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일본의 한국 강제점령 이야기. 일본은 과연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을까?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김구 고종
우리는,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점령했다는 거의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를 역사교과서에서 왜곡하며 우리에게 가르치면서 정설로 믿고, 또한 믿지 않으면 돌에 맞아 죽을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봤어요, 과연 그건 누가 또 누구를 위해 조장한것일까묘? 우리눈에 가려진 저 꼭대기 분들의 자제들은 왜 유학을 갈까요? 왜 우리 언론들은 매일같이 일본 교과서가 왜곡되다 고 보도 할까요? 사실은 우리의 교과서가 틀린게 아닐까요? 바로 우리 사회의 맹점에서 개막장의 역사 바로알기는 시작됩니다, 로 여러분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하는 그 진짜 정보들은 전 여러분에게 알려주려고 하는것이죠.
오늘은 일본의 한국 강제점령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어요.
여기 무능한 왕이 하나 있어요, 바로 고종이죠.





이 부패하고 무능한 왕은 전혀 자주적인 의식도 스스로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하늘같은 중국폐하를 모시고 일본에 대한 뭣도 아닌 우월의식 가진 국민에 걸맞게 그저 수라상 한상 잘먹고 변혁을 원하는 실학자들은 뭔데 니혼자 분란을 일으키고 나대냐며 감금을 하는 폭군이었어요.







하지만 사실 그는 두려운거였어요, 그 자신도 유학파였기에 외국을 들러보며 가지고 있던 편견과 아집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는 그저 눈을 가리고 현상유지만을 위해 국민들을 압박해갔죠.







그러던 어느날 일본 공관의 제의가 들어왔죠, 조선은 약하오니 자신들에게 나라를 맡기시라고, 고종은 이제의가 달갑지만은 않았어요 편견과 아집이 뇌내 90프로를 치지하고 있는 고종은 내심 청나라가 이 제의를 하기를 바랬거든요.





고종은 애초에 일본 제의도 거절하기 싫었던게 앞으로 지나라의 목표도 모르겠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현상유지만 되길 하고 바라고 있던 차에 일본이 관리해준다니 얼마나 좋겠어여 하지만 그래도 뇌내에 남은 편견으로 일본을 거절하고 청나라에게 가서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들어줬어요. 고종은 기뻤고 더 놀기로 했죠.








그러던차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일본이 청을 간단하게 발라버리는걸 보자 고종의 맘속에 심한 감정의 기복이 일어났어요. 그때부터 청나라를 깔보기 시작했죠. 자기는 일본이나 청나라랑 붙을 제대로된 군대도 없으면서






유니폼도 일본께 괜찮다 싶던 차에 고종은 아예 나라를 일본에 내주게 되었죠.


국민 대다수는 일본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고 또 일본의 선진문명을 아는 사람은 일본이 자기 나라를 관리해준다는것에 대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반겼어요.










조선을 통치하게된 일본은 자국으로 건너오는 한국인이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강간을 해도 그들과 자국민을 평등하게 대하고자 했으며 조선에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 엄청난 근대화를 통해 발전을 이룩해내었어요.

철도와 댐, 그리고 농업기술의 근대화 그당시 조선의 기술력으로는 몇백년이 지나도 불가능 했던걸 바로 그 조선땅에서 일본인들이 실현시켜줫죠, 조선인에게 일본인은 신과 같은 존재였으며 언제나 환영받던 존재였어요.



그러던 어느날 김구같은 소위 배웠다는 무리들이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어요.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고 이다고,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 까마득한 옛날에는 아마도 조선이 역으로 일본을 가르치지 않았을까냐고 말이죠 이른바 독립투사라는 자들의 그런 혀놀림에 사람들은 점차 넘어가게 되요.





우매한 민중들은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기 시작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6살짜리 꼬마애도 나와 JAPAN OUT을 외쳐됬죠, 그걸 보며 6살짜리도 JAPAN OUT을 알지 않냐고 알다가도 모를소리로 우매한 민중 들은 자기들끼리 재선동을 하고 언제나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애초에 잉태될때부터 DNA에 노예근성이 박혀있던 조선인들은 그 알량한 촛불시위 조차 스스로 성공하지 못하고 미국이 준 자유를 덥썩 물었어요. 그러다가 또 공산주의랑 자본주의 양진영으로 서로 선동되서 치고 박고 싸우다가 두나라로 문단이 되었구요.
출처 : 개막장의 역사 바로알기 2 : 일본은 과연 한국을 강제로 점령했을까?

Ⅱ. 도덕적 세계관, 잘못된 일본관  “청년들이여, 낡은 역사관을 버려라”

1904년의 일이다. 스웨덴의 아손 크렙스트라는 신문기자가 서울을 방문하여 몇 달간 머물렀다. 어느 날 그는 조선의 형벌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여 오늘날 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종로1가의 전옥서(典獄署)를 찾아 갔다. 그를 맞은 전옥서의 책임자는 크렙스트의 몸에 뿔이 없음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장시간 신체검사를 까다롭게 진행하였다.(김상열 역, <코레아코레아>, 미완, 1986, 224-225면). 당시 전옥서의 책임자라면 오늘날 서울형무소의 소장에 해당하니 중앙부처의 국장급이다. 그런 고위 관료가 1904년 그 때까지 서양인의 몸에 뿔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이 사례는 당시까지 조선왕조의 지성계가 세계 실정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의 왕과 지배집단이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대외관계를 그르쳤다는 비판은 실은 너무나 자주 거론되어 온 것이어서 새삼스레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 무슨 대외관계를 어떻게 그르쳤는가라고 따지면 연구자들의 의견은 크게 갈라진다. 예컨대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에 대해 주로 국사학계의 연구자들은 김옥균 등이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이유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주로 외교학계의 연구자들은 당시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김옥균 등의 거사는 거의 불가피했다고 좋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1876년 이전 조선왕조는 조공과 책봉으로 상징되는 중화제국의 제후국으로서 존속하였다. 중국의 집권자들은 그러한 제후국도 넓은 의미의 중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국제질서에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이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되어 있다. 이 조문에는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라는 일본의 입장과 그러한 일본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조선의 입장이 모두 담겨있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순응한 것은 예전부터 일본과의 관계에서 자주국으로 대등한 외교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약 이후에도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자주 상국(上國)이라 불렀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주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제후국이란 이중의 국체 의식을 별 어려움 없이 그대로 보유하였다. 그에 대해 일본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조선 내에서도 중국과의 외교를 대등한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이 제기되어 무언가 바람직한 변화가 모색될 참이었다.

그렇지만 1882년에 우연히 발생한 임오군란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중국이 난당을 진압하고 국왕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다음, 임오군란으로 집권한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해 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가 국제사회에 하루아침에 폭로되고 말았다. 중국이 임오군란의 소식을 맞아 신속히 군대를 파견한 것은 실은 그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79년 일본이 중국의 조공국인 오키나와를 병합해 버린 사건은 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을 중심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할 필요성이 중국정부 내에서 거론되고 있었는데, 마침 임오군란이 그 좋은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중국이 3천의 군대를 서울에 파견할 때 사전에 주권자 고종의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후 고종은 중국과의 사대관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이 중국의 번방(藩邦)임을 명시한 중국 측이 제시한 조약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후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 멜렌도르프가 외교권을 장악하고 일본과의 조약개정과 미국·영국과의 조약체결을 주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과의 조약체결에서 중국은 조선이 중국의 번방임을 조약 서문에 명기하고자 하였지만 미국이 거절하였다. 이에 중국은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에게 동일 내용의 외교 조회를 보내게 하였지만 미국은 그 문서를 묵살하였다. 미국이 그렇게 한 것은 중국의 번방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는 자국의 체면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악성의 불평등조약은 국내에서 외국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 영국과의 조약에서 맺어졌다. 그렇게 될 일도 아니었는데, 멜렌도르프라는 외교권을 장악한 중국의 대리인이 그렇게 처리하고 만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당시 열국쟁패의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왕조를 반식민지적 종속상태로 내 몬 주범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중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불리한 여건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고 평가한다. 김옥균이 실패하자 일본은 중국과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군비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후 1945년까지 이어진 동아시아의 비극은 원래 그 진원이 서울에 있었다.

이후 1892년 중국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하기까지 근 10년간 고종과 집권세력이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자주 외교와 국방을 추구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조선정부는 중국의 후견과 보호에 기대어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외교 전략을 택하였다. 그러한 전략이 합리적이었다고 평가되기 위해선 중국의 후견이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판단과 일본은 도저히 중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양국의 군사력에 대한 판단이 모두 옳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틀렸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양국의 군사력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판명되었다. 중국의 후견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는 뒤늦게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밝혀진다. 당시 2천 년의 왕정을 폐지한 중국의 혁명군은 주변의 여러 복속 왕조를 폐하고 그 지역을 중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과 집권세력의 두 가지 잘못된 전략적 판단은 그 배경을 이룬 세계관이랄까 국제사회에 대한 질서감각의 문제까지 파고들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고종과 집권세력이 보유했던 전통적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은 중화제국이고 조선은 그 도통을 이어받고 있는 소중화(小中華)였다. 이 도덕주의적 세계관에서 일본은 바다 가운데 조그만 섬의 오랑캐였다. 나는 청일전쟁의 결과가 판명될 때까지 고종은 일본이 자신의 왕조보다 연간 국민소득이 10배나 많고 중앙재정은 무려 20배나 큰 나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다 가운데 오랑캐가 무례하게 천황을 칭하면서 나타나니 고종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였겠는가? 1894년 이후 고종에게는 13년간의 시간이 더 있었다. 그 기간 그가 어떻게 최악의 선택을 거듭해 왔는지에 대해선 너무 장황하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

만약 고종이 중국과의 관계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일본과 적절한 신뢰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반도를 통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물론이요, 동아시아의 20세기 역사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종의 맹목적인 반일 외교 전략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였다. 나는 무어라 해도 고종을 이해하거나 좋게 평가할 생각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식민지화라는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 자초지종을 두고 역사의 신 클리오가 주재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치자. 제일 먼저 소환당할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의 집권자 고종이다. 그런데도 최근 일부 역사가들이 고종을 계명군주로까지 칭송하고 있으니 참으로 엉뚱한 일도 다 있다는 느낌이다.
출처 :<시대정신>2005가을,겨울 통권 30호

[2-4]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p198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몰락한 선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마치고 동몽선습을 익혔다고 한다. 7살에는 효경, 8살에는 소학을 완성해 마을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데다 글 읽기를 좋아해 밤을 새워 고전을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곧 우봉 이씨 가문에서 영특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런 덕에 이완용은 10살 되던 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어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으로 발탁되었다. 이호준은 당시 우봉 이씨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서 고종과 민비 등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완용을 양자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려 한 것이다. 이호준의 후광과 타고난 재주를 바탕으로 이완용은 한말 난세에도 별다른 불행 없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기념해 실시된 특별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시강원 사서 등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했다. 1886년에는 정부에서 설립한 신식 귀족학교인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익혔다. 1886년은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한 역사적인 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학교인 이화학당을 비롯해 배재학당, 육영공원 등 3개의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등 민간인들이 설립해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처음부터 고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 아래 정부에서 설립 운영했던 교육기관으로서, 미국에서 초빙한 정식 교사와 학교시설을 갖추고 출발하는 등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했는데, 좌원은 현직관리, 우원은 고관들의 자제나 친척 가운데 선발된 영재들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제 1기 학생은 좌원 14명 우원 21명 등 모두 35명이었으며 강의는 미국에서 초빙된 교사 3명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즉 이완용은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교육을 받고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된 관리였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익힌 덕에 이완용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을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미국 현지에 교민도 없고 미국과 교역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외교관들은 아무 할 일도 없이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씻지 않아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말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상한 복장을 고집하던 당시 조선 외교관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미국의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은 이들이 왜 미국 땅에 머무르면서 비싼 국고를 탕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혁명가 서재필과 서광범 등 2명의 조선인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인물들이어서 공사관측과는 아무런 접촉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1890년 미국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형조,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1895년에는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의 경복궁 탈출을 도운 공으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고, 이후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되었으나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1905년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905년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하여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이완용에게 통고하게 된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 이재명으로부터 습격당해 허파를 칼에 찔리고 온몸이 난자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천황에 의해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후작의 반열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 동양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27년 69세에 이르러 이재명으로부터 얻은 상처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였다.

당시 이완용의 왼쪽 허파는 습격 때 입은 자상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오른쪽 허파마저 폐렴으로 인해 기능을 하지 못하자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이완용 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인격은 뭇 사람들로부터 흠모할 바가 많았으니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라고 추모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래 최대의 추모인파가 몰린 행사였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항상 이름 앞에 '매국노'라는 호칭을 붙여 대개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거짓말들이 국사학자들에 의해 당당히 언급되는가 하면, 그의 묘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의 일생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면 그가 이처럼 큰 모욕과 비난을 받을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동양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 천황은 몸소 그의 글씨를 청하고 답례를 했다고 한다.(윤덕한, 이완용 평전) 또한 이완용은 고매한 학식과 인품으로 조선과 일본의 정치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 통치에 협력한 것은 무능한 조선 왕실이 끝내 거부한 문명개화의 과제를 일본의 힘을 빌어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들을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관직에 입문한 이후 이완용은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정동파는 주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 조선 정치가 등으로 구성된 클럽으로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조선 정치에는 그리 큰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그룹이었다. 이완용은 1896년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독립협회의 이완용 대신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 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이다. 독립협회는 고종 환궁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는 정부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문부대신과 외부대신이 이완용에서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완용이 신념과 용기를 갖춘 애국자임은 서재필이 독립신문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였다.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는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하였다. 정부에서 이같이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리완용 씨는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필경 일은 그의 뜻대로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1897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무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3국 간섭에 굴복한 일본은 조선에서 힘을 잃었고 대신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는 외국 공사는 바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지칭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관리가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실제로 생명을 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러시아만이 조선 영토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었고 다만 여러 가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열강이 조선에서 차지하고자 했던 이권은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 크게 세 가지였다. 고종은 이 같은 여러 이권들을 서양에 넘겨주면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종이 군주라 할지라도 담당 대신(지금의 장관)의 결재 없이는 이권을 쉽게 넘겨줄 수 없었으니, 학부대신이자 외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20년 동안 압록강 및 두만강과 울릉도의 삼림을 베어갈 수 있는 권리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이었던 이 사업은 러시아에게 넘어갔지만, 제국주의 강대국의 부당한 압력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던 일은 이완용의 강직한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처럼 아관파천 기간과 고종이 환궁한 이후에 줄곧 러시아에 맞서 국익을 수호하던 이완용은 1897년 말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1898년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잠시 서울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중앙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수도 서울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다. 그 뒤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으로 임무를 수행함으로서 독립협회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고쳐 부름으로써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는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조선의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이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폭발하였다.

러시아의 영도 점유는 침략의 첫 단계라고 판단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영도조차(租借, 빌려줌)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국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이완용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그 성과로 1898년 11월 2일에 이르러 대한제국에는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하는 중추원신관제가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수구파들은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던 것이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이후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인물로서, 후세에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매국노라고 부르기는 힘든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1898년과 1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투쟁은 결국 고종과 수구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추진했던 혁명세력은 모두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북관찰사로 일하던 이완용도 입헌군주제 투쟁이 실패로 끝난 뒤 황국협회 및 황성신문 등 수구파들의 모략을 받아 결국 관찰사에서 면직 당하게 된다. 이후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완용은 고종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직을 고사한 채 고향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다시 조선의 개혁이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왕실의 일을 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 직을 받아들여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과 독립협회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혁명 세력은 일진회를 결성하여 수구파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문명개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혁명세력의 노선은 궁극적으로 일본과 합병함으로써 신속하게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이 같은 새로운 정세에 따라 기존의 자주독립 노선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합병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이완용은 이후 을사보호조약, 고종의 양위, 한일합병 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재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수구파들의 첫 번째 테러대상이 되었다. 이는 이완용이 당시 조선 정계에서 고종과 일본, 일진회 등 3대 세력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중심 역할은 이완용의 고매한 인품과 정치역량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는 선선히 자신의 소임을 받아들여 행동에 옮겼다.

당시 조선 반도의 통치자를 낡은 이씨 왕조에서 일본으로 교체하는 역사적인 작업은 악역을 자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조를 유지하고 전통관습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완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통감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서 이 땅에는 비로소 문명개화를 위한 작업들이 속속 추진되기 시작되었다. 개항이래 개화당의 선구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의 유신이 일본과의 합작을 이룬 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삼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었으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일본 정규군의 투입이 목전에 다가오자 이완용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을 중지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완용은 마지막으로 발표한 3차 경고문에서 조선 민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하는 것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다. 오늘날과 같이 국제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요. 병합 이해 근 십년 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 문제 등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급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완용은 당시 세계 정세로 보아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보다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실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이완용은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이완용의 호소로 인해 1919년 3.1운동은 6월초 군대에 의한 유혈진압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이완용의 사상은 이후 이광수 최남선 등 젊은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이완용은 새로이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설득하여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멸시와 차별을 없애도록 하고 각 도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문화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문예부흥이 시작되어 수많은 시인, 작가, 예술인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1927년 고종의 국장 이래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이완용의 장례식에서는 위대한 개화혁명가 박영효가 장례부위원장을 맡아 생전에 이룩한 업적과 활동을 추모하는 조사를 낭독했으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추모객이 참석해 위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운구 행렬은 서울의 옥이동에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10리에 걸쳐 이어졌으며, 장지인 전북 익산군에 운구가 도착한 뒤에는 현지의 추모객들에 의해 10리가 넘는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3-8] 전제군주 고종 p355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시작된 1894년의 혁명은 조선의 낙후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를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진정한 유신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새로운 국제 환경에 최소한이나마 적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지만, 갑오 혁명 정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갑오년의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혁명군이 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물리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조선에서 일정한 군사적인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청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넘겨받아 만주와 하북 지역까지 영향권에 둔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동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갖게 된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러시아는 중국의 북부 지역에 많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을 설득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 한다. 이들은 3국 공사 명의로 일본 정부에 서한을 보내 요동반도를 포함해 만주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비록 친절한 충고였지만 일본이 거절할 경우 군사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 담긴 정치적 압력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힘겹게 얻은 요동반도의 거점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을 감안할 때 독일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와 요동반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민비와 고종은 즉시 러시아에 붙어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통해 일본과 혁명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있는 혁명정부를 점차 압박해 들어가며 갑오개혁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정계에서는 점점 친러파의 입김이 세어졌고, 그 결과 몇 달 후 김홍집은 총리직에서 실각했으며 혁명정부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퇴조하는 일본 세력과 함께 동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세가 지속되면서 1895년 8월이 되자 조선 내각에는 개혁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들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갑오 혁명정부가 이룩해놓은 모든 개혁의 성과들을 원점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선의 혁명세력은 민비를 제거하여 사태의 역전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이 과업에 민비의 정적인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대원군이 거사의 정치적인 방패막이가 되어 여론을 관리하고 일본 측은 군사행동을 맡기로 각각 역할분담을 한 다음, 이들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잘 훈련된 일단의 일본인 무사와 군인들을 동원해 민비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당시 경복궁은 미국의 퇴역 육군소장 윌리엄 다이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의 정예 무사와 훈련대 병사로 구성된 특공부대는 손쉽게 이들을 제거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날 새벽 대원군은 서울 시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여 거사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최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함으로 인해 5백년 종사가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위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은 사실상 1894년에 이은 제2차 경복궁 쿠데타였으며,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조선 혁명을 구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를 위해 대원군과 연합한 혁명세력은 일본군의 힘을 빌어 민비와 그 척족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개혁세력들이 속속 입각해 중단되었던 유신의 과업을 하나둘씩 진행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 고종은 혁명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군 훈련대가 수비하는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6개월이 흐른 1896년 2월, 미국공사 앨런과 러시아공사 웨베르, 이완용, 이범진 등과 내통한 고종은 어느 날 새벽 경복궁에서 몰래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조정을 천도함)이라 한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군대의 경호를 받으면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혁명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한 날 아침, 파천 소식을 접하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무장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폭도들은 김홍집을 때려죽인 뒤 그의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로 발길질하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개처럼 끌고 갔다. 이들은 김홍집의 시체를 종각에 팽개쳐버렸다.

이로써 조선의 혁명운동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이 죽고, 10년 후 다시 갑오경장을 주도했던 김홍집마저 피살됨으로써 두 차례 모두 좌절되었다. 시대를 앞선 올바른 정신으로 조선 사회를 개조하려 했던 혁명가들은 대부분 죽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혁명세력은 결단을 내려 일본과의 합작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여기에서 잠시 이완용이라는 인물의 정치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관파천은 혁명세력이 인질로 잡고 있던 고종을 빼돌려 김홍집 등 개화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2차 혁명내각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완용은 이 같은 반동세력의 거사에 중심인물로 참여하고 그 공으로 고종이 새로이 구성한 어용반동내각에서 외무대신겸 학부대신겸 농무대신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3겸직 대신으로서 아관파천 시대 조선정계를 주도하게 된다. 이는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지도자가 되어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는 등 활발한 개혁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완용은 한말에서 근대의 시작까지 조선 정계에서 활동한 거물 정치인으로서, 비록 체계적인 사상을 지닌 혁명가로 보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고종과 일본, 국내 개혁파, 정동파 등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신뢰를 얻어 자신만의 활동 영역을 구축했으며 복잡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던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을미사변 이후 자신도 대원군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음식조차 거부하고 있었던 고종에게 있어 영어에 능통한 이완용과 미국인 앨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은 이후 조선 정계에서 정동파로 분류되는 집단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과는 별다른 연줄이 없던 이완용이 고종을 경복궁으로부터 구출해낸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노선과는 관련이 없는 충성심의 발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탁하자 자연히 러시아 공사관이 조선 정부가 되었고 러시아는 이때부터 조선의 보호국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걸쳐 강력하게 남진 팽창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이 정책의 최종 목표는 지중해나 인도양, 혹은 태평양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따뜻한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부산의 영도를 영구 임대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부산의 영도에 러시아의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조선과 일본은 물론 태평양 전체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므로, 일본으로서는 악몽과 같은 일이었다. 또한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게 되면 미국이나 영국으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당시 영국은 러시아가 영도를 점령하자 군대를 보내 무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실력행사를 했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의 영도 조차 문제는 이완용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의 강력한 반대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조선 정계에서 열세에 몰린 일본은 러시아에 접근해 38도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의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1897년, 러시아는 썰물처럼 조선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는 청나라를 협박해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군사기지로 확보하고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영도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조선 개혁세력의 반발과 영미일 동맹세력의 견제로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좌절되었지만, 요동반도에 여순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 한반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관심이 만주로 쏠리면서 군대와 외교관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고종은 1897년 다시 경복궁으로 환궁하였다. 이후 조선 정계는 이완용 서재필 등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과 고종의 지원을 받는 친러 반동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로 재편되었으며, 일본은 러시아가 떠난 틈을 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6년 이완용, 서재필 등에 의해 창립된 독립협회는 첫 사업으로 독립문을 세워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했다. 이어 1897년에는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가짐으로써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 시기 박영효, 안경수, 서재필, 이완용 등 개혁세력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고종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동 세력은 황성신문을 만들고 황국협회를 결성, 개혁파의 모든 활동에 사사건건 방해공작을 자행했다. 황국협회는 홍종우 등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1894년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공로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인물이다.

이 때의 조선 정계의 모습을 살펴 보면, 먼저 개항 이래 항상 조선 혁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일본은 3국 간섭으로 추락한 외교적인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 러시아까지 조선에서 한 발을 빼는 상황이 되자 이미 청나라를 분할 점령한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세력은 조선으로 밀려들어와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분주히 외교전으로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독립협회의 활동은 뚜렷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이후 조선의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민운동을 일으켰으며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대중 계몽에 앞장서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독립협회는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국가로 변모시키려 하였으나, 고종과 황국협회는 헌법제정과 의회구성을 거부하고 왕의 1인 지배체제를 고집했다. 마침내 1898년 10월, 서울 시내에 박영효가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고종은 이를 빌미로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이상재, 남궁억, 박영효 등 독립협회 간부에 대해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본격적으로 혁명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월에 들어 이승만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 지지파는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여 고종을 압박했다. 혁명세력의 위세에 놀란 정부는 체포한 독립협회의 간부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고종은 중추원(상원) 관제를 개정하고 독립협회가 추천한 인물들을 상원의원으로 임명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하원 구성과 독립협회 인정을 요구하고 있던 혁명세력은 이 타협안을 거부하고 고종 독재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급기야 1898년 11월 21일, 고종은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을 사주하여 깡패단을 조직,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 습격사건으로 만민공동회는 3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서대문 밖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이승만은 선동적인 가두연설로 많은 시민을 규합하였으며, 이 날 하루 종일 한양 곳곳에서 왕당파와 혁명파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는 무정부상태가 연출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에게 돌과 각목으로 맞서는 한편 홍종우 등 황국협회 간부들의 집을 습격하고 어용 깡패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11월 26일 독립협회는 고종과의 담판을 통해 윤치호를 상원 부의장에 임명하도록 하고 이승만 등 회원 17명을 상원(중추원)의원으로 파견하였다. 이후 혁명세력은 중추원을 거점으로 삼아 정부와 지속적인 대결을 시도하였으나, 12월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모든 혁명지도자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조선혁명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혁명가들은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다음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조선은 다시 고종의 독재 아래 신음하게 되었다. 이때 체포된 이승만은 이후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까지 5년 동안 기나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