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8 러일전쟁 (日露戰爭)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8 일노전쟁(日露戰爭)
[ 일영동맹(日英同盟) ]
삼국간섭 후 일본은 동맹을 러시아와 맺어야 할지, 영국과 맺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대립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러시아에 대한 시각의 차이였다. 러시아는 1900년에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1)을 구실로 만주(중국 동북부)에 2만 명의 병사를 보내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 러시아가 만주에 머물며 조선반도로 나오지 않도록 러시아와 타협이 이루어질지가 최대 쟁점이었다. (*2)

논쟁의 결착을 낸 것은 외교관인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제출한 의견서였다. 그것은 일노와 일영 어느 쪽 동맹이 일본의 국익이 될까를 논한 것으로, 일영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고무라 의견서는 정부의 방침으로 채택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섭한 결과, 1902(메이지 35)년 일영동맹이 체결되었다. 일영동맹은 그 후 20여 년 동안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3)

(*1) 의화단은 향촌(鄕村)의 자위 조직을 기반으로 해 중국 전통 종교의 흐름을 따르는 조직으로, 외국인을 배척하여 선교사나 외교관을 살해하고, 베이징(北京)의 각국 공사관을 포위했다. 이에 대해 영국·러시아 등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을 포함하는 8개국이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2) 이 구상은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라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주창했다.
(*3) 당시 영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어서 이 동맹은 영국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일영동맹의 이점(고무라 의견서로부터)>
1 아시아에 있어서 영국의 목적은 영토 확장이 아니라 현상 유지와 통상 이익이며,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야심을 제지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2 따라서 일영조약은 평화적, 방위적인 것으로, 국제 여론에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3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청국은 더욱더 일본을 신뢰하게 되어, 일본의 이익을 증진한다.
4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강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뜻에 따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 영국은 동맹을 맺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이다.
5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일본 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용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영국인은 동맹국의 공통 이익이라는 점에서 일본에 재정상, 경제상의 편의를 도모하게 될 것이다.
6 일본의 입장에서 대영제국과 시베리아의 통상상의 가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7 러시아 해군은 영국 해군보다 약해서 대항하기가 수월하다.

러일전쟁

러일전쟁의 풍자화

[ 일노개전(日露開戰)과 전쟁의 향방 ]
일본의 10배의 국가 예산과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조선 북부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러시아의 극동 지역의 군사력이 일본이 겨룰 수 없을 만큼 증강될 것이 분명했다. 정부는 시기를 놓칠 것을 걱정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다졌다. 1904(메이지 37)년 2월, 일본은 러시아 군함에 공격을 가하여 일노전쟁을 개시했다. 전쟁터가 된 것은 조선과 만주였다. 1905년, 일본 육군은 고전 끝에 뤼순(旅順)을 점령했고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승리했다.

러시아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발트해로부터 발틱 함대를 파견했다. 함대 중 38척이 아프리카의 남단을 우회, 인도양을 횡단하여 약 7개월에 걸쳐 일본해에 도착했다. 이를 맞아 싸운 일본의 연합 함대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장관의 지휘 아래 병사들의 높은 사기와 뛰어난 전술로 발틱 함대를 전멸시켜, 세계의 해전사에 남을 경이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해해전[日本海海戰])

[ 세계를 바꾼 일본의 승리 ]
일본해해전에서 승리했을 때, 일본은 이미 외국으로부터의 빚과 국채로 마련한 국가 예산의 8년 분에 해당하는 군사비를 전부 써 버린 상태였다. 장기전이 되면 러시아와의 국력 차이가 드러나, 형세가 역전될 것이 명백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골라 일노 간의 강화를 중개했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 결과 1905(메이지 8)년 9월 포츠머스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음)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러시아에게 인정하게 하고, 중국의 랴오둥 반도 남부(후에 일본은 관동주[關東州]라 부름)의 조차권(租借權)을 취득하였으며, 남만주에 러시아가 건설한 철도의 권익을 양도받고 남가라후토(南樺太, 역주: 남부 사할린) 영유를 인정시켰다. 한편 배상금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려고 해도 국력이 한계에 달해 있다는 사정을 모르는 국민 중 일부는 이를 불만삼아 폭동을 일으켰다. (히비야화공사건)

일노전쟁은 일본의 생존을 건 전쟁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국의 안전 보장을 확립했다. 근대 국가로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유색 인종의 국가인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 대국이었던 백인 제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식민지가 되어 있던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1) 그러나 한편으로 황색 인종이 장래에 백색 인종을 위협할 것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 *2)이 구미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 유럽에서도 오랜 세월 러시아 제국에게 억압받고 있던 핀란드, 폴란드, 터키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2) 일청전쟁 후 이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등이 주장한 바 있다.

그림: 구미에서 본 일노전쟁 프랑스 신문의 만화 삽화(1904년). 거인 러시아에 도전하는 일본인을 온 세계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당시에는 모두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일노전쟁과 독립에 대한 자각>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결과, 아시아 민족은 독립에 대한 큰 희망을 품기에 이른 것입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

「만약 일본이 가장 강대한 유럽의 한 나라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인도가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후일의 수상 네루)

「입헌제였기 때문에 일본은 위대해졌다. 그 결과 그처럼 강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란의 시인 시라즈이)

「일본인이야말로 유럽에게 자신들의 분수를 깨닫게 한 유일한 동양인이다.」
(이집트의 민족 운동 지도자 무스타파 카밀)

[1-12] 일본과 유색인종 p147

16세기 이후 유럽의 백인들은 전 세계를 침략해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20세기 초가 되자 백인 통치 지역은 지구 표면의 90% 이상이 되었으며, 유럽 국가의 식민지가 아닌 지역은 중국과 일본, 태국, 이디오피아 정도에 불과한 상태가 되었다. 이 시기 백인들의 지니고 있던 인종적인 우월감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백인들은 세계 각 지역을 닥치는 대로 침략해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유색인종들을 말살했다.

유럽인들은 유색인종들을 살해하고 노예로 부리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원주민에 대한 살인은 살인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이 시기 유럽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유색인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으며 자신과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유색인을 짐승과 인간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존재로 여겼으며 각지의 미개한 원주민에게 예수교를 전파하고 인간으로 교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유색인종들에 비해 너무도 우월한 무기와 군사력, 학문과 예술을 발달시켜 놓은 상태였으므로 유색인종은 백인들의 침략에 거의 저항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흑인과 아메리카 인디언, 아시아의 황인종을 대한 태도를 보면 유색인종이라도 피부색이 검은 정도에 따라 차이를 두어 대했던 것 같다. 즉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축처럼 사육하고 부리고 죽이고 했지만 피부색이 흰색에 더 가까운 동아시아 황인종에 대해서는 흑인들처럼 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기 유색인종의 운명이란 대체로 비슷한 것이었으며 신은 인간을 백인과 그들의 노예인 유색인종의 두 가지 종류로 만들어놓은 듯했다.

러일전쟁

러일전쟁의 풍자화

1904년 일본이 전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패자인 러시아 제국에 승리한 사건의 역사적인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이 같은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전쟁은 물론 일본이라는 국가가 세계 열강 클럽에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된 것이지만, 유색인종이 만만치 않은 백인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일이었다.

러일 전쟁과 이후 일본의 급속한 성장과 급부상으로 인해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은 그 뿌리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점에서 볼 때 1904년을 계기로 아시아 아프리카에는 새로운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얘기라고 할 수 없다. 일본으로 인해 유색인종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열렸던 것이다.

헌팅턴이라는 미국 학자는 1993년 여름 '포린 어페어즈'라는 잡지에 실린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문 하나로 일약 월드 스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계 미국학자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저서를 통해 냉전 이후 세계에는 서구의 가치가 보편화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는데, 헌팅턴은 후쿠야마의 서구 중심설 대신 8개의 서로 다른 문명권이 충돌하면서 서구의 영향력은 날로 축소될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헌팅턴의 8개 문명권은 서유럽과 슬라브, 이슬람,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힌두, 중국, 일본 문명권을 말한다. 주로 종교와 인종에 따라 분류되었는데, 같은 백인 지역에서 기독교를 믿는 서유럽과 그리스정교를 믿는 슬라브 지역, 가톨릭을 믿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 아메라카는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한반도, 일본의 황인종 지역은 그냥 한 문명권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이렇게 해놓고 보면 세계를 백인종 지역과 황인종 지역, 흑인종 지역, 이슬람, 힌두 지역 등 5개로 구분할 수 있다. 앞으로 50년 정도를 전망할 때 백인 문명권과 황인종 문명권이 여러 분야에서 경쟁하는 반면 나머지 지역들은 뒤쳐지는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과 아프리카, 인도 지역은 종교와 인종 기후 등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갖고 있어 신속한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일찍이 문예부흥과 산업혁명에 성공해 최근 400년 동안 전 세계를 지배해 왔는데, 그나마 동아시아의 황인종 지역은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직접적인 지배를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후에도 신속한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산업화는 질병처럼 중심부로부터 가까운 지역에서 점차 먼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런 특징은 유럽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데, 중동부 유럽을 보면 서유럽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공업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북중미 지역에서는 그나마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보다는 경제사정이 나은 편이다.

아시아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 산업화의 핵으로서 중심부 역할을 수행해왔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으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해 공업화 정도와 생활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 중남미, 남아시아 지역은 이런 중심 국가가 없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19세기 중반 뒤늦게 문호를 열고 산업혁명을 시작한 일본이 50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서유럽의 산업화 수준을 따라잡고 열강 클럽에, 그것도 열강의 상층부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일종의 기적과 같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일본은 아시아의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0년대 한국과 대만이 공업국으로 부상하기 이전에는 후진국과 선진공업국의 차이는 너무도 컸고 그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날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후진국은 영원히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것이 1970년대 이후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행한 소위 종속이론인데 이 이론이 설득력을 갖고 확산되면서 전 세계의 신생독립국들이 속속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소련식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럽에 속해있지 않은 지역에서 일본만이 그토록 신속하게 산업혁명을 이룩하고 선진공업국이 될 수 있었을까. 이 문제 역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종속이론과 더불어 많은 학자들이 고민해야만 했던 숙제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건대 이는 전 세계에서 일본과 서유럽만이 중세에 봉건제도를 경험한 사회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봉건제도라는 것은 일종의 원시적인 연방제 형태의 사회구조로서 봉건사회의 영주들은 작은 지역에서 군주가 되어 토지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하기도 하면서 사안에 따라 왕을 중심으로 뭉치거나 혹은 왕권을 놓고 다투기도 했다. 왕으로부터 봉토를 하사 받은 귀족은 그 영토의 크기에 따라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서열을 갖고 영주가 되었으며 각 영주는 성을 건설하고 장원을 경영하였다. 각 장원에는 영주아래 기사와 기술자, 농노 등이 엄격한 신분 계급에 따라 생활하였다. 봉건사회는 절대군주사회에 비해 왕권이 터무니없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오랫동안 이 봉건제도를 경험한 사회만이 초기 자본주의 사회로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에 있어 일본의 또 한 가지 장점은 근본주의 전통이 없다는 것이다. 왕의 모친이 죽은 뒤 3년 상이 맞다는 쪽과 1년 상이 맞다는 쪽이 대립하여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움을 했던 옛 조선이나, 별 볼일도 없는 코란의 한 줄 가르침을 지키려고 흔쾌히 목숨을 던지는 이슬람교도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근본주의를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쉽사리 힘에 굴복하거나 대세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같은 문화적인 특성이 어떤 시대에는 단점이 되기도 했지만 개화기의 일본에는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문화전통이 있었기에 강제 개항이후 서양 군대와 힘으로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마자 다른 명분이나 자존심을 접고 신속하게 서양을 본떠 일본을 개조하는 일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과 조선, 사할린 등을 합병하여 더욱 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이후 1940년대에는 아예 동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질서로 재편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미국 영국과 전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전후 재건에 성공해 1970년대 이후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경제대국 일본은 비록 영토와 군사력이라는 면에서는 대일본제국 시절에 비해 위축되었지만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지위로 보아 역사상 가장 융성한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근대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유럽인들이 지니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유색인종의 후진성이 인종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연히 유럽이 먼저 산업혁명을 시작한 때문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일찍이 13세기의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서의 문물과 상품 교류의 통로를 개척하였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의 발달된 문물이 미개한 유럽에 전파되어 백인 사회의 문예부흥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서양인들은 지난 1000년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기도 했다(시사주간지 타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몽골 제국의 유라시아 대륙 진출은 너무도 놀랍고 강력한 사건이었던 탓에 아직까지도 유럽인들은 몽골에 대해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고 있다.

유럽인 입장에서 13세기 몽골의 진출이 유색인종의 첫 번째 존재과시였다면 19세기 이후 일본의 진출은 그 두 번째 사건이라 하겠다. 개항이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부상으로 인해 백인 사회에서는 '황화론', 즉 유럽은 황인종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는 이론이 생겨나기도 했다. 일본에 대한 공포가 과거 몽골의 유럽침공 때 그들이 겪은 악몽을 다시 기억나게 한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일본상품의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에서는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들이 거리를 메웠고 경제는 붕괴 상태로 내몰렸다. 이 시기 유럽과 미국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지만 일본의 경쟁력은 날로 강력해져 머지않아 전 세계가 일본의 지배아래 들어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팽배했던 것이다.

이처럼 몽골과 일본은 과거 1000년 간 유색인종, 특히 몽골리언의 위대함과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백인들의 인종우월주의를 무너뜨린 두 가지 사례이다. 백인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정복자로 지내온 탓에 유색인종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그나마 일본의 부상이 없었다면 지금 전 세계의 문명판도는 모든 유색인종들이 유럽인들에 의해 착취당하면서 영원한 가난 속에 허덕이고 있는 형국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국은 유럽의 종교박해와 가난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이룩한 나라이다. 18세기말 이들은 전쟁을 통해 영국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이후 점차 서부로 진출하여 인디언 원주민을 학살하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면서 북미대륙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후 미국은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사실상 세계의 주인으로 행동하였는데,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의 일에 간섭한다) 유독 소련만이 냉전기간 내내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나라였다.

소련은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냉전초기 핵무기 등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함으로써 서방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오늘날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는 가난한 개발도상국으로 전락했지만 미국인들이 여전히 러시아를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즉 '한때 우리와 맞먹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이후로도 오랫동안 존경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일본에 의해 태평양전쟁과 1980년대의 경제적인 진출로 두 차례 '공격'을 받았다. 1941년 일본 함대의 기습공격으로 미국은 태평양함대의 대부분을 잃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실제로 전쟁에서 패배할 위기에 놓여 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얻어내 자신감을 회복하였으며 점차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후 패전국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으로 보았으나 1980년대 말이 되자 국민총생산에서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는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미래 영화를 보면 거의 모든 미국회사의 사장이 일본인으로 등장할 정도로 이 시기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포는 굉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개항 이후 공업화의 기적을 일으켜 군사력으로나 경제력으로 당당하게 유럽인들을 압도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인은 세계 어디를 가나 존경받고 있다. 백인 가운데 한국이나 중국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일본을 무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세계인들이 황인종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그 가운데 대부분은 일본으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양의 문화도 대부분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음식문화, 바둑, 무술 등이 일본에 의해 전파되어 해외에서는 아직도 바둑은 고, 김치는 기무치, 태권도는 가라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태권도는 사실 가라데의 아류이다). 한복마저도 얼마 전까지 코리언 기모노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이다. 최근 중국과 한국이 세계 여러 나라로 진출하면서 자기 문화의 독자성을 알리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일본이 뿌려놓은 선점효과를 제압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먼저 전 세계에 전출하여 황인종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인들은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 그들은 일본사람과 한국인 중국인을 겉모습으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도 일본인처럼 부유하고 친절하며 매너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대개 거칠고 매너가 좋지 않은 데다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순진한 외국인들은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유색인종, 그 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는 일본이라는 경제중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모방하여 기술을 도입하고 상품을 판매하고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해외에서도 일본이 이룩해놓은 황인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활용해 유리한 입장에서 이민이나 사업을 영위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역사의 명장면) 일본해해전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역사의 명장면) 일본해해전
[ 발틱함대 육박하다 ]
1904(메이지 37)년 10월, 러시아황제는 일노전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함대의 총력을 일본을 향해 출발시켰다. 7개월 이상에 걸친 인도양에서 동지나해에 이르는 대장거(大壯擧)였다.

일본해군의 연합함대를 이끄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장관(司令長官)은 1905(메이지 38)년 5월 26일까지 쓰시마해협에 전함대를 집결시켰다. 러시아측이 먼길의 항해에 따른 피로가 극심했던데 대해, 이 사이 일본해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포격의 맹훈련을 쌓아 명중률을 높이고 있었다.

다음날 5월 27일 미명에 「적함 발견!」이라는 통보로 연합함대는 출동하여, 오후 두 시 경에 약 40척의 일본함대는 러시아함대와 조우하였다. 「적함 발견이라는 경보를 접하고 연합함대는 즉시 출동, 이를 격멸하고자 한다」라는 무전을 도쿄에 타전할 때,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는 여기에 「오늘 날씨는 맑고 화창하지만 파도는 높다」라는 한 행을 덧붙였다.

[ 일본의 대승리 ]
38척의 러시아 대함대가 2열로 일본해(日本海, 역주: 동해)를 북상해 왔다. 일본 전함대는 6000미터까지 접근한 시점에서 왼쪽으로 크게 회전해 적의 진로를 막아섰다. 일본함대는 러시아의 사령장관이 타는 기함(旗艦) 스와로프를 비롯한 선두를 가는 전함에 집중 포격을 가하였다.

승부는 40분으로 결정났다. 기함 스와로프는 불기둥을 뿜고 사령탑은 날아갔다. 계속해서 4척의 전함이 격침되었다. 러시아의 사령장관은 부상당하여 후에 항복하였다.

이 해전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것은 포격의 명중률이 좋았던 것과, 기사(技師)인 시모세 마사치카가 발명한 고성능 화약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저녁 무렵에서 다음날에 걸쳐 일본은 추격전에 들어가 이틀간에 걸쳐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 38척의 러시아함대 가운데, 격침 16척, 포획 6척, 도망 후에 억류된 것 6척, 간신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항으로 도망쳐 들어간 배는 3척 뿐이었다. 한편 일본측은 수뢰정(水雷艇) 3 척이 침몰했을 뿐이었다. 세계 해전사상에 이정도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예는 없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일노전쟁에서 활약한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전후(戰後), 패배한 러시아 장군의 구명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메이지의 일본에도 패자에게 인정을 베푼다고 하는 무사도(武士道)는 살아 있던 것이다.

"The Rising Tide of Color Against White World-Supremacy" by Theodore Lothrop Stoddard 미국 역사학자

(p.149)
Now four hundred years of unbroken triumph naturally bred in the white race an instinctive belief that its expansion would continue indefinitely, leading automatically to ever higher and more splendid destinies.

Before the Russo-Japanese War of 1904 the thought that white expansion could be stayed, much less reversed, never entered the head of one white man in a thousand.


(p.153)
1900 was, indeed, the high-water mark of the white tide which had been flooding for four hundred years.

At that moment the white man stood on the pinnacle of his prestige and power.

Pass four short years, and the flash of the Japanese guns across the murky waters of Port Arthur harbor revealed to a startled world the beginning of the ebb.

출전 : "The rising tide of color against white world-supremacy" p.149,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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