 것이라한다.

救出(구출)된 處女(처녀) ▲李玉順 이옥순(17) ▲張錦花 장금화(18) ▲孫福童 손복동(16) ▲卞順吉 변순길(15) ▲郭順姬 곽순희(17) ▲全玉姬 전옥희(16) ▲南順童 남순동(20) ▲方順姬 방순희(16) (사진은 유혹당한,여자의 일부 범인집에서 나온것)

處女誘引(처녀유인)의 副産(부산) 金密輸(금밀수)까지 綻露(탄로)
그리고 이번 유괴사건 적발의 부산물로 동서에서 체포취조중이던 아현정(阿峴町)250의 46박옥동(朴玉童)은 금밀수범(金密輸犯)으로 판명되어 별항과 같은 대규모의 유괴마단 사건과 아울너 금밀수사건도 취조키로 되엇다하며 지금까지 판명된 밀수금액은 500여원어치의 금괴(金塊)에 불과하나 취조여하에 의하야는 의외의 방면에 발전할는지도 모르겟다한다.
출처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동아일보 1939년 3월 28일 석간 제2면

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 [동아일보 1939년 3월 29일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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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_1939년3월29일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
 一(일)
殘忍無道(잔인무도)한 저 白白敎徒(백백교도)의 罪相(죄상)이 아직 法(법)의 裁斷(재단)을 받기도 前(전)에 各種類似(각종유사) 宗敎事件(종교사건)이 疊出(첩출)하는가 하면 一方(일방)에는 處女誘引(처녀유인) 賣喫事件(매끽사건)이 不絶(부절)하고 잇으니 日昨(일작) 東大門署(동대문서)에서 摘發(적발)한 所謂(소위) 河允明事件(하윤명사건)과 西大門署(서대문서)에서 檢擧中(검거중)인 裵長彦事件等(배장언 사건등)은 그의 가장 顯著(현저)한 事例(사례)라 하겟다.

이들은 그 所行規模(소행규모)가 자못 크고 內容(내용)이 極(극)히 惡質(악질)의 것이나 其他群小事例(기타군소사례)는 一一(일일)히 指摘(지적)하기에 어려우리만치 數多(수다)하게 潛行(잠행)되고 잇어 진실로 우리 社會(사회)의 文化水準(문화수준)을 疑心(의심)하게하고 구태여 이런 것을 問題(문제)로 삼는 것부터가 벌서 自身(자신)의 苛責(가책)이크다.

 二(이)
그러면 어째서 이같은 非人道(비인도),非合法(비합법)의 人間惡(인간악),社會惡(사회악)이 演出(연출)되고 잇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첫재로 그 當事者(당사자)들의 罪過(죄과)를 들지 안흘 수 없을 것이다. 먼저 黃金(황금)의 威力(위력)에 手段(수단)을 가리지 못하고 가진 詐行(사행)을 敢行(감행)하는 人肉商(인육상)들의 罪惡(죄악)은 唾罵(타매)하고 膺懲(응징)하여도 오히려 不足(부족)한바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 對策(대책)을 말한다면 그 誘引魔(유인마)들로 하여금 改悛(개전)케하고 退治(퇴치)하야 再現(재현)을 防止(방지)하는 것이 第一義(제일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絶對(절대)로 根本的(근본적)退治策(퇴치책)은 되지못한다. 그 理由(이유)는 한 사람의 誘引魔(유인마)와 한 黨(당)의 誘拐團(유괴단)을 抑壓(억압)햇다고 해서 그 類似分子(유사분자)가 醱酵(발효)할 만한 社會的溫床(사회적온상)이 備置(비치)되어 잇고 그 陷井(함정)에 射落(사락)되지 안흘 수 없는 濟經條件(제경조건)이 잇다면|아니 이 地上(지상)에 無知(무지)와 悲慘(비참)이 存在(존재)하는 동안에 잇어서는 이와 類似(유사)한 性質(성질)의 事件(사건)이 恒常繼續(항상계속)될 것이며 오직 다만 場所(장소)와 사람을 바꾸어서 나타나고 잇을는지도 모른다.

 三(삼)
그러니 먼저 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를 沮止(저지)한다는 것은 重言(중언)할 餘地(여지)가없고,現在司直(현재사직)이 이 點(점)에 留意(유의)하는바 없지 안치마는 앞으로도 一段注力(일단주력)하여야 할 것이다。그러되 우리가 日常(일상)에 잇어서 遺憾(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늘 朝鮮(조선)의 警察行政(경찰행정)이 한便(편)으로 기우치지 안는가 하는 것이다.

換言(환언)하면 社會(사회)의 不安(불안)을 除去(제거)함에 잇어서 從來(종래) 思想對等(사상대등)에는 萬全(만전)을 期(기)하엿 지마는 鄙近(비근)한 雜犯(잡범)의 措置(조치)에 多少不徹底(다소불철저)한 感(감)이없지 안헛다。

純眞(순진)한 農村處女(농촌처녀) 하나를 또는 虛榮(허영)에 날뛰는 都市(도시)의 少女(소녀) 하나를 脫線(탈선)케 한것이 그다지 큰 問題(문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을 다만 正當(정당)치 못한 個人間(개인간)의 한가지 契約(계약)이라고만 돌릴 수 없는것은 勿論(물론) 性道德(성도덕)을 破壞(파괴)하고 社會秩序(사회질서)를 侵蝕(침식)하는 害毒(해독)은 그 影響(영향)이 어느 것보다 結斷(결단)코 적은 것은 아니다. 勿論(물론) 이때까지 이런 事件(사건)을 만히 摘發(적발)하엿고 또 犧牲(희생)된 少女(소녀)들의 勞苦(노고)가 적지 안흔 것을 記憶(기억)하는 바이나 앞으로 좀더 이 方面(방면)의 掃淸(소청)이 必要(필요)하다는 것이 또한 無理(무리)는 아닌 것이다.

 四(사)
끝으로 거듭 말하는 것은 誘引魔(유인마)가 跋扈(발호)하지 못하도록 適正(적정)한 社會的(사회적) 調整策(조정책)을 잊지말어야 하겟다는 것이다.""法律(법률)과 風習(풍습)에 依(의)하야 어떤 永劫(영겁)의 社會的處罰(사회적처벌)이 存在(존재)되고 그리하야 人爲的(인위적)으로 地獄(지옥)을 文明(문명)가운데 맨들어 노코 聖(성)스러운 運命(운명)을 世俗的因果(세속적인과 )에 依(의)하야 紛糾(분규)시키는 동안에 잇어서는 그런 性質(성질)의 事件(사건)이 繼續(계속)되리라는"빅톨,유고"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안코 또는 誘引(유인)하는 者(자)나 或(혹)은 誘引(유인)되는 者(자)의 責任(책임)을 곧 社會(사회)에 轉嫁(전가)시키지 안는다고 해도 그 個人(개인)을 問責(문책)하는 同時(동시)에 社會(사회)가 또한 連帶的責任(연대적책임)을 저야만하게 되는 것이 잘못이 아니요 當然(당연) 또 當然(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宗敎的情緖(종교적정서)를 가젓고 經濟的條件(경제적조건)이 生活(생활)을 支配(지배)하는 때가 만흔 것인데 誘引(유인)되는 動機(동기)가 모두 無智(무지)하엿고 環境(환경)이 悲慘(비참)하엿기 때문에 두가지의 貫革(관혁)에 失敗(실패)하엿던 것이다. 이 點(점)을 看取(간취)한다면 當局(당국)은 좀더 그들을 指導(지도)하고 未然(미연)에 防止(방지)하려는 全般的對策(전반적대책)을 어찌 樹立(수립)하지 안흘 수 잇으랴.
출처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동아일보 1939년 3월 29일 제1면

[7]-5 위안부들의 처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5 위안부들의 처지
기록에 따르면 위안소의 입구에는 이용수칙을 적은 판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위안소 내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용시간은 저녁 몇 시까지이다, 단 하사관과 장교는 밤 몇 시까지이다, 등등과 더불어 이용요금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사와 장교의 차이가 있었는데 병사는 대개 1~2원이었습니다. 병사의 한 달 월급이 7~1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위안소 이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셈입니다. 이용 시에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삿쿠라고 하였습니다. 삿쿠는 한 달에 한 개씩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대개 위안소에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직접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위안부는 1주일에 한 번씩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업자는 위안부의 명단과 변동 상황을 매번 군부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수입금은 대개 위안부와 업자 간에 절반씩 분배하였습니다만, 업자에게 받은 선대금이 과중하거나 악덕 업주를 만날 경우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부들은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제법 자유롭게 시가를 돌아다녔던 여자들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性奴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들의 경제적 처지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앞서 상하이 위안소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돈을 벌은 위안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습니다. 중국 한커우[漢口]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 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이름이 경자라는 조선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3만 원을 저축하였는데, 5만 원이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요릿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이 대단한 여자라고 표창을 하라고 했답니다.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가 돌아 온 문옥주라는 위안부가 있는데, 자신의 기구한 역사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5천 원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 5천 원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2년 당시 남의 집에 식모살이를 하면 대개 한 달에 11원을 받았습니다. 이에 견주면 경자나 옥주가 얼마나 큰돈을 모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원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야마나시[山梨]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 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대하면서 밤마다 남태평양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고향집을 그리워하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던 한 조선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위안부의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습니다. 기간이 지나서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한 불쌍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동남아나 남태평양으로 간 여인들 가운데는 전쟁말기에 배편이 끊어져 돌아올 수 없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휴지조각으로 변한 군표를 가방 한가득 들고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으며, 강을 건너다 그만 군표가 든 가방을 떠내려 보낸 어느 여인의 애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어떻게 해서 저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내진 것일까요.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분노해 마지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제부터 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전장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소설《농군》의 작가 이태준은 만주를 여행합니다. 펑티엔[奉天]역 이등대합실에서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자를 만납니다. 한 여자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30이 훨씬 넘어 보이고, 다른 한 여자는 솜털이 까시시한 16살의 소녀이고, 다른 셋은 22~23세로서 핏기는 없으나 유들유들하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입니다. 다들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랑수염의 노신사가 서 있습니다. 이태준이 여자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노신사가 다가와 시비조로 무엇 때문에 묻느냐고 하면서 베이징[北京] 근방으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인들은 노신사를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태준은 그 노신사를 베이징이나 티앤진[天津]의 여관이나 요릿집의 주인쯤으로 짐작하고 “험한 타국에 끌려가는 젊은 계집들”에 새삼스레 ‘골육감’을 느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었습니다(《무서록》, 서음출판사). ‘골육감’이란 말이 조금 낯섭니다만, 동포로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다음에는 1941년에 나온 최명익의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소설입니다. 어느 열차의 혼잡한 3등 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한 신사가 젊은 여인을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은 신사와 여인의 관계를 궁금해 합니다. 신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어느 사람이 “만주나 북지로 다녀 보면 돈벌이는 색시장사가 제일인가 봐”라고 하여 여자가 끌려가는 색시임을 맞춥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신사는 일선으로 다니면서 색사장사한 자기의 경력을 털어 놓습니다. 역시 돈벌이는 그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여인을 이삼십 명씩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도 합니다. 데리고 가는 색시는 도망쳤다가 잡혀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역에 도착하자 신사는 내리고 그 아들이 탑니다. 아들은 다짜고짜 여인의 뺨을 후려칩니다. 도망에 대한 화풀이지요.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화장실로 갑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설 속의 나는 그 여인이 자살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여인이 화장실에 간 것은 화장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여인은 아들에게 함께 도망친 다른 여인의 소식을 묻습니다.

이렇게 그 시대는 도처에서 여인을 끌고 가는 색시장사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여인의 뺨을 쳤지요. 그래도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앞서 저는 조선의 여인들이 어떻게 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보내졌는가를 물었습니다만, 저의 한 가지 대답은 색시장사입니다. 색시장사가 그녀들을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점은 그 시대의 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생존 위안부 175명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증언하였지요. 그에 따르면 175명 가운데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정진성,《일본군 성노예제》, 66쪽). ‘협박 및 폭력’과 ‘취업사기’가 어떻게 다른지 관련 책을 유심히 보아도 자세한 설명이 없군요. 제가 보기에 이 둘은 구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업사기가 들통이 난 그 순간부터 색시장수는 폭력배로 돌변하지요. 그들은 딸을 가진 가난한 집에 접근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딸을 데리고 갑니다. 경우에 따라선 거액의 선대금을 지불하지요. 그런 경우엔 사실상 딸을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삼이사》에 의하면 1941년 색시들의 몸값은 1천 원의 거액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은 다양합니다. 상하이 위안소에 갔다가 어느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몸을 건진 김씨 할머니는 1937년 17살 때 돈벌 수 있다는 모집인의 말에 속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를 위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위안부가 되는 줄 알고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색시장수들은 군위문단을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7월 함경도 청진의 어느 소녀가 위안소로 끌려간 것은 관동군 위문단의 모집에 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도 유력한 경로의 하나였습니다. 군에서 간호부로 일한다거나 밥 짓고 빨래하는 여자를 구한다고 해놓고선 위안부로 끌고 간 경우가 되겠습니다. 1940년 일본군이 남중국 난닝[南寧]이란 곳을 점령한 다음 위안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곳으로 황씨 성을 가진 조선 남자가 수십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황씨는 지주의 아들이고 데리고 간 여자들은 모두 소작농의 딸이었지요. 황씨는 당초 육군 직할의 다방과 식당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위안소를 경영하면서 그 남자는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1944년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안씨 성의 조선 남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친구가 하던 것을 인수했다고 합니다. 위안소 경영의 가장 큰 애로는 계약기간이 끝나 돌아간 여자의 뒤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고향에 돌아간 친구가 여자들을 계속 대주어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업자들은 1년에 한두 번씩 직접 고향에 가서 여자들을 구해 오는 것이 여간 큰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군령(軍令)을 사칭하는 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이라고 속인다는 뜻이겠지요. 떳떳하게 신문광고를 내는 모집책도 있었습니다. 현재 알려진 신문광고로는 경성일보에 2건과 매일신보에 2건이 있습니다.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 광고를 보면 “위안부 지급 대모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연령은 17~23세, 근무지는 후방 ○○대 위안부, 월수는 300원 이상, 전차금 3000원 가능”이라 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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